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후감] 나는 소망한다 내게 금지된 것을 (양귀자 저)
1992. 8. 1. 출간
2025. 1. 24. 완독
흑백논리의 승패라는 함정
팀 회식을 하던 중이었던 걸로 기억한다. 대화 주제가 ‘나이’로 전환이 되자, 40대 후반이었던 여성 직원분이 “나는 나이 40살 되던 해에 엉엉 울었어. 여자로 사는 삶은 다 끝난 것 같아서.”라고 하셨다. 그 이야기를 듣고 어떤 사람을 규정하기엔 여자와 남자, 30대와 40대와 같은 단어는 너무도 납작하지 않나 하는 생각을 했다. 사회 지면엔 늘 남성과 여성의 대립, 청년층과 노년층의 세대 갈등과 같은 상징적인 표현으로서의 남성과 여성, 청년과 노년처럼 그들을 함축시키는 단어를 쓴다. 하지만, 그 카테고리 안에 묶인 여러 명의 사람들은 결국 우리의 지근거리에서 함께 숨 쉬고 있는 피가 돌고 영혼이 깃든 고유한, 자신만의 특별한 경험으로 빚어진 개개인이다. 함축적이고 획일화된 단어에 눌리는 순간 거대한 흑백논리의 착오 속에 휩쓸려 인간군상을 ‘급식충’, ‘맘충’으로 분류하고, ‘남자는 다 똑같지. 여자는 원래 저래’하는 심각한 오류 속으로 밀어 넣어 버릴 것만 같다. 무지개의 색이 빨, 주, 노, 초, 파, 남, 보로 이루어져 있다고 인식하지만, 실상 무지개는 일곱 가지 색이 아니다. 빨강에서 주황으로 주황에서 노랑으로 전개되는 과정에는 이름 붙일 수도 없는 무수한 색이 펼쳐져 있다. 계절에도 봄에서 여름, 여름에서 가을로 바뀌는 제5, 제6의 계절이 존재하는 것처럼.
‘나는 소망한다 내게 금지된 것을’ 읽는 내내 작가가 말하고자 하는 이야기가 무엇일까 하는 의문점을 품었고, 비로소 위에 길게 늘여 놓은 얕은 수준의 이해를 건져 올렸다. 이 책은 작가 양귀자의 장편소설로 1992년 초판이 나오자마자 바로 페미니즘 논란과 함께 화제의 중심에 올랐고, 그해 최고의 베스트셀러가 되었다. 1994년에는 최진실, 임성민, 유오성 주연의 영화로 만들어졌다. 소설의 주인공인 강민주는 27세의 심리학자이자 여성운동 활동가다. 어린 시절에 아버지로부터 학대당한 경험이 남성 폭력행위에 대한 문제의식으로 이어진다. 이후 여성문제상담소에서 상담원으로 일하며 여러 행태의 여성에 대한 남성의 폭력을 접한 후 남성들에 대한 분노를 키우고, 당대 최고의 남자 배우인 ‘백승하’를 자신의 아파트에 납치 감금하는 상징적인 복수를 계획한다. 백승하는 결혼하여 슬하에 아들을 둔 애처가이자 가정적인 남편의 이미지로 모든 여자의 ‘완벽한 남성상’을 가진 인물이다. (공유 같은 외모에 최수종의 이미지를 가진 인물 정도로 이해했다.) 강민주는 ‘백승하’라는 인물이 오히려 여성들로 하여금 성차별적인 현실을 직시하지 못하도록 환상에 빠져들게 한다고 생각했고, 납치 후 백승하가 갖고 있는 완벽한 이미지들도 결국 미디어에서 만들어 낸 것에 불과할 것이라고 단정 지으며 그 사실을 온 세상에 낱낱이 까발리며 실체를 드러내고자 한다.
삶이란 신(神)이 인간에게 내린 절망의 텍스트다.
나는 오늘 이 사실을 깨달았다.
그러나 나는 텍스트 그 자체를 거부하였다.
나는 텍스트 다음에 있었고 모든 인간은 텍스트 이전에 있었다.
이건 오만이 아니다.
나는 이제까지 한 번도 내가 이 땅의 사람들과 같은 조건으로 살고 있다고 생각해 본 적이 없다. 조건이라는 말에서 다소의 불순함이 풍긴다면 기꺼이 태도라는 말로 바꿀 용의가 있다.
나는 나를 건설한다. 이것이 운명론자들의 비굴한 굴복과 내 태도가 다른 점이다.
나는 운명을 거부한다.
절망의 텍스트는 그러므로 나의 것이 아니라 당신들의 것이다. ---「강민주의 노트」중에서
강민주라는 인물은 자신을, 여성을 대표하는 신화적 존재로 여긴다. 해설에도 밝혔듯 강민주라는 인물은 개념적이다. 실제적인 여성이라기 보단 당시 남성 권력 중심 사회에 스며있는 모순과 폭력을 예리한 칼로 하나하나 도려내고자 하는 저항적인 개념이다. 강민주를 그런 시각으로 보지 않는다면, 결코 이해할 수 없는 극단의 병적인 여성이 되고 만다. 강민주는 백승하를 납치하여 본인이 세운 치밀한 계획을 하나하나 시행에 옮긴다. 그 과정에서 백승하와 인간 대 인간으로 마주하게 되며, 아주 멀리서 텍스트로만 존재했던 백승하라는 인물에 대해 이해하기 시작한다. 강민주의 시각에서 백승하는 남성의 폭력을 대표하는 추성적 존재였지만, 살아있는 인간으로서의 백승하는 연극에 대한 진지한 열정을 가지고 자식을 사랑하며 여성에 대한 배려와 이해를 지닌 하나의 인격체라는 것을 서서히 깨달아 간다. 여전히 남자인 채로. 그렇게 강민주는 백승하에게 씌워진 ‘완벽한 남성상’이라는 외피가 걷힌 한 인간으로서, 입체적으로 살아 움직이는 그를 볼 수 있는 시선을 갖게 된다.
나아가 강민주는 백승하라는 인물을 통해 여성과 남성이라는 이분법적으로 이해했던 세상, 그 너머를 향해 ‘커브’를 돌리고자 한다. 제목인 ‘나는 소망한다 내게 금지된 것을’은 폴 엘뤼아르의 시 ‘커브’의 전문이다. 나에게 금지된 것을 향해 가는 여정의 첫 시도는 방향의 전환이다. 강민주는 커브를 돌리고자 했던 순간 자신의 심복이었던 황남기의 손에 죽임을 당하지만, 제2의 제3의 강민주들은 현생을 살아가고 있으므로 잡고 있는 인생의 핸들을 놓지 않는 이상 온 힘을 다해 돌릴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돌려 찾고자 했던 종착지는 책이 출간된 1992년 이후 33년이 넘는 긴 세월 동안 여전히 달려가고 있는 중인 듯하다. 이 소설이 당시 페미니즘 열풍을 불게 했다는 사실과 출간된 지 30년이 넘도록 베스트셀러의 자리를 지키고 있다는 사실은 여전히 이 거대한 숙제에 대해 꾸준한 이야기들이 생성 소멸된다는 방증이기도 하다.
이 소설은 작가의 말에서 밝혔듯, ‘함께 들여다보면서, 서로 대립하지 않고, 각자 동등한 자리에서 조화롭게 살아가는 길을 모색하는 데 유용하게’ 쓰일 소설이다. 또 ‘세상의 온갖 불합리와 유형무형의 폭력에 반대하는 모든 사람에게 함께 읽히기를 감히 소망한다. 그것이 삶을 대하는 진정한 예의라고 믿는다.’라고 밝힌 작가의 말을 어루만진다. 남자와 여자, 청년층과 노년층, 장애인과 비장애인과 같은 납작한 텍스트가 영혼이 깃든 사람으로서 부풀려진다면, 더 이상 그들은 정체불명의 공격 대상이 아닌 또 다른 얼굴의 ‘백승하’로 느껴질 테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