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르쳐주지는 않고 무조건 잘 쓰라고 하다니. 책의 도움이라도 받아보자.
8월 초에는 연구소가 2주간 문을 닫는다. 그때 모두가 휴가를 가니까 그전에 첫 번째 논문의 1차 (혹은 0차) 초안을 지도교수에게 넘기고 가기로 했었다. 내가 넘기고 가면 휴가 중에 읽으시겠다나. 다행히 7월 중순 즈음엔 아주 맘에 쏙 차는 정도는 아니지만, 어찌어찌 뭔가를 쓸 수 있을 정도의 내용을 모았기에 (다이어그램과 표를 만들었고 분석한 내용의 목록도 일단 완성) 글만 쓰면 되는 상황! 글을 쓸 내용이 있고 글을 쓸 시간이 있으니 당연히 글이 써질 줄 알았는데.. 전혀 그렇지 않았다. 사실 이미 몇 달 전부터 연구를 진행하면서 동시에 글을 써 나가려고 했지만 잘 안 되길래 내용이 정리가 덜 되어서 그런가 보다 했다. 이번 봄에 방법론 부분을 쓸 때도 리뷰 대상 연구를 요약 소개하는 새로울 것이 없는 내용인데도 글을 시작하는 게 잘 안되어서 고생을 좀 했는데 이번에는 이미 있는 내용을 요약하는 게 아니라 내가 연구(?) 한 새로운 내용을 쓰는 거라서 그런지 그때보다 더 어려웠다. 블로그나 브런치 글들도 쓰는 게, 특히 쓰기 시작하는 게 어렵지만, 그래도 결국은 의식의 흐름대로 쓰면 뭐라도 되고, 잘 써야 된다는 압박이 좀 덜 하니까 조금 더 쉬운 편이지만, 그마저도 쓴 기간보다 쉰 기간들이 늘 기니까 논문은 더 어려운 게 당연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건 꼭 써야만 하는 글인걸!
그렇게 미적미적 거리며 한 자도 못 쓰고 웹툰 다 보고 인스타는 다행히 지워버려서 안 보고, 뒹굴거리다 심심해서 할 수 없이 트위터에나 들어갔더니 (나의 트위터는 거의 기후변화 연구자들만 팔로잉하고 있어서 일 하는 것 같기에 자주 안 들어가지만 들어가면 또 삼매경에 빠질 수 있긴 하다), 나처럼 글 쓰기 어렵다고 하소연하는 이의 트윗이 있었다. 공감하며 댓글들을 읽다 보니 The Writing Workshop: Write More, Write Better, Be Happy in Academia(Sarnecka, 2019)라는 책 추천이 있었다. 제목이 너무 식상하게 시작되어서 지나칠 뻔했으나 “학계에서 행복하기”라는 마지막 부분에 끌려 리뷰들을 좀 읽어보고 정신을 차려보니 이미 전자책을 구매한 후였다. 조금만 검색해보면 저자가 본인 사이트에 PDF본을 무료로 공개한 걸 알았을 텐데 조금 아쉽지만, 이 책의 첫 챕터를 읽고 난 것만으로도 글쓰기에 대한 저항감이 엄청나게 줄어들며 바로 그날부터, 몇 달 동안 쓰지 못하고 있던 글이 드디어 써지기 시작했다. 물론 그 뒤에도 글이 마냥 술술 써진 건 아니지만 책에서 소개한 대로 글쓰기 모임을 만들면서 더 꾸준히 글을 쓸 수 있게 되었고 글을 쓰는 게 어떤 느낌인지, 어떤 식으로 가능한지 조금씩 감을 잡게 되었다.
그럼 이 책의 첫 챕터에서 어떤 마법과 같은 얘기를 하는가 하면.. 일단 수십 년 논문을 써 온 연구자들과 교수들도 논문 쓰기를 어려워한다는 것. 그리고 대학원생부터 교수까지 연구자들의 실적은 논문이나 제안서 등 대부분 글의 형태로 된 결과물로 평가받는데 비해 (특히 박사과정생의 경우 100%) 대학원과 연구실에서는 방법론과 이론을 가르치는 것은 중요하게 생각해도 글쓰기 자체를 잘 가르쳐주는 경우는 거의 없다는 것. 이렇듯 글쓰기가 어렵다는 것도, 어떻게 글을 써야 하는지도 알려주지 않으면서 무조건 논문을 써서 평가받아야 한다고 하니 대학원생들은 자연스레 글쓰기는 쉬운 건가 보다, 혹은 어떻게 써야 하는지 저절로 알게 되어야 하나보다 하고 생각하게 된다고 한다. 하지만 뭐든 배우지도 못하고 잘하기는 쉽지 않으니 결국 학생들은 필연적으로 글이 안 써지는 어려움을 겪게 되며 이런 어려움이 당연하다는 생각보다는 본인이 예외적으로 부족한 경우라 생각하게 된다. 선배들이나 교수들도 글 쓰는 걸 어려워한다고는 상상도 하지 못하고... 결국 글쓰기를 제대로 가르쳐 주지는 않고 잘 쓰라고만 하는 이 상황에서 많은 대학원생들은 불안감과 우울증에 시달린다고 한다.
겨우 이 정도 내용만 읽었을 뿐인데 아, 그래 나만 박사과정이나 논문 글쓰기랑 특별히 잘 안 맞아서 그런 게 아니구나, 안 가르쳐 주고 잘 쓰기를 기대하는 게 더 이상한 거구나! 하고 굉장히 이해받고 공감받고 위로받는 느낌이었다. 그러하니 글을 쓰기 어려운 것은 당연하고, 처음에 쓴 글부터 잘 쓰기를 기대하는 것이 오히려 글 쓰기를 방해할 뿐이며, 처음 쓰는 글은 엉망인 것도 당연하니 일단 그거라도 쓰고 수정해 나가는 게 유일한 방법인 거구나, 하는 걸 알게 되니 글을 쓰기 시작할 수 있었다. 왜 아무도 이런 얘기를 해 주지 않고 대학원생이라면 알아서 글을 잘 쓰기를 기대하는 걸까.
이 책은 글쓰기의 기술도 다루지만 이는 뒷부분에서야 나오고, 앞부분은 어떻게 하면 정신적 육체적 건강과 행복과 인생을 챙겨가며 글을 쓸 수 있을지에 대한 얘기로 시작한다. 대학원 생활은 꽤나 고립된 상태에서 불확실한 과제를 수행하며 성과를 내야 하는 경우가 많은데 이때 결과가 잘 안 나오면 많은 이들이 스스로를 비난하고 자책하는 게 보통이다. 하지만 이는 단기적으로는 효과가 있는 것처럼 보일지 몰라도 장기적으로는 오히려 생산성을 저해하고 육체적 정신적 건강에도 좋지 않다. 그렇기에 좋은 성과를 내기 위해서도 가장 중요한 것은 혼자 끙끙대지 않아도 되도록, 서로를 지지하고 응원할 수 있는 글쓰기 모임이자 커뮤니티를 만드는 것이라고 한다. 캘리포니아 주립대학 (UC Irvine) 행동심리학과 교수인 저자는 수년간 매년 정식 글쓰기 세미나를 운영하고 있는데 이 모임은 글쓰기뿐만 아니라 서로 정신적 육체적 건강을 챙겨주고, 시간을 어떻게 관리할지에 대해서도 다루며, 매 학기 함께 글쓰기 계획과 장단기 연구 계획을 세우고 주기적으로 업데이트를 한다고 한다. 그리고 저자는 꼭 학점을 주는 공식 수업의 형태가 아니라도 누구나 자발적으로 글쓰기 모임을 만들 수 있고 이것이 대학원 생활의 필수 불가결한 요소라며 글쓰기 모임을 만들기 위한 가이드를 제시하고 있다.
사실 나는 박사과정이 정신적으로 크게 힘들 거라는 생각은 하지 않고 들어왔다. 많은 사람들이 정신적 육체적으로 엄청 힘들다고 이야기를 하기도 하고 이를 풍자한 국내외의 대학원생 유머도 많지만 독일에서 살 때 주변에서 박사과정을 하는 두세 명의 친구들은 꽤 만족스러운 생활을 하는 것 같았다. 그래서 한국이나 영미권에서와 달리 유럽에서는 박사 생활하기가 조금 수월한가 하고 안심하고 대학원에 지원한 점도 있다. 확실히 한국과 영미권과는 시스템이 달라서, 많지는 않지만 월급이나 장학금을 받고 (덴마크 네덜란드 등 일부 나라는 심지어 일반 근로자와 비슷한 수준이라 꽤 많이 받지만 독일이나 프랑스는 일반 근로자의 절반 수준) 무엇보다 교수가 학생들을 사적으로 부려먹는 일이 없다는 점은 도움이 되긴 하는 것 같다. 그래도 어디에서나 통용되는 박사과정의 힘든 점이라면 일단 ‘정해진 일’이 아닌 ‘새로운 연구’를 해야 된다는 압박과 무엇을 해야 하는지, 할 수 있는지에 대한 불확실성이 아닐까. 게다가 고용이 단기적으로만 보장된 계약직이니 현재의 수입과 앞으로의 커리어에 대한 불안함 등 다양한 요인이 있을 것이다. 그리고 학계 전반적으로 큰 문제는 박사과정생의 숫자에 비해 학계에서 졸업 후 얻을 수 있는 직장의 수는 터무니없이 적으며 그마저도 정년이 보장되는 정규직은 더 적어서 거의 바늘구멍에 낙타가 들어가는 수준인데 이 모든 과정에서 끝없는 경쟁과 평가가 요구된다는 것이다.
하지만 대학원생이 당면한 가장 큰 어려움은, 뭘 구체적으로 가르쳐주지도 않고 알아서 잘하라고 하면서 가장 기본적인 글쓰기나 커리어 개발이나 정서적 지원 등 서포트 시스템도 제대로 갖춰지지 않은 것이 아닐까 싶다. 많은 경우 대학원생의 서포트는 업무적으로나 정서적으로나 전적으로 지도교수의 역량에 달려 있는데 그게 완전히 복불복이라 대학원생의 삶을 서포트하기는커녕 갉아먹는 교수들도 꽤 많이 있다. 우리 지도교수와 연구실 동료들은 꽤 좋은 사람들이라 정서적으로 내 삶을 갉아먹는 사람들은 없는 것 같다. 하지만 우리 대학원에는 글쓰기 세미나도 없고 (Zotero 사용 수업이랑 이력서 쓰기 수업은 있다), 커리어 관련해서는 뭔가 대충 해야 되어서 있는 것 같은 수업만 몇 개 있는데 졸업 때까지 몇 시간만 들으면 되는 수준이다. 그리고 지도교수도 그런 것에는 큰 관심(과 역량)이 없어서 서포트가 부족하다고 느껴지는 부분도 있다. 글쓰기를 가르쳐주고 정서적으로 학생들을 서포트하는 게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 아마도 대다수의 지도교수들처럼 잘 모르고 있는 게 아닐까. 사실 대다수의 교수들도 글 쓰기를 어려워하기도 하고, 본인은 잘 쓴다고 해도 그냥 경험이 쌓여서 직관적으로 쓰다 보니 그렇게 된 경우가 많아서 어떻게 해야 잘 쓸 수 있는지를 체계적으로 다른 이에게 가르치지는 못 하는 경우가 많다고 한다.
책에서 소개하길 영국 가디언지가 2014년 2561명의 연구자들을 대상으로 진행한 조사에서 87%의 박사과정생들이 불안증과 우울증을 겪었다고 보고했으며 56%는 이런 문제를 연구실 사람들에게 알리지 않았다고 한다(Thomas, 2014). 캘리포니아 주립대(UC 버클리)에서 790명의 박사과정생을 대상으로 한 조사에서는 엄격한 임상적 기준에서 47%의 학생들이 우울증의 조건을 만족시켰다고 한다(UC Berkeley Graduate Assembly, 2014). 이렇듯 학계 종사자들은 정신건강적으로 큰 위험에 노출되어 있으며 박사과정생들과 박사 후 연구원들이 이에 가장 취약하다고 한다. 그리고 이런 불안증과 우울증은 개개인의 건강 혹은 정신력의 문제가 아닌 공공보건의 문제이며, 이는 학계가 사람들을 다루는 방식과 커리어를 발전시키는 방식에 기인하는 시스템적 문제라고 지적한다.
한 사람이 천식 증세를 보인다면 그 사람만 병원에 가면 되지만, 40%의 인구가 천식 증세가 있고 80-90%의 사람들이 숨 쉬는데 어려움을 겪는다면 개개인이 병원에 가서 해결될 문제가 아니라 공기에 문제가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학계를 사람이 살만한 곳(fit for human habitation)으로 만들 수 있을까? 아카데믹 글쓰기와 글쓰기 모임은 어떻게 이에 대한 해결책이 될 수 있을까?
저자가 제안하는 글쓰기 모임과 글쓰기의 자세에 대한 자세한 팁들은 이어지는 글들에서 더 자세히 다루도록 하겠다.
우리 연구소는 여름에도 2주간 문을 닫고 연말연초에도 2주간 문을 닫는다. 프랑스에 살아서 (혹은 프랑스에서 박사과정을 해서) 좋은 점 탑 3에 들어가는 의무 휴가제도. 연말연초에는 사기업이나 공공기관이나 거의 다 같은 시기 2주간 (크리스마스가 있는 주의 초부터 새해가 있는 주의 말까지) 노는 것 같지만 여름의 의무 휴가기간은 주로 대학이나 공공 연구소에 많이 있는 듯하다. 한국도 대기업 공장들이 (주로 노조가 센 회사) 여름과 겨울에 일주일 정도 문을 닫는 경우가 있는 것 같은데 그거랑 비슷하다. 프랑스는 바캉스의 나라답게 다른 유럽 국가에 비해서도 휴가일수가 꽤 많은데 공공 부분은 월급이 꽤 적은 대신에 휴가가 조금 더 길다. 우리 연구소의 경우 채용 주체에 따라 달라서 일 년에 45일에서 51일 사이 (다른 유럽 나라들은 25-30일 정도인 듯). 사기업에 다니는 지인의 얘기를 들어보니 거기는 의무휴가 기간은 없고 휴가일수가 약간 적긴 해도 거의 40여 일에 육박한다고 한다.
아무튼 여름과 겨울 의무 휴가 기간에 차감되는 걸 제해도 25일 이상 남으니 여름에 우리 연구소 사람들은 많이들 앞이나 뒤에 한 주 더 붙여서 3주 휴가를 간다. 나도 원래는 4주간 한국에 갈 예정이었는데.. 비행기표도 취소되고 새로 표를 산다고 해도 언제든 또 취소될 수 있는 데다 잘 도착해도 한국에서 2주 격리도 해야 해서 이번 여름 한국행은 포기했다.
올해는 1월에 5일 (연말연초 휴가 포함), 여름휴가에 15일을 쓰고 5월에 코로나 때문에 무조건 5일을 쓰라고 해서 집에 갇혀서 5일 휴가를 썼다. 그 5일 너무 아까워… 아니 뭐하러 꼭 그때 집에 갇혀서 썼어야 하는 거야 나는 올해 휴가일수 꼭 다 소진할 거라서 돈으로 달라고 안 했을 텐데. 그래서 잔여일 수는 20일. 아꼈다가 겨울에 한국 가야지.
Sarnecka, B. W. (2019). The Writing Workshop: Write More, Write Better, Be Happier in Academia.
무료 공개 링크 (전자책만) https://osf.io/tzaeh/
아마존 링크 https://www.amazon.com/Writing-Workshop-Better-Happier-Academia/dp/1733484604
Thomas, K. (2014, May 8). We don’t want anyone to know, say depressed academics. The Guardian. Retrieved from
http://www.theguardian.com/higher-education-network/blog/2014/may/08/academics-mental-health-suffering-silence-guardian-survey
UC Berkeley Graduate Assembly. (2014). Graduate Student Happiness & WellBeing Report. Retrieved from http://ga.berkeley.edu/wp-content/uploads/2015/04/wellbeingreport_2014.pdf