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어떤 스타일의 연구, 어떤 스타일의 일을 좋아하는지
지금 생각하면 정말 너무나 당연한 얘기지만, 박사과정은 연구를 정말 정말 정말 좋아하고 사랑하는 사람이 하는 게 좋지 않을가 싶다!!!
왜 이런 당연한 것 같은 얘기를 하느냐고? 내가 안 그랬어서.. 하지만 나처럼 연구가 뭔지도 몰라서 사랑하는지 어떤지도 모른 채 시작했던, 연구를 적당히 좋아는 해도 사랑하지는 않지만 박사라는 학위가 필요하다고 여겨서 시작했던 어쨌든 연구를 너무너무 사랑하지 않아도 박사학위를 시작하고 끝내는 사람들은 계속해서 있을 것이다. 그렇다고 그 박사학위를 한 시간이 쓸모가 없다거나 가치가 덜하다거나 하는 것은 전혀 아니다! 그냥.. 그 부분에 있어서 좀 더 힘들 수도 있으니 각오를 하면 좋다는 정도?
사실 나는 연구가 뭔지도 잘 몰랐다. (충격!) 석사 때 연구 관련 긴 수업이 하나 있긴 했지만 딱히 어떤 방법론을 배우고 쓴 기억도 없고 그냥 조별 과제였다 싶다. 연구 중심 석사가 아니긴 했다. 유럽은 다들 석사를 하다 보니 ‘연구’를 중심으로 박사과정에 대비시키는 석사는 많지 않은 것 같다. 그래도 지나고 보니 동기 12명 중에 3명이 박사과정을 했네. 석사 동기들이 지금 뭐하고 사는지 써 보는 것도 재밌겠다.
당시 석사논문으로 질적 연구를 하던 친구들이 무슨 프로그램을 써야 하나 어떻게 써야 하나 어디서 배워야 하나 고민하던 이야기를 들었던 기억들이 어렴풋이 난다. 그나마 내가 석사논문에서 쓴 LCA (Life cycle assessment, 전과정평가)라는 방법론은 수업에서 개념이라도 배웠지만. 이조차도 프로그램을 쓰는 실습은 전혀 배우지 않았던 것! 석사 연구를 했던 연구소에서 프로그램 사용법을 가르쳐 줬는지, 아니면 그냥 알아서 배우라고 했는지 잘 기억나지 않지만 LCA는 범위를 잡고 데이터를 고르는 것 자체가 엄청 복잡한 일인데 별 고민 없이 엄청 단순하게 했다. 지금 생각하면 그게 독일 정부 프로젝트의 일부였는데.. 내가 낸 결과를 프로젝트 보고서에 그대로 썼으려나, 그렇다면 정말 문제인데 싶다.
지도 교수는 수업을 정말 너무 잘하던 분이었지만 너무 바빠서 석사 나부랭이 논문 지도는 전혀 안 하고 처음 계약서(?) 쓸 때만 한 번 봤다. 그래서 연구실을 같이 쓰던 연구원이 나의 슈퍼바이저나 다름없었다. 자료를 조사하고 프로그램을 돌리고 논문을 쓸 때 궁금한 걸 종종 물어보긴 했지만 비교할 대상을 뭐로 잡을지에 시간을 거의 다 쓰고 LCA 방법이나 해석에 대해서는 나의 사수도 거의 코멘트를 하지 않았다. 석사 논문을 다시 열어보면 어떤 방식으로 했는지 보이겠지만.. 두려워서 열어보지도 못하겠다.
아무튼 나는 박사과정을 그냥 ‘깊이 있게 공부해서 그 분야의 전문가가 되는 과정’이라고 생각했던 듯하다. 즉 연구가 뭔지 잘 모르니 연구에 대한 호불호도 없고, 교수가 되고 싶은 생각은 전혀 없고. 전문성을 쌓아 유럽에 자리를 잡아야지! 하고 특별히 뭐가 어렵고 힘들지 전혀 예상을 못 하고 시작했다. 어렵고 힘든 과정이라고 많이들 얘기하지만 주변의 친한 친구가 박사과정을 너무 쉽게 하는 듯해서 위기의식을 못 느꼈던 것도 있다.
독일에서 비건 플랫을 처음같이 만들고 오래 같이 살고 가장 잘 맞았던 플랫 메이트가 그때 당시 바이오인포마틱스(Bioinformatics) 박사과정을 하고 있었다. 그런데 전혀 박사과정의 어려움에 대한 토로도 없고 9-5 출퇴근에 중간중간 팀 스포츠도 열심히 참여하고 우리 집에서 하는 비건 모임이랑 제로 웨이스트 모임도 다 같이 기획하고 참여하고 일정에 따라 늦게 가는 날도 있고 아주 여유롭게 박사과정을 하는 것을 보고 그냥 월급이 적은 대신 학위를 주는 직장이랑 비슷한가 보다 하고 생각하게 되었다. 지나고 보면 나랑 살 때 그 친구도 1-2년 차여서 아주 힘든 시기는 아니었고, 이미 석사 연구를 했던 지도 교수와 계속해서 박사과정을 하는 거라 경험도 좀 있고 지도 교수랑 일하는 방식이 잘 맞아서 꽤나 예외적인 상황이었던 것이다! 박사 말기에는 그 친구도 나와 살 때만큼 여유롭지는 않았지만 그때는 더 이상 나와 같이 살지 않아서..
지금 다른 도시에 사는데도 정기적으로 찾아갈 정도로 엄청 친한 친구였는데도 박사과정 어떤지, 어떤 점을 주의해야 할지, 어떤 점들이 어려울 수 있는지 깊이 있게 물어볼 생각도 못 했다! 사실 박사과정 지원할 건데 어때 하고 대충 물어보기는 했는데, 그때는 그 친구는 지도교수가 학회 같은 거 얼마나 지원해 주는지 확실하게 물어보고 시작하라고 그 정도만 이야기해 주었다. 왜 그렇지? 내가 박사과정을 시작하고 나서야 우리는 심도 있는 이야기를 나눠봤다. 그때는 그 친구도 마무리를 하지 않은 상태라서 그랬나.
나는 지금 누가 박사과정 생각하고 있다고 하면 그 사람이 궁금한 게 없다고 해도 한두 시간 정도는 붙잡고 모든 얘기를 해 주고 싶어.. 박사과정이 잘 맞을지, 정말 꼭 하고 싶은지, 그렇다면 지도 교수와 주제와 나라와 학교를 고를 때 어떤 점을 고려해야 할지, 어떤 즐거운 점들과 어려운 점들을 예상할 수 있을지 등등. 그렇다고 모든 것을 대비할 수는 없고. 안 해도 좋을 것 같다고 해도 하고 싶은 사람들은 다 하게 되어 있다지만.
그렇다면 나는 박사과정을 통해 전문성을 쌓으면 어떤 직종에서 어떤 일을 하면서 자리를 잡고 싶었나? 그것도 잘 모르겠다.. 교수가 되고 싶은 생각이 없었던 것은 분명한데. 연구소, 회사, 비영리기구.. 다 상관 없다고 생각했나? 지속가능성, 환경, 동물권 등과 관련된 일이면 뭐든 좋다고 생각했나? 정말 아무 생각이 없었군.. 우리 엄마가 나 대학 다니는 내내 너는 어쩜 그렇게 아무 생각이 없니, 하고 답답해했는데. 엄마 미안! 생긴 대로 사는 거지.. 성격 정말 쉽게 바뀌지 않는다.
어떻게 보면, 어떤 커리어 옵션이 있는지, 나는 어떤 일이 잘 맞고 어떤 일을 하고 싶은지에 대해 아무런 생각이 없었던 상태에서, 이 분야의 커리어 옵션에 대한 이해도도 높아지고, 내가 하고 싶은 일들도 구체화되고, 또 그런 일을 할 전문성이 생겨난 것이 박사과정의 큰, 가장 주요 수확인 것 같기도 하다.
좋아하는 점도 있고 잘 안 맞는 점들도 있다. 사실 '연구'하고 탐구하는 것 자체는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더 좋아하는 것 같다. 하지만 학계에서의 연구, 학계에서의 성공하기 위할 정도로 연구를 좋아하고 사랑하지는 않는 것 같다.
1. 지난 3년여의 경험으로 얻은 결론은, 나는 어떤 과학적, 사회적 현상에 대해 호기심을 해결하기 위해, 진리를 알아내기 위해 탐구를 하는 경향이 있기보다는.. 그 결과를 필요로 하는 사람/조직이 직접적으로 있는 일을 할 때 더 동기부여가 잘 되는 성향이 있다.
2. 그리고 나는 생각보다 관심사가 다양해서, 한 분야를 아주 깊이 오래 파기보다는 덜 깊더라도 한 기간안에 다양한 주제들을 다루고 싶은 성향도 있다. 그래서 기초연구를 하기에는 엉덩이가 가벼운 편인 듯.
3. 혼자가 아니라 팀이랑 같이 하는 일이 좋다! 그래서 연구든 프로젝트든 어떤 일이든 팀원들과 같이 아이디어를 주고받으면서 하는 일을 하고 싶다. 혼자 깊게 탐구하며 들어가기보다는.
4. 자율성이 큰 일이 좋다. 일의 주제를 내가 정하거나, 아니면 방향성을 내가 정할 수 있다거나. 둘 다 면 더 좋지만. 꼭 나 혼자 정하고 싶다기보다는, 같이 팀으로서 정하더라도, 팀의 일원으로서 주제와 방향성을 정하는데 주도적으로 참여할 기회가 있다면 훨씬 더 재미있고 일도 잘 하게 되는 것 같다. 박사과정이면 자기가 연구 주제 정해서 연구하는건데 당연히 자율성이 큰거 아니야? 라고 생각하기 쉽지만.. 의외로 그렇지 않다는 것.. ㅠㅠ 하지만 이건 나라나, 펀딩 구조에 따라 상당히 다르긴 하다.
그런데 사실, 학계에서 하는 연구도 중앙/지방정부나 산업계와 함께 직접적으로 해결이 필요한 문제에 대해서 연구를 하는 경우도 많고, 리빙랩이나 참여형 연구도 적지 않다. 그리고 점점 더 많은 연구가 팀 프로젝트로 진행이 되어서 많은 사람들과 아이디어와 피드백을 나누며 할 수 있는 연구도 많다. 그래서 1번과 3번은 학계에서 연구를 해도 충분히 만족시킬 수 있는 부분이지만 나의 박사과정 주제와 프로젝트는 그런 쪽이 아니었던 것이고.. 다만 '박사과정'의 연구는 학계의 연구 중에서도 특수한 면이 있어서 1과 3을 만족시키기 어려운 경우가 좀 더 많은 것 같기는 하다. 그리고 팀 프로젝트를 한다고 해도 데일리나 위클리로 함께 으쌰 으쌰 하면서 일하기보단 좀 더 길게 텀을 가지고 같이 일하는 편이니까..
2번의 경우는, 사실 연차가 올라가서 여러 프로젝트를 매니징 하는 연구자(또는 교수)가 되면 (PI, Principal investigator) 하기 싫어도 다양한 주제의 연구를 다루게 된다. 오히려 그래서 교수들은 그 부분을 아쉬워한다고도 하지만.. 하지만 프로젝트 각각의 기간이 길기는 긴 편!
4번의 자율성은 의외로 박사과정에서 충족하기 어려워서 정말 아쉬웠다. 이건 나라마다, 펀딩 구조마다 다르긴 하지만.. 자율성이 크면 대신 불확실성이 더 커지기도 하고? 하지만 이건 박사과정을 졸업하고 교수로서 자기 연구를 시작한다면 완전히 극복 가능할 듯! 학계가 회사보다는 확실히 자율성이 클 수도 있으니까. 대신 그만큼 프로젝트를 기획하고 펀딩을 따오고 스트레스가 많아지겠지. 이 내용은 새로운 글로 다뤄봐야 할 것 같다.
이렇듯 나의 성향도 학계에서의 연구를 못 할 성향은 아니지만. 아무래도 학계에서는 더 장기적인 시각을 가진 연구를 하는 경우가 많고, 사실 무조건 실용성에 초점을 맞추기보다는 자유롭게 탐구를 함으로써 언제 어디서 어떻게 도움이 될지 모르는 연구, 실용적이지 않더라도 인류의 지적 호기심을 채울 수 있는 연구를 하는 게 맞다고 생각한다. 그래야 학문이 발전하는 거니까.
그런 면에 있어서.. 그걸 훨씬 더 잘할 수 있는, 호기심 많고 엉덩이 무거운 사람들이 많이 있고 (물론 학문에 따라서는 엉덩이 가벼운 연구자들이 필요할 수도 있겠지만), 그분들이 이미 너무나 좋은 연구를 많이 하고 있는데!! (기후변화의 실태나 대응 분야만 봐도) 그 연구가 사실 널리 알려지지 않아서 문제인 게 아닌가. 나는 그 연구들을 널리 알리고 적절하고 유용하게 적용할 수 있는 일을 하는 게 더 적성에 맞는 것 같다는 정도?
그럼, 연구도 잘 안 맞는 것 같고, 박사과정 왜 시작했는지도 애매하고, 다시 돌아가면 안 할 거고.. 그럼 박사과정 완전 별로였나? 얻은 게 하나도 없나?
사실 전혀 그렇지 않고.. 배운 것도 너무 많고 얻은 것도 정말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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