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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대보르미 Jul 09. 2021

100만 원은 빌려주고, 5천만 원은 그냥 주고

철없는 막내딸


"근데... 너네 엄마 참.... 그렇다.

뭐가 그리 급한 일이라고 일하고 있는 딸에게 전화해서는..."


통화를 듣고 있던, 옆자리 선배에게서 그 이야기를 듣는 순간 쥐구멍이라도 찾아 들어가고 싶을 만큼 부끄러웠다...





스물일곱.

5년의 연애기간에 마침표를 찍었다.

원래는 결혼 후에도 1년 정도 그냥 각자 있는 곳에서 생활하려고 했는데, 허니문 베이비로 우리의 계획은 물 건너갔다.

급하게 전세를 구했다.

문제는 돈.

남편도 나도 집안의 도움을 받을 수 있는 상황은 아니었고, 모자라는 돈은 은행 대출을 받았다.

알콩달콩 신혼을 즐기며 몇 달이 지났다.

출산을 위해 친정으로 내려와 있던 어느 날.

주인아저씨가 집을 팔기로 결정했다며 연락이 왔다.

산후 조리고 뭐고 걱정에 휩싸여 안절부절 애만 태우는 나에게 엄마는 그냥 그 집을 사자는 제안을 하셨다.

이미 대출을 많이 받은 상태라 어렵다는 걸 아는 엄마는 일부는 본인이 빌려주겠다고...

그렇게 엄마에게 빚을 졌다.

넉넉지 않게 살아온 엄마를 잘 알기에 빌린 돈은 은행 대출보다 더 맘이 쓰였다.

어떻게든 빨리 갚아야겠다는 생각이 앞섰다.

하지만 박봉인 공무원 외벌이에, 이젠 아이까지 생겼다.

이것저것 따질 틈이 없다.

아껴 쓰자! 덜 쓰자! 모유수유! 천 기저귀!


남편은 결혼 전부터 적금 두 개를 가지고 있었다.

청약저축과, 장기주택마련 저축.

경제에 관심이 별로 없던 시절 청약저축은 이제 우리가 집을 샀으니 필요 없는 저축이라 생각했고,

해약을 결심했다. 남편이 해약하러 간 날 은행 창구 직원은 차라리 대출을 받으시라며 극구 말렸지만 아무것도 모르는 우리는 그 귀한 청약을 깼다.(모지리...)

엄마에게 드렸다.

드디어 장기주택마련 저축도 만기일. 엄마에게 드렸다.

남편의 성과상여금, 명절 상여금 등 월급이 더 많이 나오는 달은 작은 돈이라도 모았다.

그리고 좀 모이면 다시 엄마에게 드렸다.

차곡차곡 빚을 줄여 나갔다.

그렇게 3년이 지났고, 아이도 어느 정도 자라 난 직장을 구했다.

아.. 이제 진짜 숨통 좀 트이게 살 수 있겠다! 얏호!!!


입사한 지 몇 달이 지난날.

엄마의 전화가 왔다.

"니 내 돈 얼마나 갚았노 ?"(성격 급한 엄마는 안부보단 늘 본론이 먼저다.)

나는 그동안 돈을 얼마 갚았다고 계산하지 않았다. 이제 얼마 남았다고만 계산했다.

그 말이 그 말인데 그냥 머릿속이 하얗게 변했다

'얼마 안 남은 걸로 알고 있는데..'

내가 이야기한 금액에서 백만 원이 모자란단다.

백. 만. 원.


그때는 그 돈을 어떻게든 찾아야 한다는 생각뿐 다른 생각이 들지 않았다.

언제 드렸지? 분명 드렸을 텐데...

"엄마 내가 찾아보고 전화할게"

전화를 끊자 옆자리 선배의 이야기가 들렸다...


급한 일도 아닌데 굳이 일하고 있는 딸에게 전화해서 그러셔야만 했을까...

현실을 파악하자, 아... 너무 부끄러웠다.

엄마의 무식함도. 나의 궁핍도...


퇴근 후 백만 원의 흔적을 찾기 위해 통장 내역을 샅샅이 뒤졌다.

생활비가 모자라 언니한테 돈을 빌리고 월급날이 되면 갚아나갔던 흔적.

그럼에도 적금은 꼬박꼬박 빠트리지 않았던 흔적.

늘 빠듯했던 생활의 흔적이 통장에 고스란히 남아있었다.

괜히 눈물이 났다....

더 이상 찾기를 멈췄다.

사실 어느 순간 어렴풋이 기억이 나고 있었다.

엄마를 만나러 친정에 갔던 날, 봉투를 내밀었던 기억.

큰돈이라 당연히 엄마가 빌린 돈 갚는 거라 생각할 줄 알았는데 엄마는 용돈이라 생각하셨나 보다...


"엄마 내가 잘못 계산했나 봐"

"그래 내가 맞제? 내 계산이 맞제? 내가 잘못 생각한 거 아니제?."

그래 부모 자식 간이라도 금전관계는 명확해야지.

그럴 수 있어.

백만 원 어찌 보면 작지만 또 어찌 보면 얼마나 큰돈이야...

백만 원이 모자라는 상황에 딸이 일하는 데 전화하는 게 뭐 어때,

내가 나가서 전화를 받았어야 했는데 앉아서 받은 게 잘못이지...


그리고 몇 달 뒤.

남동생이 결혼한다고 여자 친구를 데리고 왔다.

집을 어떻게 할 것인지 이야기가 오고 갔고, 엄마는 백만 원의 오십 배가 넘는 돈을 동생에게 주기로 했다.

빌려주는 게 아니라 그냥 주기로...


그때부터였던 것 같다.

내 맘에 막이 생긴 게...

금전으로 가족 간에 문제가 생기는 걸 볼 때마다 손가락질하며 비웃곤 했다.

그런 물질적인 것으로 가족의 사랑을 가리는 어리석은 사람들이라며....

그랬던 내가 고작 백만 원에... 그 고작 백만 원에...

나도 별반 다르지 않은 어리석은 사람이구나...


나는 여섯째 딸이다.

남동생은 엄마가 귀하게 얻은 아들이고....

칠 남매 사이에서 늘 애정에 굶주렸던 나는 착한 딸로 포장하며 살았다.

착하면 한번 더 봐주겠지, 한번 더 칭찬해주겠지, 한번 더 안아주겠지....

너무 늦게 깨달았다.

문제를 일으켜야 한번 더 봐주고, 잘못을 해야 한번 더 생각해주고, 징징거려야 한번 더 챙겨준다...


한참 지나 술의 힘을 빌려 섭섭했다고 속상했다고 고백하던 날...

엄마는 그게 뭐가 섭섭하냐고 되물었다...


나는 언제쯤이면 마음에 생긴 이 막을 걷어낼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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