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동이 제한되고 전국이 봉쇄된 프랑스에서의 일상
COVID-19로 인한 사회적 거리두기가 아직 남의 나라 이야기인 줄 알았을 때였다. 3월 12일 목요일 낮에 올린 글엔 “이탈리아에서는 더 강제적으로 (이동이) 제한되고 있으며 전 세계 다른 나라에서도 이런 조치가 취해지는 건 시간문제일 뿐이라고 전문가들은 얘기한다.”라고 썼었는데...
지금 보면 참, 나에게 닥칠 일도 모르고 얼마나 태평스러웠는지. 바로 그날 저녁, 프랑스에도 전국 휴교령이 내려졌다. 그때까지만 해도 ‘학교 수업만’ 닫고 연구소 출근은 원래대로 진행한다고 했다. 그러나 불과 이틀 뒤 토요일, 당장 그날 자정부터 필수시설을 제외한 모든 매장을 폐쇄한다는 발표가 났고, 이와 동시에 재택근무가 결정되었고, 급기야 화요일부터는 허용된 몇 가지 외출 사유를 명시하고 몇 날 며칠 누구누구라고 서명한 종이와 신분증 없이는 나가지도 못하게 되었다.
사실, 머리로는 봉쇄까지는 몰라도, 재택근무는 꽤 오래전부터 예상하고 있었다. 아니, 이 사람들은 중국과 한국의 텅텅 빈 거리와 상점들 사진 못 봤나. 이미 프랑스의 COVID-19 확진자수가 수천 명이고 사망자수가 한국을 넘어섰는데 (위 글을 쓴 3월 12일 기준) 뭐가 이렇게 아무 일도 없지? 우리나라에선 사회적 거리두기가 일어나는 정도에 비해서는 재택근무가 많이 도입되지 않은 것 같긴 하지만, 유럽은 원래 재택근무 많이 하는 거 아닌가. 게다가 우리는 실험도 안 하는 연구직이니까 얼른 시작하지 않는 게 오히려 이상한데 싶었다.
사실, 재택근무에 대한 예상뿐 아니라, 기대도 살짝 하고 있었다. 연구실 생활은 좋은 사람들 덕분에 꽤 즐겁지만 출근을 위해 집을 나서는 게 귀찮은 집순이인 나는 일주일에 하루 이틀 정도는 재택근무를 하고 싶은 마음을 몇 달째 키워오고 있었다. 인사팀에 물어보기까지 했는데, 정말 의외로! 실망스럽게도! 박사과정생은 재택근무가 규정상 불가능하다고 해서, 못 한다고 하니까 더 하고 싶은 마음이 든 상태였다. 하지만 도서관과 카페와 코워킹 스페이스 등 모든 매장들이 다 닫아버리고 공원도 폐쇄되고, 구체적인 사유를 적은 서류 없이는 나가지도 못 하는 상태에서 재택근무를 시작한다는 게 어떤 건지, 나는 전혀 모르고 있었다.
재택근무를 시작하고 단 며칠 만에 깨달았다. 내가 예상하고, 로망을 갖고 있었던 건 “집에서” 일하는 “재택근무”가 아니라 “어디서든” 일 할 수 있는 “원격근무’”였다. 프리랜서와 디지털 노마드들이 한다는 그런 것. 하지만 내가 경험하게 된 건 원격근무도 아니고 심지어 재택근무도 아닌, 집에서”만” 일해야 하는 “재택 감금 근무”였다.
3월 16일 월요일, 머리로는 예상을 한 줄 알았지만 내 몸과 마음은 전혀 예상을 하지 못한 재택근무가 시작되었다. 다행히 집에 널찍한 거실과 침실도 있고, 발코니도 있고, 무엇보다 이미 큰 모니터도 갖춰 두었기에 뭐 별 문제 있겠나 싶었다. 모니터를 갖춰둔 이유는.. 지도교수 미팅이 격주 월요일에 있으니 나는 늘 일요일에 벼락치기를 하고 연구소는 주말에 문을 안 여는데 노트북 화면으로는 벅차기도 해서, 벼르다가 중고로 27인치 모니터를 샀는데 정말 너무 좋다. (이게 없었다면 연구실의 모니터를 들고 가도 된다고 하긴 했다.)
그런데 정말 예상치 못한 문제: 집에 접이식 의자밖에 없는 것이다. 원래 3개월만 살 집이었고, 어쩌다가 6개월로 늘어났지만 이번 달 말에 이사를 갈 예정이었기에 가구를 들고 가는 것도 일이니, 새 가구를 최대한 안 사고 원래 이 집에 있는 가구들로만 생활을 했다. 무엇보다, 격주 일요일에 하는 벼락치기 외에 나는 집에선 책상에 앉을 일이 없고, 주로 소파와 침대에서 뒹굴거리며, 방에 있는 책상은 물건을 늘어놓는 공간일 뿐이라 여태까지 의자는 별 필요가 없었다. 단 한번, 접이식 의자에서 벼락치기 미팅 준비를 해보니 한 시간만 앉아도 허리가 부서질 것 같다는 건 경험을 해서 알고 있었다. 덕분에 재택근무가 이 의자로는 안 된다는 것도 알고, 재택근무가 시작될 거라는 예상과 기대를 하면서도, 의자는 준비해 두지 않았다니. 사실은 머리로도 전혀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다는 게 맞지 않나 싶다.
재택근무 발표와 동시에 필수 시설이 아닌 모든 상업 시설의 폐쇄가 발표되었기에, 의자를 사러 갈 수도 없었다. 온라인으로 주문할 수는 있지만 배송이 1-2주 이상 걸리고, 또 저렴한 가격도 아닌데 앉아보지도 않고 사기도 그렇고, 그때까지만 해도 3월 말에 이사를 진행할 예정이었어서 열흘만 참고 이사 가서 살까 싶기도 했다. 일단 급한 대로 중고 거래 사이트를 뒤져 십여 개의 메시지를 (심지어 프랑스어로!!) 보냈지만 답이 하나도 오지 않았다. 그래서 어쩌다 보니 거실 소파에 정착하게 되었는데.. 처음에 적응하는데도 시간이 좀 걸리고, 온라인으로 의자 쇼핑 알아보는데도 시간이 좀 걸렸지만 결국 3주 차에 접어든 지금, 소파 생활이 생각보다 편해서 만족하고 있다. 이사는 막지는 않을 테니 그냥 하려고 했는데 차를 구하기도 친구들에게 부탁하기도 번거로운 상황이라 현재는 상호 합의하에 봉쇄 이후로, 혹은 좀 잠잠해진 뒤로 미뤘다.
이런 물리적인 우여곡절도 있었지만, 정작 더 큰 문제는 따로 있었다. 사실 나는 내가 집에서 일을 잘 못 한다는 걸 잘 안다. 석사 과정 중에, 특히 석사 논문 쓰면서 뼈저리게 깨달았다. 하지만 나는 집에 있는 걸 좋아하니까, 계속 집에 있고 싶은 마음이 있고, 인간은 똑같은 실수를 반복하고... 석사 논문 때처럼 내가 뭘 하든 아무도 신경 쓰지 않아서 늘어지는 게 아니라 지도교수도 있고, 격주로 미팅이라는 마감도 있고 하니까 괜찮지 않을까 싶었다. 이번엔 다르지 않을까, 돈을 받고 일하니 (큰돈은 아니지만 박사과정생들도 월급을 받는다. 나의 경우 세후 1400유로) 잘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근거 없는 환상도 있었고. 그런데 ‘재택’과 ‘재택근무’는 천지차이라는 걸, 집에서 일 못 하는 나의 습성은 단지 내가 나이가 들어간다고 해서, 월급을 받는다고 해서 그냥 사라지지 않았다는 걸, 새삼스럽게 깨달았다.
온라인에는 사회적 거리두기로 인해 다들 시간이 너무 많아져서 어째야 할지 모르겠다, 넷플릭스에 있는 영상을 다 봤다(가능한가?), 천 번을 휘저어 마시는 커피가 유행한다, 빵을 굽기 시작했다, 등등 넘쳐나는 시간을 죽이는 방법에 대한 이야기가 가득한데, 나는 전혀 한가해지지 않았다. 어차피 일은 그대로고, 주 1-2회 하던 장보기도 가능하고. 봉쇄로 인해서 안 되는 건 친구들 만나기, 모임, (식료품 외) 쇼핑, 외식, 카페 가기 등인데.. 프랑스에 온 이후엔 전부 다 한 달에 한번, 많아야 두 번 하던 일이다. 지난 6개월간 툴루즈에서 연구실 밖 사교활동은, 친구가 놀러 왔을 때 외식 2번, 연구실 사람들이랑 외식 2번, 카페는 딱 한번, 또 연구실 애들이랑 우리 집에서 요리 3-4번, 비건 모임에서 모집한 포틀럭 1번, 토스트마스터즈 모임 1번 참관이 전부다. 서울에서의 생활과 비교하면 상상도 못 할 일이지만.. 사실 이전에 독일에서의 생활도 그런 걸 보면 나는 서울에서만 바쁜 게 아닌가 싶다. 독일에서 석사 수업이 끝나서 한가하던 시기에도, 비건/드로잉 모임은 많아야 일주일에 한 번, 보통 한 달에 한두 번 정도였다. 친구들을 집에 불러서 밥 해 먹거나 한 일은 종종 있었지만, 그마저도 많아야 일주일에 한 번. 그렇게 여유롭게 수년을 보냈다.
아니 서울에서는 끊임없이 모임을 만들던 사람인데 왜?라고 의문을 갖는 이들이 있는데.. 서울만큼 뭔가를 많이 빨리 해야만 한다는 압박이 덜해서 그런 걸 수도 있고. 일단 여기선 물리적으로 정신적으로 별로 필요성을 못 느끼는 것 같다. 연구실에 하루 종일 있는데.. 일찍 출근해서 (8-9시) 일찍 퇴근할 수도 있지만 늦게 출근해서 (10-11시 반 사이) 늦게 퇴근하다 보니 저녁 시간도 별로 없다. 그냥 느긋하게 출근하고 느긋하게 퇴근해서 저녁 만들어먹고 뒹굴거리다 잠드는 평화로운 하루하루. 굳이 저녁 시간을 만들려면 일찍 출근하면 되지만, 별거 안 하는데도 시간이 훌쩍 지나가는 여유로운 아침 시간이 너무 편하고 (좋다기 보단 편함. 아깝긴 하다), 연구실 생활이 재밌고 대화도 정신적으로 풍성한 편이라서 딱히 또 사람들을 만나야겠다는 생각이 많이 들지 않는다. 또 연구라는 게 땡 퇴근하면 끝나는 게 아니라 계속 머릿속에 차 있어서 에너지가 또 나름 꽤 드는 것 같다. 아직 박사과정/연구자의 생활에 ‘숙달’ 하지 못해서 그런 게 아닌가 싶다. 모임을 만들고 참여하는 걸 좋아하긴 하지만, 기본적으로 집에 혼자 있어야 에너지가 충족되는 스타일이라 모임을 만들고 참여하는 데에는 또 에너지가 드니까..
어쨌든 사회적 거리두기와 외출 불가의 시대에 나는 시간이 전혀 늘지도 않고 한가해 지지도 않았다. 이 사태에 다행히 잘리거나 일이 줄어들지 않고 월급을 꼬박꼬박 받을 수 있는 일을 하니 일에 쓰이는 시간이 줄지 않은 건 당연하긴 하다(물론 실험을 하는 연구였다면 연구소가 폐쇄되어서 실험을 못하니 일은 줄고 월급은 그대로 받았을 것인데 그건 특수한 경우니까). 사람들은 사교활동을 하던 시간이 늘어난 건가 본데.. 나는 사교활동을 연구소에서만 하고 일 외의 시간을 어차피 대부분 혼자 보내는 집순이다 보니 하루에 왕복 출퇴근 시간 한 시간 외에는 새로 생길 시간도 없긴 하겠지. 그런데, 그 한 시간만큼의 여유도 늘어난 게 아니라, 오히려 더 여유가 없어진 것 같다는 게 더 큰 문제다.
즉, 출근을 이전보다 일찍 하는데 퇴근을 일찍 못 한다는 것. 결국, 업무시간과 업무시간 아닌 것의 경계가 모호해졌다는 것? 아침에 여유롭게 장 볼 일도 없고 자전거 타나 지하철 타나 고민할 필요도 없고 눈만 뜨고 세수만 하면 출근할 수 있으니 평소보다 훨씬 더 일찍 출근한다. 9시쯤 출근해서 = 일을 하겠다고 모니터 앞에 앉아 있는데 일을 좀 하려다 치면 딴짓하고, 논문 좀 읽다가 이메일 보고, 테이블 좀 만들다가 기사 보고, 밥 좀 먹고, 메신저 보고.. 인스타그램 보고.. 다른 사람들 눈이 있어서 그런지 사무실이라는 분위기 때문인 건지 마냥 폰을 쳐다본다던가 딴짓으로 빠지게 되진 않는 연구소와 달리 집에선 자주 인터넷의 늪에 빠지기도 하고, 한번 빠지면 끝이 없다. 또 연구소에서 일상적으로 수다 떨던 친구들이 없으니 소통이 목마른 건지 온라인 메신저나 SNS도 자꾸 더 확인하고 싶어 진다. 어느새 정신을 차려보면 저녁시간. 업무시간 중에 일을 거의 못 했으니, 그럼 저녁 먹고 또 좀 해야지 하고 앉아서 조금 하다가 또 딴짓하고. 적당한 시간에 주변 사람들이 집에 가는 것도 아니고, 연구소가 문을 닫아서 퇴근해야 할 압박이 있는 것도 아니다 보니 그러다 보면 결국 하루 종일 모니터 앞에 앉아 있었어서 눈은 아프지만, 일은 못 끝낸 상태가 되는 것이다!!
처음 1주일은 정말 일을 하나도 못 했다. 원래도 좀 산만한 성향이 있고 (대체 고등학교 때 어떻게 살았는지 알고 싶은데 기억이 안 난다), 또 연구라는 게 자유도도 큰 만큼 늘어지기도 쉬운데 이 산만한 이가 혼자서 연구를 하겠다고 집에 있으니. 정말 대재앙이었다. 둘째 주 월요일에 바로 교수님 미팅이 없는 게 정말 천만다행이었다. 사실, 원래 바로 그 월요일이 격주로 하는 미팅 예정일이지만 교수님이 학회에 가야 해서 금요일로 미뤄졌던 걸, 코로나로 학회가 취소되었으니 다시 월요일로 당기자고 하길래 안된다고 사정하여 다행히도 둘째 주 금요일로 유지를 시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말 답답한 상황이 지속되어서 그냥 무급휴가를 받고 맘 편히 놀면서 설렁설렁 여유롭게 논문 읽고 싶으면 읽고 재택근무에 적응하고 싶다는 생각을 하고 있던 둘째 주 수요일 오후 1시, 정말 드라마틱하게도 일에 집중하는 방법이 찾아왔다(??). 덕분에 수목 이틀 전속력으로 일 한 뒤, 금요일 오전에 성공적으로 미팅을 했다. (여전히 이 방향이 맞는 것인가에 대한 의문은 있다) 그 뒤로 금요일, 월요일, 화요일인 오늘, 좀 다시 느슨해지긴 했지만, 그래도 그 전처럼 절망적이지는 않고, 재택(감금) 근무 좀 할 수 있을 것 같은데? 하는 생각이 든 지 5일째다.
이제 뭔가 좀 알 것 같다 라는 생각이 들게 된 방법은, 다음 글로 이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