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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난나의취향과 윤글 Mar 26. 2016

흔들림

마음이 흔들려 자리가 하나 생겼다.



그날은 참 운이 나쁜 날이었다.


안경을 실수로 밟아서 망가졌고, 시험은 완전히 망쳤다. 저녁 나절부터 갑자기 내리는 비 때문에 편의점에서 급히 비닐우산을 사야만 했다. 언짢은 기분을 숨기기 힘들어 오만상을 썼다. 피곤하고 찝찝한 몸과 마음으로 버스 정류장까지 터덜터덜 걸었다. 집에 도착하면 허물을 벗고 뜨거운 물로 샤워를 해야겠단 생각뿐이었다. 유일하게 나를 위로해 주던 하늘은 어째선지 더 거세게 비를 뿌려댔다.


그렇게 도착한 정류장에서 그를 처음 보았다.


그는 깔끔한 슬랙스와 무늬 없는 셔츠 차림으로 하트모양 비닐우산을 쓰고 있었다. 나랑 같은 우산이었다. 아마 그도 우산이 없어서 급하게 편의점에서 산 것 같았다. 왠지 차림새와 언밸런스한 우산을 든 그가 귀여워 웃어버렸다.


웃음소리가 너무 컸던 건지 살짝 돌아보는 그와 눈을 마주쳤다. 나는 당황해서 얼어붙었지만 그는 별 생각 없다는 듯 다시 고개를 돌렸다. 그렇게 어색한 몇 분이 흘렀다. 버스는 어디서 고장나버린 건지 올 생각을 하지 않았고 나는 괜히 신경이 쓰여 안절부절못했다.


'사과를 해야 하나? 아니 그냥 모른 척할까? 아, 버스는 왜 안 와?'


갑자기 그가 다시 돌아봤다. 그리곤,


"안 어울리죠?"

하는 것이다. 나는 당황해서


"아...아니요 죄송해요!!"

하고 소리를 질렀다.  잠깐 놀라던 그는 싱긋 웃어 보였다.


그 모습을 보고 나서는 오늘 있었던 모든 나쁜 일들이 별 것 아닌 게 되었다.


잠깐의 해프닝이 있고 나서, 그와 같은 버스를 다. 내가 먼저 앉았는데 그가 내 옆에 앉았다. 나란히 세워진 하트 프린팅 우산이 참 다정해 보였다. 어색할 법도 한데, 그 버스 안에서 우리 사이엔 적당한 습기와 적당한 대화가 오갔다. 하지만 기억은 나지 않는다.


흔들리는 버스의 엔진 소리 탓인지,

그의 웃는 얼굴이 자꾸 아른거려서인지.


그날 이후 수업을 마치고 나오면 항상 그가 정류장에 와 있었고, 같은 버스를 항상 타고 다녔다.


그리고, 오늘도 비가 온다.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해요?"

내 상념을 깬 그의 얼굴이 보였다. 그리고 그 옆에 나란히 놓인 우산 두 개는 더없이 다정했다.


"아, 아무것도 아녜요. 무슨 얘기 했어요?"

나는 얼굴이 약간 붉어진 채 답했다.


"무슨 생각 했던 거예요 대체. 이름이 뭐냐고 물었잖아요."


아, 아직 서로 이름도 모르고 있었구나.

그의 물음표가 나를 꿰뚫고 휘감았다.

갑자기 멀미가 도졌다.


"제..제 이름.. 이름이요?"

'젠장. 말은 왜 더듬어?'


그는 싱긋 웃으며 답을 기다렸다.


"아, 그러니까 제 이름은요.."

대답을 마치고 달뜬 숨을 내쉬었다.



버스가 흔들렸다.

그 바람에 마음이 흔들려 자리가 하나 생겼다.








윤글,

Instagram.com/amoremio_yo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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