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음 생이 있다면 우리 만나지 말자

His

by ami


야, 다음 생이 있다면 우리 만나지 말자.


함께 처음 맞이한 생일날, 곰 같은 나에게 딱이라며 사준 하얀 뽀글이 후드티에

엉겨 붙은 먼지가 겹겹이 회색이 되었는데도 버리지 못하겠더라.

같이 산 신발은 뒤꿈치가 해질 정도로 신었고,

지난겨울 손재주 없는 네가 꼬박 일주일을 떴다는 목도리는

초가을 때부터 장신구처럼 두르고 다녔지.


주말이 되면 가장 먼저 오는 버스에 몸을 싣고 시간 모르게 수다를 떨다

아무 정류장에 내려 처음 보는 도시를 모험했는데.

햇볕 내리쬐는 날 구태여 자전거를 타고 가자는 네 말에 기껍게 배낭을 챙겼지.

그날 샌들 모양대로 그을린 서로의 발등을 보고 얼마나 웃었더라.

나는 우리의 무결한 낭만을 속도 없이 사랑했다.


무용한 것들은 덧없고, 덧없는 아름다움은 흩어지지만, 기어코 영원해진다.


아무 이유 없이 널 주려 산 보랏빛 꽃다발과,

별 일 아닌 날 흑심 묻히며 쓴 손편지와,

네가 좋아하는 노래로 채운 플레이리스트 같은 것들.


만 원을 주고서야 뽑은 작은 인형에 건넨 너의 미소와,

꽁지머리 아래 삐져나온 잔머리와,

솜사탕 같던 네 숨결 같은 것들.


얕은 숨소리와 볼에 묻은 속눈썹,

입술을 꽉 채우던 찐득한 립글로스와

무거운 걸 들면 반드시 부러지던 연약한 손톱 같은 것들 말이다.


야, 너는 눈에 담아도 담아도 부족했어.

그래서 퍼내고 퍼내도 가득 차있을 만큼 사랑했다.


그러니까 우리, 다음 생이 있다면 만나지 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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