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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눈보 Sep 15. 2022

모두가 알아야 하는 죽음에 대한 외침

[서평] 은유 <알지 못하는 아이의 죽음>

<알지 못하는 아이의 죽음>은 특성화고 학생이었던 김동준 군이 장시간 노동과 사내 폭력으로 목숨을 스스로 끊은 사건으로부터 출발한다. 김동준군의 어머니, 사건 담당 노무사, 또 다른 피해자 아버지를 비롯한 관련된 아홉 명의 목소리를 담아 엮어냈다. 다른 현장실습생의 죽음이라는 사건을 나열하는 방식이 아닌, 한 사람의 사건과 죽음을 심도 있게 목격하는 형식을 택했다. 작가는 이런 글의 구조를 선택함으로써 단순히 사회에 관한 지식을 축적하는데 만족하는 것에서 벗어나 잘 알지 못하는 한 아이를 피가 돌고 영혼이 깃든 온전한 존재로 만나고 자기 삶과의 연결고리를 발견하게 되길 바란다고 한다.

작가의 바람대로 책을 읽는 내내 그 연결고리는 무수히 내 기억 속을 이리저리 유영하며 흩어져있는 기억의 조각을 잇기 시작했다. 잊고 있었던 다른 얼굴의 김동준 군은 내 학창 시절을 함께한 친구들이자 폭력에 민감했던 나의 자화상이었으며, 먼발치서 목도한 차별의 시선이었다.

나에겐 특이한 이력이 있다. 고등학교를 일반 고등학교와 특성화고 모두를 경험해 본 것이다. 고등학교 1학년은 일반 고등학교를 다니다 타 지역으로 전학을 가게 되며 디자인을 공부할 수 있는 특성화고로 진학해 졸업했다. 고등학교 1학년 때 다녔던 학교는 신생 학굔데 인서울을 꽤나 많이 보낸다고 소문난 사립학교였고, 스파르타식의 성적 줄 세우기 분위기가 만연했던 곳이었다.

희한하게도 바로 옆엔 마치 한 건물인 것처럼 특성화고등학교가 어깨를 나란히 하고 있었다. 그 아이들과는 운동장과 급식소를 공유했기에 늘 마주치곤 했었다. 그 학교 아이들과 내가 다녔던 학교 아이들 간엔 늘 미묘한 신경전이 있었는데, 그 나이 또래에 자연스럽게 일어나는 것이라고 설명하기엔 좀 부족했다. 내가 다녔던 학교 아이들의 대부분은 자연스럽게 옆 특성화고 아이들을 향한 무시가 기저에 깔려있는 듯했다.

화창한 날씨였다.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하품만 연신 나오는 칠판만 노려보고 있었다. 갑자기 운동장에서 특성화고 아이들의 웃고 떠드는 소리가 삭막한 교실 안의 적막을 깨고 들어왔다. 기계적으로 진도를 빼고 있던 선생님이 무표정으로 창밖을 바라보며 말했다. “쟤네들이 사람이냐?” 순간 정신이 번쩍 들면서 영문모를 불쾌감이 울컥 치밀었다. 그 폭력적인 한마디가 그 시절 내가 겪었던 학창 시절의 대부분을 설명한다. 성적이 한 사람의 모든 것을 판단하는 기준이었던. 이런 환경에서 특성화고 아이들을 향한 무시와 더불어 성적이 낮은 아이들에 대한 멸시의 정서는 우리들 간에 서서히 체득되는 것이었다.

인터뷰 뒤편에 나오는 김동준 들의 이야기에서 특성화고 학생, 특성화고 졸업생, 전국 특성화고 졸업생 노동조합 위원장의 이야기가 나오는데 특성화고 학생들에 대한 일반적인 시선과 편견을 겪었던 사례들에 많은 공감을 했다. 특성화고로 전학 가 만난 친구들이 했던 그 시절의 고민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오랜 세월이 흘렀지만 투명한 차별의 막은 깨어지지 않은 채 특성화고 졸업생들을 특정 집단으로 묶어두고 있구나라는 생각을 했다.

작가는 ‘청소년 노동에 대해 안쓰럽다, 혹은 보호해야 한다고 막연히 생각하던’ 시선의 문제는 ‘청소년을 동료 시민으로 보지 않는 친절한 차별주의자의 태도’이며, ‘노동조건을 문제 삼지 않고 청소년이 일하고 있다는 사실 자체를 문제 삼는다.’며 꼬집는다. 또한 ‘어린 나이에 돈벌이에 나서야 하는 측은한 학생이 아니라 경제적 독립을 이룬 한 존재로서 여느 노동자들과 마찬가지’라며 ‘문제의 본질은 청소년 노동을 악용하는 어른들이고 존엄한 노동을 불가능하게 하는 사회 시스템이지 청소년 노동 그 자체는 아닌 것’이라며 청소년 노동에 대한 편견을 한 꺼풀 벗겨준다.

한 사람의 죽음을 다룬 이야기는 읽는 데 많은 힘이 들어간다. 실제 읽는 내내 가슴이 먹먹해 눈물을 여러 번 쏟았다. 초입에 작가의 말을 읽어 내려가며 목 끝까지 뜨거운 게 차올랐는데, 여차하면 넘쳐흐를 듯 넘실대며 슬픔이 만조를 이뤘다. 김동석 군의 어머니는 ‘내 자식만을 위해선 내 자식을 위할 수 없다’라는 걸 아들을 보낸 후에 깨닫고 전국을 순회하며 목소리를 내고 계시다고 한다. 그 마음을 어찌 헤아릴 수 있으랴. 사회 시스템 속에서 타살당한 김동준 군의 죽음에 대해 함께 연대하는 마음으로 깊은 애도를 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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