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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승혜 Sep 25. 2023

나는 대체 왜 박사과정을 시작한 걸까?

연구의 연자도 모르는 사람이 박사과정을 시작한 이유

잠깐 배경설명을 하자면, 대학원을 시작하기 전엔 한국에서 전기공학 학부를 졸업하고, 엔지니어링 회사에서 전기 엔지니어로 3년 조금 넘게 일을 했다. 그리고 회사를 다니면서 어쩌다가, 정말 어쩌다가 채식을 시작하고, 그로 인해 환경과 사회문제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석유화학 쪽 플랜트 짓는 회사에 다니다 보니 좀 더 지속가능한 산업 쪽으로 커리어 전환도 하고 싶고 해외에도 살아보고 싶어서 유학을 결심하게 되었다.


미국에서는 초등학교 때랑 대학 때 잠깐씩 살아봤어서 다른데 살아보고 싶기도 하고, 환경이나 지속가능한 삶을 학교에서 배우는 것도 좋지만 실제로 실천하면서 살고 싶은데 미국에서는 지속가능하게 살기가 좀 어렵지 않나? 차도 거의 항상 있어야 하고.. 하는 생각에 유럽을 알아보고, 그중에서도 특히 환경이나 지속가능성 기후변화 대응 분야에 있어서 앞서나가고 있다고 알려진, 게다가 학비도 무료인 독일로 석사를 알아보게 되었다.


독일 석사는, 라이프치히에서 했는데 엄청 재밌었다! 수업이 전부 다 재밌었던 것은 아니고.. 수업은 개인적으로 호불호가 좀 나뉘었지만, 흥미로운 수업들도 많았고, 무엇보다 독일에서의 생활 자체가 너무 좋았다. 석사 동기나 선후배들, 그리고 독일에서 만난 친구들로 좋은 사람들을 정말 많이 만났다. 쓰레기 분리배출과 채식 외에는 아무런 친환경(?) 활동을 알지도 못하고 하지도 않던 나에게 일상에서 실천할 수 있는 수많은 친환경 활동을 소개하고 자연스럽고 쉽고 재밌게 실천할 수 있게 해 준 것! 독일에 오고 나서는 몇 년 동안 새 옷을 살 필요 없이 (나에게) 새로운 옷들을 너무 쉽게 얻을 수 있었고, 채식도 너무 쉽고, 제로웨이스트 샵도 그때 베를린에 처음 생기고 나서 라이프치히에도 많이 생긴 데다 집 앞 유기농 매장에 기본적인 식재료는 거의 다 제로웨이스트로 살 수 있었고, 리페어 카페도 근처에 있고, 물건 도서관도 있고, 비행기 타고 여행 가는 게 마냥 좋은 게 아니라는 눈치도 얻고 기차여행의 묘미도 알게 되고, 1년 동안 냉장고 없이도 살아보고.. 일상 속에서 스며드는 지속가능한 삶을 살 수 있게 되었다.


독일 석사 생활과 채식에 대해서는 아래 인터뷰나 아래 블로그에서 더 자세히 찾아볼 수 있다.


그런데 졸업이 다 다가와서야, 내가 커리어적으로 전문성이 충분한가? 수업에서 다양한 주제를 배우고, 일상에서 다양한 실천도 하고 모임도 만들고 하기는 했지만, 직업으로 삼을 만큼 깊이 있게 배우지는 못했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학교 다닐 때는 수업도 적당히 괜찮고, 친구들이랑 같이 다니고 채식이나 제로웨이스트 모임 기획 하는 게 너무 재밌어서 진로에 대해서 별 생각이 없었는데.. 졸업하고 취업준비 하는 게 처음도 아닌데 어쩜 그렇게 아무 생각이 없었을까 싶을 정도로 지금 생각하면 미스터리다 정말.


결국 졸업이 즈음해서 나는 현지 언어(독일어)도 못하고, 영주권이나 시민권이 없으니 비자 지원을 해 주는 직장을 구해야 하는데. 현지인들이나 비자가 필요 없고 독일어를 잘하는 외국인들을 제쳐두고 나를 뽑아줄까 하는 의문이 들었다. 특히나 독일어를 엄청 잘하고, 졸업도 빠르게 한 비 유럽인 석사 동기가 비자 지원을 해 주는 풀타임 취업이 1년 가까이 잘 되지 않는 걸 보고 그런 생각이 더 굳어진 것도 같다.


그래서 사실 일반 기업이나 비영리기구 등에 지원할 생각도 안 하고 알아보지도 않고 지원하지도 않았다. 사실 나는 석사 논문으로 환경공학에 가까운 LCA (Life Cycle Assessment, 전과정평가)를 했고, 학부도 공학 베이스니까 사회과학 쪽을 한 그 친구보다는 취업이 더 쉬웠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지금에 와서야 들기는 한다. 하지만 주변에 다 문과 친구들이라 그 친구들이 가는 분야는 내가 되기에는 좀 어려우려나, 그럼 에너지 공학 쪽으로 좀 더 전문적으로 석사를 하나 더 할까 하는 고민을 했던 기억이 있다.


외국인이라는 점을 극복하기에는 전문성이 더 필요한 것 같은데, 그러면 박사과정을 하는 게 전문성을 쌓기에 가장 도움이 될 거라고 막연하게 생각했다. 사실 박사과정을 시작하기에도 아는 게 너무 없지 않나 하는 고민도 있었다. 우리 석사과정은 사실 연구중심 석사는 아니라서 연구 세미나가 하나 있긴 했지만 딱히 방법론이라고 배운 것도 없고.. 다들 석사 논문 주제를 잡고 연구해 나가면서 방법론을 알아서 자체적으로 배우는 시스템에 가까웠다.


그래서 이런저런 고민을 하는 와중에 학회에서 만났던 교수에게 메일을 보냈다. 그 사람의 발표가 LCA와 관련된 주제로 내 관심사이기도 했는데 엄청 인상적이었고, 내가 질문을 했을 때 그 답도 굉장히 인상 깊게 남았었다 (하지만 지금은 구체적인 발표 주제도 내 질문도 기억나지 않는다!). 그래서 졸업했는데 이런저런 고민이 있다, 박사과정을 하기에 모르는 게 너무 많은 것 같다,라고 이메일을 보냈다. 그리고 몇 달간 답이 없어서 잊고 있었는데 아주아주 긴 정성스러운 답장이 왔다.


여러 가지 이야기가 있었지만 ‘박사과정은 원래 그 주제에 대해 잘 모르는 채로 시작하는 거고, 박사과정을 하면서 배우는 거다’라는 답이 와서 용기를 얻었다. 그리고 마지막에 자기 학교를 옮겨서 박사과정 포지션이 곧 열리는데 지원해 보라는 이야기까지. 그래서 그때부터 박사과정에 좀 더 적극적으로 지원하기 시작하고 그중에 이 포지션이 되어서 시작하게 되었다.


결국, 유럽에 남고 싶은데, 유럽에서 외국인으로도 경쟁력이 될 만한 전문성을 쌓고 싶다!라는 조건하에 박사과정을 하기로 결정한 것이 아닌가 싶다.


즉 연구가 너무 좋고, 연구를 하고 싶고, 교수가 되고 싶고, 이런 이유로 시작한 것은 아니라는 것. 박사과정을 한다고 교수가 될 필요는 없고, 다 될 수도 없지만, 그래도 연구가 너무 좋기는 했어야 되는 게 아닌가 싶지만.. 학석사를 연구중심이 아닌 과정을 했다 보니 이 시점에서 나는 연구가 뭔지도 잘 몰랐던 게 아닌가 싶다.


나는 연구가 좋아서 박사과정을 시작했나? 그럼 지금 나는 연구를 좋아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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