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간 자율 학습 시간이 되면 정해진 자리로 가서 공부를 했다. 그 친구는 나의 세 번째 자율 학습 짝꿍이었다. 처음 한 달 동안은 서로 아무런 대화 없이, 인사조차 나누지 않고 그저 각자의 공부만 했다.
그러던 어느 날, 우리 자리 바로 뒤에 있는 청소 도구함에서 쥐가 나타났다. 우리는 소리도 지르지 못한 채 서로 겁에 질린 눈빛만 교환하며 발만 동동 굴렀다. 그 사건 이후에 우리는 친해졌다.
나는 문과이고 걔는 이과이고, MBTI도 나는 INFJ이고 걔는 ESTJ,
언제나 새로운 음식에 도전하는 나에 반해 걔는 언제나 먹던 것만 먹고, 이상형도 정말 다르고,
음식 취향이나 드라마 취향도 전혀 다르다. 오죽하면 지금까지 같이 본 영화가 단 한편 뿐일까.
항상 서로를 이해할 수 없다며 미개한 사람 취급하며 이야기하다 보니,
어느새 29살이 되었다.
그 친구는 나의 덕질을 그 누구보다 이해하지 못하지만,
그럼에도 나의 덕질을 하러 같이 가달라고 하면 기꺼이 같이 가주는 존재이다.
내가 허무맹랑한 이야기나 꿈들을 늘어놓아도,
한심한 듯 쳐다보면서도 그 누구보다 엄청 잘 들어준다.
그 친구는 나의 20대 방황을 곁에서 온전히 지켜봐 준 존재이다.
내가 이상한 생각에 사로 잡혀 있으면 조용히 바른 길로 당겨와 주고,
내가 신세 한탄을 하며 온갖 부정적인 기운을 뿌리고 다니면 옆에서 따뜻하게 품어주었다.
내가 진심으로 축하를 전할 수 있는 몇 안 되는 사람 중에 한 명이다.
친구가 나에게 가방순이를 제안했을 때, 그 마음이 정말 고마웠지만 나는 거절했다.
가방순이는 결혼식 내내 신부의 가방을 맡고 있는 사람이다. 그런 역할을 나에게 제안했다는 것은 나를 진정으로 신뢰하고 있다는 뜻이었기 때문에 정말 고마웠다.
하지만 결혼식장에서 가는 데에 시간이 너무 오래 걸리고, 내 덤벙거리는 성격 때문에 해줄 수 없다고 말하며 거절했다. 그 친구도 내가 멀리서 오기도 하고 여러 상황들이 복잡한 것을 알았기에, 흔쾌히 받아들였다.
사실, 나의 속마음은 달랐다. 기꺼이 그 역할을 해주고 싶었다.
하지만 가방순이는 신부 곁에 있는 사람이기 때문에 신랑신부의 지인들을 많이 만나게 될 것이고, 그러다 보니 더 예쁘고 날씬한 사람들이 하는 것이 좋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만약 내가 그런 자리에 서 있게 되면, 친구에 대한 지인들의 인상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칠 것 같았다.
나의 이런 속마음을 그 친구가 알게 된다면, 잔소리 폭탄을 투하할 것이 뻔하다.
그렇지만 그 당시에는 결혼식이라는 좋은 자리에 내가 부정적인 영향을 끼치는 존재가 될 것만 같았다.
자격지심이 한껏 발동한 순간이었다.
보통 친한 친구의 결혼식에서는 눈물이 난다고들 하지만, 나는 그날 눈물이 나지 않았다.
친구가 입이 귀에 걸릴 정도로 시종일관 웃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결혼하는 것이 정말 행복했나 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