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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승혜 Aug 22. 2020

누가 대학원생에게 글쓰기를 가르쳐주나 (2)

글쓰기 기술에 앞서 몸과 마음의 건강을 챙겨주는 글쓰기 모임에 대하여

남극과 같은 혹독한 학계에서 글쓰기 모임으로 서로를 보듬어주자. 이런 글쓰기 모임은 어떻게 시작하면 될까?


The Writing Workshop: Write More, Write Better, Be Happy in Academia 책의 내용과 이를 참고로 한 개인적 경험을 바탕으로 한 글입니다. 아래 글에서 이어집니다.


남극의 펭귄들과 학계의 대학원생들

영하 30도에 육박하는 남극의 겨울, 황제펭귄들은 체온을 보존하기 위해 서로 바짝 옹송그리며 모여 한 덩어리를 이루어서 살아남는데 이를 허들링(huddling)이라고 한다. 특히 암컷 황제펭귄들이 알을 낳고 두 달간 먹이를 찾아 떠나면 그 기간 동안 수컷들은 아무것도 먹지 못하면서 알도 따뜻하게 품어 부화시켜야 하는데, 이때 가장 커다란 규모의 허들링을 이룬다 (Lynne, 2018).


허들링 중인 아기 펭귄들과 (왼쪽) 알을 품으며 허들링 중인 수컷 펭귄들 (오른쪽)

이런 허들링 무리는 주변 온도보다 훨씬 따뜻해서 무리에서 나온 펭귄에게서는 마치 사우나에서 나오는 것처럼 김이 날 정도라고 한다. 중심부 온도는 40도에 육박한다고!! 사진 출처: National Geographic  많은 사진들


앞 글에서 소개한 책 The Writing Workshop: Write More, Write Better, Be Happy in Academia(Sarnecka, 2019)의 저자는 이런 남극만큼이나 거칠고 힘든 환경처럼 느껴질 수 있는 게 학계에서의 삶이라고 한다. 국내외를 막론하고 많은 이들이 박사과정과 학계에서의 커리어를 마치며, 혹은 포기하며 그곳에서 정신적 육체적으로 얼마나 힘들었는지, 다시는 돌아가고 싶지 않다는 얘기를 많이 한다. 그렇다면 이런 학계를 과연 어떻게 사람이 살만한 곳(fit for human habitation)으로 만들 수 있을까? 저자는 펭귄들이 허들링으로 혹독한 남극의 겨울을 살아남는 것처럼, 혹독한 학계에서 따뜻하게 살아남는 방법으로 꼭 붙어 모여 서로를 돕는 커뮤니티이자 “사회적 허들링”이라 할 수 있을 “글쓰기 모임”을 제안한다.


대학원생과 연구자들의 유일한 결과물이자 평가의 기준은 첫째도 둘째도 마지막도 (아카데믹) 글쓰기인데, 대학원생들이 글쓰기에 대해 받는 도움은 보통 사회적 상호 작용이 거의 없이 이루어진다. 학생이 초안을 써서 지도교수나 선배 등에게 이메일로 보내면 얼마 뒤에 코멘트가 돌아오고, 수정을 해서 다시 보내면 다시 또 코멘트가 돌아오는 식이다. 실제 몇 달에 한 번이나 일 년에 한두 번 정도만 지도교수를 만나는 대학원생들도 많고. 다른 사람들과 만나서 글을 같이 쓰거나, 글쓰기에 대한 팁이나 어려움을 공유하거나 대면해서 실시간으로 피드백을 받는 경우는 드물다는 것이다.


이렇게 상호작용이 적은 학계의 글쓰기 피드백 시스템과 달리, 사람들은 잘하고 싶은 일이 있을 때 자연스럽게 이를 같이 하고 이에 대한 이야기도 자유롭게 나누는 커뮤니티를 만들고자 하는 성향이 있다. 이를 “실천 공동체 (community of practice)라고 하며 이런 커뮤니티가 배움과 성장에 큰 도움이 된다 (Wenger, 1998, 2011). 온라인 게임의 유저 커뮤니티나 뜨개 공동체도 이의 일종이라고 볼 수 있다. “글쓰기 모임”도 어떻게 더 생산적이고 성공적으로 아카데믹 글쓰기를 할 수 있는지, 그러면서도 어떻게 육체적 정신적 건강을 해치지 않으면서 이룰 수 있는지에 대한 목표를 함께 고민을 나누고 실행하는 커뮤니티인 것이다.


글쓰기 모임은 어떻게 시작하면 되나

글쓰기 모임은 말 그대로 일단 정기적으로 모여서 글을 쓰고 글에 대한 이야기를 하는 것이다. 글쓰기 목표와 어려움에 대해서도 이야기하고, 서로 격려도 하고 피드백도 주고. 여기서 ‘모임’이라는 이 단순한 행동이 커뮤니티를 형성하는 가장 큰 단계이다. 운동도 혼자서 하려면 잘 안되는데 일단 친구나 트레이너와 약속을 잡았다면 헬스장이든 요가원이든 운동장이든 가기도 더 쉽고, 일단 가면 운동을 하는 것도 그렇게 생각만큼 어렵지 않고, 함께라면 더 강도 높은 운동을 하는 것도 더 즐겁거나 쉬워지니까. 이와 마찬가지로 글쓰기 모임도 일단 만나면 글을 쓰는 것도, 글에 대한 고민을 나눠서 어려움을 극복하는 것도 쉬워지는 건 비슷하다. 그럼 만나서 무엇을 할지는 참가자들의 목적에 따라 다를 텐데 보통 아래 네 가지 활동 중 참가자들에게 필요한 것들을 골라서 모임을 구성하면 된다고 한다.   


    만나서 같이 글쓰기: 일단 그 시간만큼은 따로 내어서 모임에 온 만큼 딴짓이나 더 급한 일을 하는 대신에 꼭 글을 쓰게 되고, 함께 글을 쓰면서 서로 무언의 지지와 동료애를 느낄 수 있음.   

    글쓰기 진도 체크인: 서로 한 주간의 진도와 장기적 목표 달성 과정을 확인함으로써 글쓰기에 대한 책임감과 다른 사람들의 사회적 지지를 느낄 수 있음.   

    글쓰기 수업과 토론: 글쓰기 기술에 대해 배울 수 있음.  

    피드백을 나누기: 서로의 글 초안에 대한 피드백을 나눌 수 있음.   


저자가 가르치는 글쓰기 세미나는 UC Irvine 대학원의 정식 수업으로 10주간 매주 한번 2시간 50분을 만나서 아래와 같이 진행된다고 한다.  

 

    1. 만나서 30분간 조용히 각자의 글쓰기  

    2. 일주일간의 진도를 점검하는 체크인 세션
   - 인원이 많다면 간단히 진행하고 (총 30-40여분?)
   - 인원이 4명 이내라면 각자 10여분씩 아래 네 가지 질문에 답해본다.
     지난주의 글쓰기 목표는?
     목표를 달성했는가?
     달성하지 못했다면, 방해요인은 뭐였는가?
     다음 주 글쓰기 목표는?      

    3. 매주 이 책 (The Writing Workshop)의 한 챕터씩 읽고 이에 대해 토론  

    4. 피드백 세션   
  - 피드백을 원하는 1-2인. 1인당 최대 30분
  - 1인당 최대 1 페이지 (1줄 간격) 혹은 2 페이지 (2줄 간격)의 짧은 글
  - 글을 미리 읽어올 필요 없이 그 자리에서 조용히 읽고
  - 모두가 한 문서에(구글 문서 등 온라인 플랫폼을 활용) 바로바로 코멘트를 적는다. 20분
  - 피드백 내용에 대해서 토론한다. 10분


아 이렇게 하면 된다,라고 가이드가 나와 있으니 그다음은 쉬웠다. 필요한 모임이 없으면 만드는 건 나의 오랜 취미생활이니까, 가이드까지 나와 있는 모임을 만드는 건 어렵지 않다. 시기가 시기인만큼 오프라인이 아닌 온라인으로 만든다는 차이가 있지만 그건 큰 문제가 아닐 것 같고.. 오히려 다들 온라인 모임에 익숙해져 있는 데다가 다른 학교, 다른 나라에 사는 사람들과도 더 쉽게 모임을 할 수 있어서 좋았다. 다만 이 모임은 불특정 다수의 사람들이 관심을 가질 만한 모임은 아니라서 사람들을 모으는 게 기존에 내가 만들어 왔던 책모임이나 드로잉 모임들보다는 조금 어려웠다. 그때는 인구 천만의 대도시에 살기도 했고... 일단 대학원생이거나 포닥이나 주니어 연구원 등 학계에서 글을 쓰는 사람들 중에 이런 모임이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즉 글쓰기에 어려움을 느끼는 사람이어야 하고 또 나와 어느 정도 비슷한 주제로 연구를 해야 나중에 피드백 세션을 할 때 도움이 될 터였다.


글쓰기 모임(들) 만들기와 그 효과

일단 우리 연구소에서 찾아봤는데 우리 팀은 바이오테크 실험 위주의 연구를 하는 다른 팀들과 연구주제가 꽤 많이 다른, 섬 같은 존재라 선뜻 제안을 할 만한 학생들을 아는 사람들이 없고, 우리 팀 내에서 보면 왠지 다들 글을 잘 쓰고 있어 보여서 나 이외에는 모임을 통해 도움을 받을 만한 사람이 없어 보였다. 다행히도 지난 3월에 합류한 박사과정 학생이 나와 비슷한 단계의 글을 쓰고 있는 데다 모임에 관심을 보여서 둘이 간단히 모임을 진행했다. 우리는 글쓰기 모임 가이드의 1번 항목인 같이 글쓰기는 패스하고 2번 항목인 체크인으로 서로 글쓰기 목표와 진도 체크를 하고 4번 항목으로 이미 쓴 내용에 대한 피드백을 주고받았다. 두 명뿐이기도 하고 같은 프로젝트를 하는 팀이라 서로의 주제에 대해서도 좀 더 자세히 관심이 있는 편이기에 체크인과 피드백을 좀 길게 진행했다. 체크인은 아예 논문 개요를 바탕으로 논문의 논점과 전반적인 흐름 소개를 시작으로 서로의 논문 내용을 이해하는데 공을 들였고 앞으로 언제 뭐를 쓸지 점검도 했다.


피드백 시간엔 여태까지 쓴 논문 초안을 서로 바꿔서 다 읽고 피드백을 주고받았는데 그것만 해도 한 시간은 걸린 것 같다. 내 논문에 대해서 나와 교수님이 아닌 다른 사람의 피드백은 처음 받아봤는데, 내용에 대해선 우리보다 덜 익숙하지만, 오히려 우리가 당연하다고 생각하고 대충 넘어간 부분에 대해서 세세하게 지적해 주기도 하고 흐름이나 맥락에서 이해하기 어려운 부분에 대한 피드백이 많아서 도움이 되었다. 무엇보다 지도교수에게는 "잘 쓴 상태"일 때만 보여주고 싶은 마음이 있는데, 동료에게는 글이나 아이디어가 어설픈 상태임에도 "여태 그것밖에 못했냐" 혹은 "내용이 왜 이러냐"하는 평가에 상처 받을 걱정 없이 공유할 수 있어서 더 빨리 유익한 피드백을 얻을 수 있어서 정말 좋았다. 덕분에 글 자체도 더 매끄러워지고, 이 논문을 읽었으면 하는 다양한 분야의 독자의 시각을 더 잘 알게 되었다. 아쉽게도 모임을 한 번 하고 그다음 주는 그 친구가 바쁘고, 그다음 주부턴 연구소 자체 휴가가 시작되어서 이 모임은 휴가 이후로 미뤄지게 되었다.


그렇기에 당장 (7월 말) 글을 마무리해야 하는 나로서는 같이 글을 쓸 모임도 더 구하고, 또 더 다양한 사람들로부터 피드백도 받고 싶었다. 그래서 책 소개와 함께, 이런 모임을 하고 싶다고 환경/기후변화 관련 미래 시나리오 연구자들이 모인 슬랙 채널과 서머스쿨 참가자들에게 홍보를 했는데 관심을 보인 사람들은 좀 있었으나 당장 시작하고 싶다는 사람보다는 휴가 기간이 지나고 9-10월부터 시작하고 싶다는 사람들이 많았다. 그래도 지금부터 가능하다고 한 서너 명의 사람들이 있어서 당장 7월 말부터 온라인 모임을 시작을 했는데.. 당일에 두 명이 안 온 것이다!! 다행히도, 이 모임은 사실 나 혼자만 아니면 둘이든 셋이든 충분히 가능하더라. 밥터디나 출첵 모임처럼, 둘 뿐이어도 서로 감시(??)하고 인증만 하면 되는 거니까. 그리고 처음에 다른 사람들이 올까, 하고 기다리면서 서로 연구주제와 앞으로의 간단한 글쓰기 목표에 대해 수다시간을 가졌는데 그것도 흥미로웠다. 결국엔 둘이 화상통화를 켜놓고 30분만 일단 아무 말이나 써보자, 글의 퀄리티는 신경 쓰지 말고 그냥 내가 정리한 내용을 제삼자에게 주절주절 말하는 것처럼, 하고 쓰니 생각보다 술술 글이 써졌다. 그래서 결국 30분 더 써서 1시간을 쓰니 몇 달째 못 쓰던 글을 하루에 4-5 문단이나 썼다는 이야기.


그리고 책이 너무 좋길래 캐나다에서 석사를 하는 친구에게도 열심히 책 홍보를 했다. 친구는 전공이 영어교육이라 나와는 분야가 완전히 달라서 글쓰기 모임을 같이 할 수 있을 거라고 계획하고 홍보한 건 아니었는데 얘기를 하다 보니 자연스레 온라인 글쓰기 일정을 잡게 되었다. 일단 모여서 같이 글을 쓰기 시작하니 역시 30분만 써볼까로 시작해도 결국 1시간은 꽤 즐겁게 쓸 수 있었다. 그리고 친구와는 서로 글을 교환해서 피드백도 주고받았는데, 친구의 글은 영어 표현이 좀 어렵다는 점을 제외하면 굉장히 흥미로웠고, 내 주제도 다행히 친구에게 그렇게 지루하지 않은 내용이었나 보다. 게다가 친구가 연구실 동료보다도 더 꼼꼼하게 읽어주어서 글쓰기와 체크인과 피드백까지 다 알차게 받을 수 있는 완벽한 글쓰기 모임이 탄생되었다. 이 친구와는 이후로 벌써 5주째 매주 적어도 한 번은 꼭 만나고 지난주는 두 번, 이번 주는 심지어 네 번이나 만나서 글을 썼다. 사실 이들 글쓰기 모임의 도움으로 8월 초에 뭐가 됐든 일단 1차 초안을 교수님에게 넘겼다. 그다음 주에는 보낸 초안을 좀 더 다듬으려고 시도했으나 휴가 중이기도 하고, 일단 한 번 마무리를 했다고 생각하니 손이 잘 안 가서 조금 읽고 조금 수정하는 정도에 그쳤고, 휴가 3주 차이자 마지막 주인 이번 주에는 아예 논문 글을 쓰려는 시도도 안 하고 그 시간에 브런치 글을 썼다. 그리하여 4개월 만에 브런치 글을 쓰기 시작하여 한 주에 네 편이나 올리게 되니, 글쓰기 모임은 진짜 어떤 형태의 글쓰기에든 크나큰 도움이 된다고, 강력 추천하고 싶다.  


글쓰기 모임만 있으면 되나?

그나저나 일단 모임을 하면 죽이 되든 밥이 되든 조금씩 글이 써지기는 하는데, 늘 술술 써지는 건 아니었다. 잘 써질 때도 있고, 안 써질 때도 있고.. 그래서 이 책은 글쓰기에 대한 저항감을 줄이는데 큰 도움이 되는 내용들도 꽤 많이 소개하고 있다. 글쓰기 모임이란 결국, 같이 모여서 글쓰기의 어려움과 팁을 나누고 서로의 몸과 마음을 돌보는 판을 마련해 주는 자리인 것이다.


저자는 책에서 다양한 글쓰기 팁을 소개하는데 한 인터뷰에서 Top 3 글쓰기 조언으로 아래 세 가지를 꼽았다.  (1) 글쓰기 모임에 참여하기 (2) 조금씩 자주 쓰기 (3) 글쓰기/일은 채굴(mining)이 아니라 텃밭 가꾸기(gardening)에 가깝다는 것을 인지하기. 그에 더해 나는 하나를 더 추가하고 싶고 이게 나에게는 가장 도움이 된 조언이었다는 생각도 든다. 바로 (4) 글의 질에 대한 기대를 낮추기. 특히 초안의 경우 엉망인 게 당연한 거다!


사실 이 내용들을 이번 글에서 다룰 수 있을 줄 알았는데.. 글쓰기 모임에 대한 소개가 생각보다 길어져서 다음 글로 나눠서 자세히 소개해야 할 것 같다. 토마토 이야기는 다음 글로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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