이제는 정말로 평화, 평안 같은 단어들과 동고동락할 줄 알았습니다. 나이 서른이 벼슬은 아니지만, 무시받기엔 결코 쉬웠던 세월이 아니라서. 고생 끝에 낙이 이제는 내게도 광명처럼 오지 않을까 기대했던 것 같아요. 그런데 내 고생은 고생도 아니었는지. 가슴이 찢기고 된소리에 성대가 찢겨도 또 엄청 나락은 피해 갔습니다. 다 살 길이 있었고, 빠져나갈 개구멍도 찾았고. 차라리 무지막지한 고생이었다면 제대로 보상받았으려나.
시작이라는 것은 언제나 두려운 이름입니다. 어쩌면 끝이라는 것보다 훨씬 더요. 용을 쓴다고 썼는데 매번 썩 결과가 좋지는 않았습니다. 손 안 대고 코 푼 적도 많은데, 혹시 그것에 대한 보복인가 싶기도 해요. 나는요. 당신처럼 다 잠겨 푹 젖기에는 용기가 없었습니다. 헤엄쳐 나오지 못할까, 영원히 골에 썩어버릴까, 온갖 걱정을 다 끌어와 내 몸에 덕지덕지 발랐습니다. 그러면요, 나는 걱정에 떡이 져요. 뭉텅이로 떨어지는 불안과 초조는 하수구를 막고, 나는 그 위를 질척이며 걷습니다.
아주 가끔 삶이 영원해 보일 때가 있습니다. 유한성을 잊은 듯 구불어진 시간에 올라탄 그는 불패의 전사 같아요. 한 오백 년도 살아낼 것인데 두려울 것이 무에가 있단 말이야 - 풍월을 읊는 서당개 한 마리 옆으로 초라한 내가 걸어갑니다. 영원한 것은 영원이라는 단어뿐임을 되새김질하며. 나의 삶을 책으로 적으라 한다면 작가는 단연 프란츠 카프카일 것입니다. 나는요. 사회의 부조리도, 억압도 물리치기엔 무딘 칼이었습니다. 지푸라기를 엮어 만든 방패가 빗 속에 먼지처럼 날렸습니다.
그러나 마침내. 나는 모든 세월을 끌어안습니다. 나의 후회를 끌어안습니다. 영원해 보여서 두려운 것인지, 그렇지 않기에 두려운 것인지는 이제 아무렴 상관없어요. 그저 끌어안지 않으면 짓밟혀버릴 연약한 모든 시간의 나를 보듬습니다. 나는요. 완전한 붕괴를 맞이합니다. 그리고 두려운 시작의 손을 잡아봅니다. 끈덕진 두 발을 고집스럽게 구르며. 처참해진 칼과 방패를 손에 쥐고 등에 지고, 하지만 두 눈은 반드시 앞을 향하며. 어제의 나를 구원하고, 오늘의 나를 껴안고, 내일의 나를 맞이하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