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작은 소설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난나의취향과 윤글 Jun 20. 2020

박스 스트리트 1

: a street full of boxes

밤의 한강 / Copyright. 2020. 난나의취향. All rights reserved.




  빈 박스로 가득한 거리였다. 얼핏 언젠가 와본 것 같은 평범한 곳이었는데 분위기는 전혀 그렇지 않았다. 공기가 어딘가 가라앉아 있었다. 말 그대로 스산했다. 게다가 어떻게 여기까지 온 건지는 기억나지 않았다. 너무 낯설고 더러웠다. 빈 박스들이 아무렇게나 쏟아져 있었고, 누구 하나 치우려 들지 않았다. 마치 원래 있던 거리의 조형물이라도 되는 것처럼. 다른 쓰레기는 없고, 크기가 제각각인 빈 박스만 가득했다. 일부러 이렇게 해놓은 건가 했지만 이유는 알 수 없었고, 알고 싶지도 않았다. 그가 보기엔 그저 쓰레기일 뿐이었다. 악취가 나진 않으니 그거 하나는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그곳의 사람들은 하나같이 질서를 맞춰 소리 없이 걷고 있었다. 한쪽을 향해서 계속. 박스를 넘어가거나 밟으면서도 한 치의 흐트러짐 따위 없었다. 석은 그 행렬을 눈으로 따라가 보았다. 저 멀리 시야의 끝에 무언가 보였다. 꼭 터널을 지날 때 끄트머리에서 볼 수 있는 빛의 더미 같았다. 그 속으로 그들이 계속 사라지고 있었다. 석은 갑자기 호기심이 일어 그들에게 다가가 어디로 가는지 물어보려다 이내 그만두었다. 그들이 친절히 멈춰 답해줄 것 같지도 않았고, 다가가기엔 거쳐야 할 장애물이 생각보다 너무 많았다. 어지럽게 널려 있는 빈 박스들과 한쪽으로 사라지는 끝없는 행렬. 그 기묘한 조화에 잠깐 넋을 잃을 뻔했다.


  분명히 이상했다. 이 상황과 이 광경이. 하지만 무엇보다 이상한 건 여기에 있는 그 자신이었다.


  그들과 섞이고 싶지 않았던 석은 일단 이곳에서 벗어나기로 했다. 행렬과 정반대로 고개를 돌려 발을 뗐다. 그 순간, 빈 하늘에 박스 한 무더기가 일제히 생겨나더니 그를 향해 우르르, 쏟아졌다. 그가 서 있던 바닥은 와르르 무너졌다. 상황 파악을 할 시간 따위는 전혀 없었다. 그는 악 소리 한 번 지르지 못하고 그대로 파묻혔고, 순식간에 옴짝달싹 못 하게 되었다. 넘어질 때의 충격 탓인지 그의 가슴께를 짓누르고 있는 박스들 탓인지 숨도 잘 쉬어지지 않았다. 소리를 질러보려 했지만, 목소리를 낼 수 없었다. 몸에서 점점 힘이 빠졌다. 그렇게 석이 박스 무더기에 파묻혀 죽어가는 와중에도 행렬의 조용한 발소리는 끊이지 않았다. 의식이 흐려지는 와중에도 발소리는 또렷하게 들렸다. 죽는구나, 눈앞이 서서히 검어졌다.


  얼마나 지났을까. 석이 숨을 몰아쉬며 눈을 떴다. 살았다. 안도함과 동시에 깨달았다.


  ‘꿈이었구나.’


  그는 한바탕 악몽에서 깼고, 침대에서 굴러 떨어진 채 식은땀을 흘리며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그제야 정신을 차렸다. 숨을 천천히 가다듬고 진정한 후 휴대폰을 들어 시간을 확인했다. 새벽 3시였다. 그는 식은땀을 닦고 몇 번 더 심호흡했다. 후들거리는 몸을 일으켜 다시 침대에 누웠다. 아직 아침이 되기엔 한참 멀었고 무언가를 하기엔 너무 피곤했다. 그에겐 어느 때보다 길고 지난한 새벽이었다.

매거진의 이전글 아아, 봄인가 보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