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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승혜 Mar 05. 2020

1. 일은 할만해? 무슨 일 해?

박사 과정 연구 소개 1- 5개월 방황기

친구들과 오랜만에 안부를 주고받다 보면 일은 할만해? 무슨 일 해? 적응은 했어?라는 질문을 종종 받는다.


박사과정의 ‘일’에 적응한다는 건 뭘까.. 아직은 언제까지 끝내야 하는 마감이 있는 일이라거나, 혹은 반복되는 내 몫의 업무가 있는 것도 아니라서 무슨 ‘일’을 하는지 정의하기도 어렵고, 매일매일이 새롭다. 물론 아주 마감이 없는 건 아니다. 길게 보면 36개월 안에 n개의 논문을 써서 통과해야 하고, 이를 위해 어떤 논문을 어느 저널에 언제 낸다는 마감일이 정해질 텐데, 문제는 이걸 정하는 것 자체도 점차 해나가야 할 ‘일’들 중에 하나라서.... 주요 결과물의 내용과 마감일이 전혀 정해져 있지 않다! 그래서 현재로썬 2주에 한 번씩 교수님을 만나서 하기로 한 일들 경과보고를 하고 (뭘 읽고 요약해서 공유하고 어떤 부분을 쓰고 등) 다음 모임까지 할 일을 정하는 게 유일하게 정해진 마감일이다. ‘일’이라기보다는 공부를 하는데 소정의 돈을 받고 하는 느낌? 물론 돈 주는 사람(=지도교수)이 있기 때문에 시험이나 리포트 그냥 안 쓰고 망하면 되지~라는 마음가짐을 갖기는 어렵고 압박이 더 직접적으로 다가오기는 한다.


내가 여태껏 해본 일이라면 최근 서울에서 5개월간 정기적으로 모임 만든 일, 10개월간 독일의 연구소에서 인턴으로 일한 것, 서울에서 3년간 설계 엔지니어로 일한 경험, 그리고 학부 때 한 과외경험뿐인데…. 다 지금 하는 일과 달라도 너무 다르다! 심지어 연구소에서 인턴 한 것과도 너무 달라! 그때 다른 두 박사과정생들과 연구실을 같이 썼었는데, 그들도 이런 고민을 하고 있었겠구나. 새삼 6년 전의 그들은 미궁을 헤매는 박사과정생의 고민은 모르 채 눈 앞의 주어진 일만 하면 되는 세상 편한 팔자의 나를 보며 무슨 생각을 했었을까 싶기도 하다.


현재 나는, 주제와 관련된 논문을 찾고, 읽고, 정리하고, 내 논문은 어느 방향으로 쓸지 고민하고, 교수님이랑 의논하고, 개요를 잡고, 뭔가 끄적끄적 써보고, 표도 만들어서 정리하고, 2주마다 교수님들이랑 공유하고 하는 과정들을 순서대로 가 아니라 이리저리 왔다 갔다 계속 반복하는 일을 일과로 삼고 있다. 하지만 전체 프로젝트는 차치하고라도 첫 번째 논문의 주제와 방향이 이게 맞나, 아무도 이 일을 안 한 게 맞나, 이게 유의미한가, 이 방법이 될까, 교수님은 제대로 알고 얘기하는 걸까(!!), 하는 의심 속을 헤매고 있다.  


아직 시작한 지 4개월밖에 안 되어서 이런 걸까,라고 쓰다 보니 일도 종류에 따라 다르긴 하겠지만 한 4개월 하면 이미 프로젝트 한 사이클쯤 마무리하거나 루틴이 잡히거나 하지 않나 (하고 쓰고 묵혀놨던 글을 다시 쓰기 시작한 지금, 벌써 5개월이 지났다). 가장 최근에 했던 모임 만드는 일은 혼자 한 달 하니까 루틴이 잡히고 두 달 하니까 멤버들이 추가되어 프로젝트가 되고, 세 달이 되니까 지원사업도 되고 나름 궤도에 올랐었는데.. (함께해준 팀원분들의 덕이지만). 이것은 5개월이 지나도 이제 방향이 좀 잡혀서 글을 쓰고 있지만 쓰면서도 이게 맞나, 아닌 것 같은데, 일단 써보고 쓰면서 잡아나가 보자 이러고 있다.


‘연구'와 ‘논문 쓰기' 둘 다 처음 해 보는 거라서 그렇겠지. 학부 때는 절대 대학원은 가지 않겠다 라는 강력한 의지가 있었기에 연구소 아르바이트고 인턴이고 뭐고 근처도 안 가보고, 대학원을 간 친구들이 어떤 생활을 하고 어떤 고민을 하는지 궁금해하지도 묻지도 않았다. 그렇게 취업을 해서 잘 다니다 환경 분야에 관심이 생겨 졸업한 지 4년 반 뒤에 시작한 석사는 독일에서 했는데... 유럽에서의 석사는 한국처럼 연구실에 소속되어서 논문도 많이 읽고 쓰기도 하고, 특히 다른 박사 과정생들 하는 일을 어깨너머로 보기도 하고 그런 게 아니라 약간 학부의 연장선이라거나, 전문대학원 같은 분위기라 연구는 이제 시작이다. 10년도 더 전에 쓴 학부 졸업논문은 긴 실험 리포트에 가까웠고, 석사 졸업논문은 새로운 것을 발견할 필요는 없이 정해진 주제에 정해진 방법론을 적용하는 일이었다. 물론 석사과정에서도 인턴이나 학생 연구원을 한다거나 해서 연구와 연구실 경험을 더 쌓거나 석사논문 쓴 것을 논문으로 낼 수도 있긴 한데 나의 경우는 그렇게 새로운 연구는 아니었던 것 같다.


5개월이나 되었는데 아직도 이렇게 헤매고 있어..라고 박사과정을 살아남은 경력자분들에게 징징거려보니, 5개월이 뭐야, 3년 내내 그럴 것이야, 근데 박사를 3년 내에 끝내야 해? 4년도 아니고 5년도 아니고?라는 답을 주로 듣게 되었다. 학회에서 만난 유럽 모 국가연구소의 50대 박사님은, 박사과정 1년은 논문이니 방법론이니 이런 것에 구애받지 않고 철학자가 되어서 소설도 읽고 철학책도 읽고 자유롭게 상상하고 브레인스토밍 하는 거야!라고 말해주기도 했다. 그런 말들이 위로도 되고 용기도 주지만 (아 지금 이렇게 헤매는 것 같아도 박사 딸 수 있구나), 우리 교수님은 그런 말들에 전혀 동의하지 않는 듯 하니 (1년 차에 논문이 2개는 나와야 된다고 믿는 듯, 1년은 철학자가 되라는 말을 들었다고 전해주니 Nooooo 라며 놀라는 반응이 반사적으로 나옴), 혼란스럽다.


박사과정이란 뭘까? 아주 간단하게 얘기하자면 아직 아무도 다루지 않은 새로운 소재와 방법론을 연구하여 제안하는 글을 쓰는 것?? 소재가 새롭거나 방법론이 새롭거나 소재와 방법론의 조합이 새롭거나.. 한 게 아닌가 싶은데 1년 뒤에는 또 다른 설명을 하게 될지도 모르겠다. 어쨌든 여태껏 아무도 하지 않은 주제를 선택해서 아주 과학적인 방법으로 (??) 많은 증거자료를 바탕으로 (문헌이든 실험이든 둘 다든) 새로운 사실을 증명하거나 제안하는 건데.. 이 ‘아무도 안 했던 것', 하지만 ‘의미 있는 것'을 해야 한다는 게 생각보다 모호하고 어렵다. 의미 있는 것이라면 왜 아직 아무도 안 한 것인가?라는 의심이 든달까. (사실 일단 펀딩을 받았으니까, 새롭기만 하다면 꼭 의미 있는 것을 해야 하는 것은 아닐지도 모르겠으나, 내가 의미 있고 유용한 것을 하고 싶기도 하고, 박사 이후에도 계속 연구를 한다면 유용한 연구를 한 것이 당연히 도움이 되기도 하고..)


박사과정이 아니라도 세상에 없던 제품이나 서비스를 만들어 내는 일은 많으니까, 맨땅에 헤딩해야 하는 어려운 종류의 일은 정말 많이 있겠지. 일단 누구든 개인의 삶 자체가 아무도 가지 않은, 세상에 없던 유일무이한 길이기도 하고. 그래도 굳이 연구분야 초심자로서 이 분야와 다른 분야의 차이를 찾아보자면, 제품이나 서비스를 만들고 파는 일은 당장 해야 할 일이 분명하지 않거나 이 일이 잘하고 있는 게 맞는 건가 싶을 때가 많은 건 마찬가지겠지만, 그래도 제품이나 서비스가 팔리냐 안 팔리냐 투자나 후원이 들어오느냐 안 들어오느냐, 이 사업이 계속 지속 가능한가 아닌가 하는 뭔가 궁극적으로 추구하는 목표가 있다는 점?


물론 박사과정생에게도 뚜렷한 수치적 목표가 있긴 하다. 3년간 x학점을 듣고 n개의 논문을 쓰고 통과되어야 한다 라는 것. 하지만! 이게 논문 주제와 내용을 정해 주는 건 아니잖는가. 그리고 나의 경우는 프로젝트에 고용된 형태의 박사과정이라 그 프로젝트 내의 일정 부분이 내 역할로 주제도 대략 정해져 있기는 하다. 하지만!! 프로젝트를 제안하고 따 낸 내 지도교수님은 일부분(전 과정 평가, Life Cycle Assessment)엔 조예가 깊은 전문가이긴 하지만 프로젝트가 다루는 모든 주제와 방법론에 전문가는 아니고, 하필 내 첫 번째 논문에서 다루는 핵심 주제에 대해서는 나만큼이나 교수님에게도 새로운 분야였다. 어느 박사과정이나 마찬가지겠지만, 결국 내 프로젝트의 세부사항은 내가 만들어 나가야 하는 거였다. 지원할 때는 엄청 다 정해져 있는 것 같았는데... 내가 방향과 목적을 다 잡아갈 수 있다는 게 사실 굉장히 매력적이나, 뭔가 아이디어가 떠올라서 구상을 해 봐도, 새로운 분야인 만큼 내가 아직 논문을 덜 읽어서, 뭘 몰라서 이런 방향으로 잡은 게 아닌가 하는 의심이 종종 든다. 지난 5개월 간 논문 100편을 읽었어도 내가 못 읽은 관련 논문이 수십 배는 될 테니.. 그리고 이 분야의 전문가는 아니지만 뭔가 대충, 그렇지만 나와 다르게 알고 있는 교수님 마음에도 들어야 한다는 게, 굉장한 복병이다 복병이야.


결국, “일은 할만해? 적응했어?”라는 질문에는, “연구실 사람들도 너무 좋고 큰 틀의 주제도  마음에 들고 읽고 있는 논문들도 너무 흥미로운데 방향을 잡고 글을 쓰는데 헤매고 있어. 일단 헤매면서도 쓰고는 있는데 이게 어디로 갈지..”,라고 5개월째 대답하고 있다.


“그럼, 주제가 뭔데? 무슨 연구를 하는데?”라는 질문으로 이어진다. 이에 대한 답은 다음 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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