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는 내내 속이 울렁거리고 매스꺼웠다. 책을 펼치면서 요깃거리로 입에 넣었던 과자가 뱃속에서 처참한 형태로 으깨져 곤죽이 되는 모습이 상상되어 다시 뱉고 싶은 충동이 일었다. 동시에 고요했던 머릿속이 큰 압력을 받아 쉴 새 없이 흔들렸다. 침전되어 사라진 줄 알았던 기억의 파편들이 눈앞에서 도망쳤다, 가까워졌다를 잔인하게 반복했다. 마지막 장을 덮는 순간까지 불쾌하기 짝이 없는 문장들의 나열뿐이었다. 그래서, 덕분에, 비소로, 열네 살 소녀 치치림의 공포와 상실감에 공감할 수 있었다.
맞다, 내가 지나온 지 오래되어 잊고 있던 과거는 누군가의 현재진행형이었다. 어른들의 단단한 울타리가 필요했던 사회적 약자의 시절. 또래 문화라는 명목하에 ‘나’와 ‘너’가 같지 않다는 것에 불쾌감을 느끼며 살얼음 같은 기반 위에서 곧 허물어질 것 같은 결속력을 무수히 다졌던 지난날들. 그 결속력을 얻기 위해서는 어떠한 짓이라도 ‘우리끼리’는 합법이었던 잔인하고도 어린 나날들의 죄목들이 치치새가 사는 숲에 구체적으로 기술되어 있었다.
문득, 치치림이라는 소녀와 잠시 짝꿍으로 만났던 그 애의 얼굴이 묘하게 닮았다는 기시감이 들었다. 중학교 3학년 때 우리 반에 전학생이 왔다. 그 애는 여자였고, 힘이 셌고, 일진이었다. 모든 아이가 무서워했다. 그리고 담임은 전학생이 온 첫날 나를 교무실로 불러 이렇게 이야기했다. “우리 반에서 전학생이랑 짝꿍 할 사람은 너밖에 없는 것 같다. 잘 부탁해.” 나는 담임의 인정을 받은 것 같은 기분에 뿌듯한 마음이 일렁였다. 담임의 믿음을 실망시키고 싶지 않았다.
짝꿍은 의외로 무서운 아이가 아니었다. 이따금씩 같은 반 남학생과 싸웠는데 이겼다. 그래서 그 남학생이 그 애의 다리 사이로 기어들어갔다더라 하는 소문들이 들려왔지만 말이다. 내가 본 짝꿍은 그저 공부에 흥미 없고 사소한 농담 따먹기를 좋아하는 애였다. 그리고 자주 엄마를 때렸고, 엄마를 때린다고 삼촌에게 자주 맞는 것 같았다. 또한 친한 언니들을 따라 호빠에 갔던 무용담을 낄낄대며 늘어놓기도 했다. 다른 학교 애들과 주먹다짐했던 이야기도 들려주었다. 학습 태도가 불량해 체벌을 받을 때면 보통 아이들과는 다르게 폭력에 대한 두려움이 애초부터 없었던, 아주 익숙해 보이는 모습에 당황했던 기억이 있다. 그래서 누군가에게 맞고, 누군가를 때리는 것에 거침이 없었던 걸까?
운 좋게도 그 애와 짝꿍이었던 시절, 그 애의 심기를 건드리지 않아서인지 담임의 기대대로 짝꿍과는 무난한 중학교 3학년을 보낼 수 있었다. 짝꿍에게는 치치림이 그러했던 것처럼 울타리가 없었다. 어른들이 쌓아 올린 울타리를 허물고 달아난 건지, 애초부터 울타리가 없었던 건지 어린 내가 알 방도는 없었다. 그저 물음표를 위한 물음처럼 의미 없는 도돌이표 생각이었다. 짝꿍은 어디서 무엇을 하며 살까. 울타리를 한 번도 가지지 못했던 짝꿍, 그래서 늘 세상에 화가 잔뜩 나 항상 씩씩대던 짝꿍의 얼굴이 선명하게 떠오른다.
문득 어린아이에게 가장 큰 두려움은 체벌보다는 체벌조차 허락하지 않는 상황일 수도 있다는 생각에 잠긴다. 벼랑 끝을 향해 내달려도 말려줄 사람 하나 없다는 막막함, 공포감, 좌절감. 그 감각을 매 시, 매초 느꼈던 짝꿍의 막막함을 헤아린다. 그리고 짝꿍이 의미 없이 휘두른 폭력에 숨죽이며 눈을 조용히 내리깔던 아이들의 시선이 그려진다. 그리고 아무것도 하지 않은 채 짝꿍으로서 존재했던 무기력한 얼굴의 열여섯 살의 나를 생각한다. 짝꿍의 폭력성을 목도하는 것 자체로도 숨이 막혔던 유년 시절을.
책을 읽는 내내 느꼈던 매스꺼움은 단순한 불쾌함이 아니라 나의 기억 속 어딘가에서 곤죽처럼 뭉개져버린 감정들과 잊혀진 얼굴들에 대한 자각이었을지도 모른다. 내가 외면해왔던 치치림의 모습을 하고 있던 친구들과 나.
단순히 시간은 성실하게 흘렀을 뿐인데, 어느새 나이가 먹어 사회에서 지칭하는 ‘어른’이라는 명찰을 누군가로부터 물려받았다. 어른들의 무책임함, 무관심, 싸늘한 시선을 떠올리며 비난만 할 줄 알던 내가 이젠 누군가의 든든한 울타리가 되어주어야 한다. 그래서 내 안에 잠자고 있던 치치림을 깨웠나 보다. 치치림을 보면 떠오르는 불편하고 더러운 감각. 그 감각을 잊지 않아야 하므로 이 책이 어른들에겐 너무도 간절히 필요하다고 느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