뚤루즈 집순이의 연구소와 사람들 소개
이번에는 연구실과 연구실 사람들 구성을 소개해보려고 해요. 쓰다 보니 이번부터 반말로 바뀌어버렸는데.. 앞으로도 이렇게 갈 것 같아요!
내가 주 5일 출근하는 연구소 건물은 0층부터 4층까지 있고 (즉 5층짜리 건물) 내 자리는 2층에 있다. 독일에서도 그랬는데, 유럽에선 지면과 같은 높이인 층을 0층 또는 ‘길 층’이나 ‘땅 층’이라고 부르는 나라가 많다. 여기는 태어났을 때도 1살이 아니고 0살이니까, 그것과 일맥상통하기도 해서 논리적으로 왜 그런지는 알 수 있을 것 같다. 즉 지면에서 한 개 층을 올라가면 1층, 두 개 층을 올라가면 2층인 것. 그래서 나는 매일 아침 두 개 층을 걸어 올라가서, 2층, 한국식 3층에 있는 방에 자리를 잡는다.
연구소는 각 층마다 1-8명이 들어갈 수 있는 작은 방들이 많이 있다. 교수님이나 연구원들은 주로 두 명이서, 간혹 혼자서 방을 쓰고, 주로 박사과정생들인 학생들이나 박사 후 연구원(포닥)들은 4-8명이서 방을 쓰며, 4층의 행정 임직원들은 혼자서 방을 쓴다. 연구소에는 17개 팀이 있고 우리는 10번 팀인데 주제별로 팀을 나눈 거라 팀의 규모는 2명에서 수십 명까지 제각각이다. 우리 팀은 교수인 Professeur가 4명, Maître de conférences 4명, 연구자 Chercheure 1명, 테크니션과 엔지니어 및 행정업무 보는 분들이 4명 해서 총직원이 13명이며 이분들은 아마 거의 다 정규직인 듯하다.
나의 슈퍼바이저는, 보통 한국어로 지도교수라고 하니까 앞의 글들에서 교수님이라고 썼지만, 사실 교수가 아니고 연구만 하는 연구자(Chercheure)이며, Cambioscop이라는 이름의 5년짜리 프랑스 국책 프로젝트를 따서 그 연구 책임자(PI, Principal Investigator)로 이 연구소에 와 있다. 프랑스에선 정교수를 Professeur, 정교수 이전의 정규직 자리를 Maître de conférences라고 한다고 한다. 이는 영어로는 Lecturer, 강사이지만 연구실에 정기적으로 출근하고 연구도 하니 조교수나 부교수와 비슷한 듯하다. 프랑스의 대학, 연구소 그리고 학계의 채용 구조는 아직 2달 밖에 안 된 나에게 대단한 미스터리인데, 프랑스 대학에 수년 있는 사람들도, 프랑스 사람들도 잘 모르겠다고 하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개인적으로 궁금한 사안이니 자세한 설명은 위에 위키피디아 링크도 자세히 읽어보고 여기저기 물어보고 난 후, 내년에 시도해 보고 싶다. 위에 간단히 설명한 내용의 틀린 점이나 명쾌한 설명이 있으신 분은 꼭 알려주시길..
우리 팀의 나머지 인원 소개를 하자면 보통 3년 과정의 박사과정생이 11명, 1-2년 계약의 포닥이 2명 있으며 이 13명이 큰 방 2개를 나눠 쓰고 있다. 가끔 졸업논문을 쓰거나 인턴을 하는 학/석사 과정생이나, 다른 대학의 대학원생들이 짧게 몇 달 방문하는 경우에도 이 두 방 중 하나에 머문다. 근데 우리 팀만 그런가, 같은 팀으로 묶여있긴 하지만 같이 하는 건 거의 없고, 그냥 건물의 2층 서쪽 공간을 같이 쓰는 것뿐? 두 방 중 어디에 배정되느냐도 지도교수나 연구주제와는 무관하고 10번 팀에 속한 박사과정생과 포닥이라면 본인이 연구소에 출근하기 시작했을 때 비어있는 자리 중 원하는 곳을 선착순으로 선택할 수 있다. 포닥이야 “단기 계약 직원” 이니까 당연하지만 여긴 박사 과정도 학년이나 학기 시작할 때 다 같이 시작하는 게 아니라 각자가 받는 장학금이나 채용되는 프로젝트의 일정에 따라 아무 때나 시작할 수 있기 때문에, 한 번에 여러 명이 자리를 다투는 일은 잘 없는 것 같다.
연구소의 다른 학생들의 프로젝트가 어떻게 구성되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교수님과 1:1로 프로젝트 지도를 받는 경우도 있고, 큰 프로젝트에 소속되어 있는 경우도 있는 듯하다. 그리고 프랑스의 모든 박사과정생은 일정 이상의 펀딩(재정지원)이 있어야 하는데, 최저금액은 대학마다 다르다고 한다. 펀딩의 형태에 따라 계약 조건이나 금액이 다른데, 프로젝트에 채용이 되어 월급을 받는 경우도 있고, 산학연구를 해서 기업에서 돈을 주는 경우도 있고, 장학금을 받는 경우도 있다. 그렇기에 한국처럼 학기의 시작에 같이 입학하는 것이 아니라 돈을 주는 프로젝트나 장학금의 일정에 따라 아무 때나 시작하게 된다. 한 달에 받는 금액은, 장학금의 경우 900-1500 유로, 연구소에서 채용하는 경우에는 1400-1500유로, 기업에서 받는 경우 1800유로 정도라고 한다 (위 캠퍼스 프랑스 링크 참조). 하지만 장학금은 보통 세금을 안 떼고 연구소나 기업에서 월급을 받는 경우에는 세금을 떼어서… 실제 받는 금액은 비등비등할지도 모르겠다. 하여간 박사과정생들의 공식 소속이나 월급 주는 주체가 다 다르기도 해서 외국인인 경우 그 차이에 따라 받는 비자가 다르기도 하다. 예를 들어 프로젝트에 직접 고용된 나는 '월급’을 받고 ‘연구자’ 비자로 와 있는데 같은 프로젝트의 다른 박사과정생은 태국-프랑스 장학금을 받아서 ‘학생’ 비자로 와 있다. 그럼 서류 작업이나 신청하는 건강보험이나 기숙사 신청 자격 여부가 다 다르고.. 둘 다 장단점이 있다. 어차피 각 주제의 박사 포지션은 펀딩 옵션이 정해진 채로 공고가 나기에 원하는 주제를 고르는 것을 우선시한다면 내가 장학금을 받을지 월급을 받을지 딱히 선택할 수는 없다. 박사과정생의 펀딩 옵션은 유럽 국가별로도 매우 다른데, 이 부분은 다음에 자세하게 다뤄보기로!
그리하여 10번 팀의 다른 사람들과는 오며 가며 인사만 하는 내가 가장 많이 교류하고 ‘같이 일한다’라고 볼 수 있는 건, 나를 포함해 7명으로 이루어진 “Cambioscop 팀”으로 Cambioscop 프로젝트에 참여하는 사람들이다. 이 7명은 앞에서 언급한 슈퍼바이저이자 앞으로 글에 교수님이라고 쓸 (실제로는 그냥 Lorie라고 이름만 부른다) 프로젝트 연구 책임자 한 명과 프로젝트에 한발 걸쳐 있으며 내 두 번째 슈퍼바이저인 다른 교수님 한 명, 포닥 두 명, 나를 포함한 박사과정생 세 명이다. 그 외에 다른 학교에서 이 프로젝트에 일부 느슨하게 참여하는 3명의 다른 박사과정생이 있다. 신기하게도 이 팀의 프랑스인은 프로젝트에 한발 걸쳐있는 교수님 한 명뿐이고 연구 책임자인 교수님과 포닥 한 명이 캐나다 퀘벡 사람이며 나머지는 각각 인도, 중국, 태국, 한국 사람이다. 그래서 프랑스인과 퀘벡인의 모국어는 프랑스어지만 팀 내 공용어는 영어. 이전 글에서 소개한 이 영상에서 이 모든 사람들이 각자 맡은 연구 주제를 설명하는 모습을 볼 수 있다. 현재 자막은 영어와 프랑스어 중 선택할 수 있는데, 언젠가 한국어 자막 작업도 하려고 계획 중이다.
우리 팀 교수님은 젊기도 하고, 딱 한 개의 프로젝트만 맡고 있기도 하고, 이 프로젝트만 하는 인원이 적지만 딱 정해져 있어서, 약간 '스타트업’의 분위기 같다. 사실 내가 직접 경험해 보지 않았으니 대충 짐작하는 것이지만 스타트업 다니는 친구들을 보며 내가 생각해 본 스타트업의 특성은: 위계질서 없이 조직이 수평적이며, 조직원 간 소통이 격의 없고 활발하며, ‘수익이나 결과물을 내는 것’이 중요하긴 하지만 그것만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뭔가 가치 있는 미션을 공유하는 것이랄까. 물론 서양의 연구소는 어디든 한국보다야 훨씬 조직 구조가 수평적이겠지만 교수님이 바쁘고 지도학생이 많아서 거의 자주 못 보고 박사과정생이 포닥이나 다른 연구원들과만 교류하거나 아예 혼자 집에서 일하거나 하는 경우는 꽤 많은 것 같다. 우리 교수님은 바로 옆방에 있어서 언제든지 궁금한 게 있으면 물어볼 수 있고 물어보기를 바라며 프로젝트에 대해서 말고 일상에 대해서도 이야기하는 편이라 친한 지인 같다. 물론 나이 차이가 많이 안 나고 이름도 부르고 격의가 없다고 해도 아무래도 ‘상사’다 보니까 가끔 점심은 같이 먹어도 근무시간 이후에 같이 놀러 다니거나 하지는 않는다. 다른 포닥이나 박사 과정생들은 다들 외국인이고 이곳에 연고 없이 온 사람들이다 보니 같이 일 마치고 바에 가거나 주말에 어디 근교에 놀러 간다던가 같이 쇼핑 가거나, 같이 집에서 요리해 먹는다던가 하는 일도 종종 있어서 동료이자 친구가 되어가고 있다. 특히 요새 딱히 연구소 밖에서 친구를 만들어야겠다는 시도를 하지 않고 있다 보니 현재로는 나의 유일무이한 친구들인데 나름대로 재밌고 잘 맞아서 좋다. 물론 아주 찰떡같지는 않지만.. 그런 사람들이 어디 찾기 쉽겠나. 차차 맞춰나갈 수 있겠지?
서울에서 창립한 지 30여 년이 된 회사를 다니면서 스타트업에 다니는 친구들이 가장 신기했던 것은 회사에 임직원들이 공유하는 비전과 미션이 있고, 회사가 성장하면서 이것이 잘 지켜지지 않는 것 같다고 고민을 한다는 것! 아니 물론 내가 다니던 회사도 공식적으로 번드르르한 미션이 있지만, 그건 그냥 홍보용이고, 회사는 수익을 내서 오너와 주주들에게 배당금을 주기 위해 사업을 굴리고, 임원들과 일부 직원들은 성과와 승진을 위해 일을 하고, 보통의 직원들은 월급을 받고 적당한 자아실현을 위해 일하는 것.. 을 당연하게 받아들였다. 그런데 스타트업 다니는 친구들은, 회사마다 정도나 방향성은 다르지만, '더 좋은 세상을 만들기 위해서' 까지는 아니더라도, '우리 회사가 추구하는 가치'를 만들고 지켜나가기 위해 고민하고 있다는 것이 신선했다. 그런 면에서 지금의 우리 팀도, '새로운 것을 발견하고 연구 성과를 내고 학계에서 살아남자'라는 보편적인 목표 이외에도 현재 당면한 기후 위기의 심각성과, 이를 벗어나기 위해 우리 프로젝트의 연구가 기여해야 한다는 사명감을 조금 더 강하게 공유한다는 점이 스타트업과 비슷하다고 느껴진다. 물론 스타트업계와 마찬가지로 모든 구성원이 같은 정도로 비전을 공유하는 것은 아니고, 비전을 공유하더라도 이를 이루기 위해 구체적으로 어떻게 해야 하는지는 구체적인 대안이 있는 것 같았지만 없는 것 같기도 하고, 헤매면서 시행착오를 겪으며 성공한다는 보장이 없다는 것마저 비슷하다고나 할까..
물론 우리 팀은 실제 스타트업 기업이 아니고 대학 연구소에 소속되어 있는 팀이니까 실적이 부실하면 당장 회사가 없어질 수도 있다는 불안감은 없다. 하지만 교수님의 계약도 프로젝트 기한도 5년으로 정해져 있고, 포닥은 1-2년, 나는 3년 계약이기에 3-5년짜리 '초기 투자'를 받은 스타트업과 비슷한 상황이라는 생각이 든다. 교수님은 그 이후를 위해 프로젝트 제안서를 쓰며 다음 프로젝트와 '투자자'를 찾고 (사실 이건 정규직 교수님들도 다 하는 일이긴 하지만), 나도 팀원들도 그 안에 '투자자'와 '커뮤니티'가 만족할 만한 성과를 내야 그다음 프로젝트와 그다음 커리어에 도움이 되며, 교수님을 제외한 팀원들은 다들 1-3년 뒤에 다른 곳으로 옮겨갈 것이 확실하고, 교수님도 계속 있을 수 있을지 불확실하며, 프로젝트와 각자의 성과가 좋더라도 이후의 미래는 불확실하다는 점이 유사하지 않을까. 그리고 대다수의 사람들이 칼퇴를 하고 일 외의 생활을 여유롭게 누린다는 유럽이지만, 여기선 어차피 내 프로젝트, 어차피 내 성과인지라 원한다면 출근은 여유롭게 늦게 하더라도, 필요하면 밤늦게든 주말이든 일을 하는 분위기 또한 스타트업 같다고, 스타트업을 글과 풍월로만 들은 사람은 생각해 본다.
앞으로 1년 2년 3년 뒤에, 연구소와 우리 팀의 첫인상을 적은 이 글을 다시 보면 어떤 생각이 들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