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토마토다. 나에겐 지금 어떤 보살핌이 필요할까?
The Writing Workshop: Write More, Write Better, Be Happy in Academia 책의 내용과 이를 참고로 한 개인적 경험을 바탕으로 한 글입니다. 아래 글에서 이어집니다.
글쓰기 모임을 시작하긴 했지만, 그래도 모임을 하지 않을 때에는 글이 잘 안 써지는 경우가 잘 써지는 경우보다 훨씬 많다. 초기에는 정말 모임을 할 때만 글을 쓰기도 했다. 심지어 얼마 지나니 모임을 해도 멍하니 스크린을 보고 있게 되는 경우도 종종 생겼다. 그래서 하루 종일, 혹은 일주일 내내 글을 안 쓰고 나면 마음이 조급해지고, 앞서 20여 년간 하려던 일을 하지 못했을 때 그래 왔던 대로 자책을 했다. “아 뭐부터 시작해야 될지 모르겠어. 또 미뤘어. 한 글자도 못 쓰겠어. 하기 싫다.. 또 일은 안 하고 인터넷 서핑만 몇 시간 해버렸네. 이걸 언제 다 하지. 왜 벌써 이 시간이지?” 그래도 이 책을 읽고 달라진 점이 있다면 자책을 한도 끝도 없이 하거나 "아 됐어 할 수 없지"하고 묻어버리려 하기보단, 조급해하거나 자책하는 나 자신을 발견하면 일단 멈추고 "나는 토마토다”라는 생각을 해본다. 토마토라니? 하필 왜 토마토인가? 그리고 글쓰기 팁 이야기를 한다면서 웬 토마토?
아마 나뿐만 아니라 많은 사람들이 일이든 공부든 운동이든 인간관계든 원했던 기간 안에 원했던 결과를 내지 못하면 “나는 바보 멍청이 게으름뱅이! 미쳤어! 왜 그랬어, 왜 제대로 열심히 하지 않았어”라고 스스로를 탓하고 혼내는 경우가 많을 것이다. 글쓰기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글을 쓰지 않거나, 아이디어가 떠오르지 않거나, 써 놓은 글이 엉망인 경우 자책부터 하게 된다. 그래야 다음부터 마음을 잡고 제대로 하게 될 것 같고. 괜찮아~ 하면 또 마냥 늘어져서 발전하지 못하지 않을까 걱정도 되고. The Writing Workshop의 저자인 Sarnecka는 이는 우리가 글쓰기를 ‘채굴’과 비슷하다고 여겨서 일어나는 일이라고 한다. 우리는 허리가 빠개질 것 같은 힘든 과정을 통해야만 한정된 자원인 아이디어와 글쓰기를 ‘발굴’할 수 있으며 그 과정은 지치고 힘든 게 당연하다고 여긴다는 것이다. 그렇기에 결과물이 만족스럽지 못하면 더 힘들게 더 깊게 파고드는 것으로 스스로를 탓하고 벌주게 된다.
하지만 글쓰기가 ‘채굴’이 아니라 ‘텃밭 가꾸기’라면 어떨까? 어느 날 텃밭의 토마토가 열매를 맺지 않는다면, “토마토 너는 왜 이렇게 약하고 게을러, 왜 열매를 맺지도 않고 왜 열심히 살지 않아?!”, 하고 화내고 혼내는 게 도움이 될까? 아마 그렇게 토마토를 탓하기부터 하는 사람들은 많지 않을 것이다. 왜 토마토 하나 돌보지 못했는지 자책할 수는 있지만... 토마토 자체에 대해서는, 혹여나 물이나 햇빛이나 영양분이 너무 적거나 많았던 게 아닐까, 아직 시기가 이른 걸까 하는 고민을 하고 더 잘 돌보려는 노력을 기울이게 된다. 그리고 무엇보다, 아무리 내가 “열심히” 일하고, 당장 물과 햇빛을 조정해 준다고 해도 날씨까지 어찌할 수는 없고, 노력의 결과가 당장 나타나지도, 열매가 당장 열리지도 않는다는 것을 받아들이기는 어렵지 않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혹은 그렇기 때문에 더, 토마토 열매를 얻기 위해 내가 할 수 있고 해야 할 일은 매일 꾸준히 토마토를 돌보는 일뿐이라는 것도.
저자의 글쓰기 모임에서 글쓰기를 바라보는 방식도 마찬가지다. 글쓰기가 텃밭 가꾸기와 마찬가지라면, 글이 잘 안 써질 때 “바보 멍청이 게으름뱅이”라고 자책하거나 “강해져야지! 더 열심히 해야지!”라고 마음먹기보다는, 지금 나에게 어려운 점은 뭘까, 내가 필요로 하는 건 뭘까, 나에게 있어 물과 햇빛과 바람이란 뭘까, 나를 어떻게 더 잘 돌볼 수 있을까 하는 고민을 해 보면 어떨까. 저자는 시간이 지날수록 글쓰기를 ‘채굴’이 아닌 ‘텃밭 가꾸기’ 방식으로 바라본 사람들이 더 생산적이고, 당연하게도 더 건강하고 행복해짐을 확인할 수 있었다고 한다.
이 부분을 읽고 너무 좋아서 여기저기 친구들에게 퍼 날랐다. 글쓰기만이 아니라 인생 자체가 텃밭 가꾸기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그 이후에 꼭 글쓰기가 아니라 뭐든지 조급해지거나 스스로를 탓하고 싶은 순간이 생길 때마다, 아 나는 토마토다, 이 토마토는 지금 뭐가 필요하지?라고 되뇌어 본다. 텃밭에서 비실비실 말라가는 토마토가 된 모습을 상상해 보기도 하고. 게으름을 피웠다며 자책하는 친구에게도, 토마토야 뭐가 필요하니 하고 종종 물어봤더니 내가 글이 안 써진다고, 운동을 안 한다고 징징거리면 너의 토마토 인생은 어떠니 하고 되물어보는 친구도 생겼다. 자책과 자괴감의 굴레에 빠져있을 때 그런 얘기를 들으면 귀여워서 재밌기도 하고 인간들도 정말 토마토처럼 뭐가 필요한지 잘 들여다보고 보듬어주고 기다려줘야 할 대상이라는 생각에 따뜻함이 느껴지곤 한다.
사실 꼭 토마토일 필요는 없는데, 저자가 글에서 든 예시가 토마토였을 뿐. 하지만 “나는 토마토다”는 덕분에 나와 친구들 사이에 보살핌의 주문과 같이 되어버렸다.
그다음 나에게 가장 도움이 되었던 조언은 글의 질을 낮추라는 것! 사실 토마토는 인생을 대하는 태도에 대한 전반적인 조언이라면, 글을 쓰기 시작하는 것 자체에는 이 조언이 가장 큰 도움이 되었던 것 같기도 하다. 사실 글이 잘 안 써지는 건, “잘 쓰려고” 하기 때문이다. 근데 정말 그냥 아무 말이나 쓰면 된다. 그냥 머릿속에 떠오르는 대로, 의식의 흐름대로, 내가 버벅거려서 무슨 말인지 알아듣기 어려워도 귀찮아하지 않을 가까운 친구에게 설명한다고 생각하고. 일단 아무 말이나 엉망으로 쓰고 나면, 그다음에 차근차근 수정하는 건 훨씬 쉽다. 정말, 훨씬 훨씬 쉽다. 내 생각이, 눈 앞에 시각적으로 나타나 있으니까. 얼마나 똥인지 된장인지도 알아보기 쉽고. 머릿속에서, 정말 끔찍하게 별로야..라고 형체를 알 수 없는 것을 걱정하는 것보단, 눈에 보이는 똥 같은 글이 훨씬 덜 무서운 것 같다.
그리고 또 사람들이 착각하는 게 생각을 다 정리하고 나서 글을 써야 된다고 생각하는데, 그게 아니라 글을 쓰는 과정 자체가 “생각”이라고, 글로 쓰면서 생각이 정리되는 것이라고 한 것도 도움이 되었다. 정말, 개요를 다 잡아서 써도, 글을 쓰고 채워 나가다 보면 내용이 추가되기도 하고, 이건 아닌데 싶어지기도 해서 방향이 바뀌기도 하더라. 그러니까 완성된 글을 써야 된다고 걱정하기보단, 생각의 과정이라고, 브레인스토밍이라고 생각하고 글을 쓰라는 것.
그리고 이와 관련하여 이 책에서 정말 인상적이었던 내용은.. 좋은 결과물을 내는 성공적인 사람들과 평균적인 사람들이 좋은 아이디어나 글을 낼 확률은 동일하다는 것 (동일 확률의 법칙 Equal-Odds Rule). 즉 성공적인 사람들의 결과물로 좋은 글과 좋은 아이디어가 많은 것은, 내는 아이디어와 쓰는 글이 다 좋아서가 아니라, 그만큼 우리 눈에는 보이지 않는 더 많은 별로인 아이디어와 글도 많이 생산해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예를 들자면 성공적인 사람들은 1000개의 아이디어와 글을 생산해서 그중 100이 좋고, 평범한 사람들은 100을 생산해서 10이 좋으니, 마치 10배 더 확률이 높은 것처럼 보이지만 성공적인 사람들은 900개의 별로인 글과 아이디어를 더 생산해 낸 것이다. 그러니 별로인 아이디어를 내고, 별로인 글을 쓰기를 겁내 하지 말자. 별로인 글들이 많이 쌓여야 개중에 좋은 글과 아이디어가 나올 테니. 특히 초안을 잘 써야 된다고, 글의 퀄리티가 좋아야 한다는 걱정에서 벗어나, 아무렇게나 써도 되며 일단 쓰고 고치면 된다는 점이 글쓰기의 저항감을 크게 줄여주었다.
대학원생이나 교수나 학계에 종사하는 사람들은 다른 직장을 가진 사람들에 비해 유연한 스케줄을 가질 수 있다는 게 장점이라고 여겨진다. 하지만 그게 결코 일하는 시간이 적다는 건 아니고, 오히려 아무 때나 아무데서나, 대신 유연하게 주 80시간을 일하면 된다 라는 우스갯소리가 있다고 한다. 글쓰기를 잘하는 방법은, 다른 많은 기술들을 잘하게 되는 방법과 마찬가지로, 많이 해 보는 것인데, 일은 많고 시간은 없다면, 어떻게 하면 글을 더 많이 쓸 수 있게 될까?
이를 위해서 저자는 글을 조금씩 자주 쓰는 게 중요하다는 점을 강조한다. 이 방법이 한 번에 글을 몰아서 쓰는 것보다 더 효과적이기도 하고, 수업이다 미팅이다 채점이다 서류 작업이다 육아다 해서 바쁜 대학원생과 연구원, 교수들의 스케줄에서 길게 글 쓸 시간을 내는 것 자체가 어려운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사실 수업을 듣지도 가르치지도 않고 돌볼 아이도 없어 주 1회 있는 미팅과 생각보다는 자주 있는 서류 작업 외에는 별 다른 방해요인 없이 마음만 먹으면 하루 종일 글만 쓸 수도 있는 나는 조금 덜 해당하긴 한다. 그래도 글을 쓰려고 앉으면 이메일부터 다 보고 답해야 할 것 같고, 학교에서 이래라저래라 하는 행정처리나, 심지어 세금 신고마저 더 하고 싶어 지게 마련이다.
많은 사람들은 글을 쓰려면 적어도 한 시간, 보통은 두세 시간 정도의 통 시간이 있어야만 글을 쓸 수 있다고 생각하는데, 그러면 그럴 시간이 없다 보니 계속 미루고 미루고 미루게 된다. 그런데 그게 아니라 5분, 15분의 자투리 시간에도 글을 쓸 수 있게 되면 수업이나 회의 앞뒤로 언제든지 조금씩 쓸 수 있고, 그렇게 한 문장, 한 문단씩 모이면 글이 된다. 논문이 사실 책을 쓰는 것도 아니고 그렇게 글자 수가 많을 필요도 없다. 분야마다 다르지만 내가 주로 읽는 논문들은 짧게는 4 페이지에서 20페이지 정도일 뿐이다. 하지만 글 쓰는 건 마지막에 하면 되니까, 하고 미루게 되기도 하고, 대학원생이던 교수던 다들 데이터는 모으고 참고문헌은 읽고 회의도 하고 하다가 몇 달 만에 논문을 붙잡게 되는 경우가 많다. 그렇게 오랜만에 글을 쓰면 또 전에 뭘 썼는지, 뭘 쓰려고 했는지 기억이 안 나서, 앞에 부분이나 개요를 읽는 데에만 적어도 한 시간이 들게 된다. 지금 이 글을 쓰는 데에도 정확히 한 시간을 앞의 글 두 개를 다시 읽고 수정하는데 보냈다. 그렇기에 5분 15분 동안에는 글을 쓸 수가 없다고 항변하는 사람들도 있는데 사실 매일 조금씩 쓴다면, 내용이 계속 기억이 나기 때문에 복기할 한 시간이 필요가 없는 것이다.
이는 사실 글쓰기 모임에 참여하기 다음으로 저자가 가장 강조하는 글쓰기 팁인데, 다른 업무가 많지 않은 나에게는 조금 덜 와 닿은 부분이 있어서 세 번째 팁으로 밀렸다. 하지만 글만 쓰면 되는 상황인데도 불구하고 글을 안 쓰는 날도 많은 나이기에, 하루에 5분, 15분만이라도 글을 쓰면 된다. 아무 말이나 써라.라는 조언은 꽤 글쓰기의 부담을 감소시키는데 도움이 되었다. 그 외에도 책에는 여러 주옥같은 조언들이 많지만, 이 정도가 가장 핵심적인 부분일 것 같고, 아직 뒷부분은 다 읽지 않아서 차근차근 읽으면서 또 흥미로운 내용이 있다면 공유해 보도록 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