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만의 명절

소소한 행복

by 유프로

자주 보던 친구들도 각자 하는 일과 사는 곳이 달라지다 보면 전처럼 자주 만나기 힘들다. 누구의 생일이나 주고받을 것이 있다거나 송년회 등으로나 겨우 만나게 된다. 비정기적인 모임이라도 약속잡기 힘들다. 하지만 한 무리의 내 친구들은 매년 뜨거운 여름날 꼭 만난다. 우리는 우리만의 명절이라고 부른다.


이 친구들은 아마 2009년부터 친하게 지냈던 것 같다. 동네에서 거의 매주 만났다. 같이 놀러도 다니고 실없는 농담부터 나름 진지한 고민까지 나누곤 했다. 그러던 어느 토요일 주말 다 같이 점심을 먹고 내일 보자며 헤어졌는데 그 날이 마지막이 되었다. 2010년 여름 이후 한 친구를 다신 볼 수 없게 되었다. 너무 갑작스러운 소식에 혼자 참 많이 울었다. 나는 고작 몇 년 같이 지냈다고 슬픈데 친구 부모님의 마음을 내가 어떻게 헤아릴 수 있을까 싶어 3일 내내 있던 장례식에서는 울지 않으려 노력했다. 이때부터 '보고 싶다'는 말과 '가슴이 아프다'라는 말의 무게를 달리 느끼기 시작했다.


그러다 갑자기 친구 부모님이 우리 애는 어떤 애였냐고 물어보셨다. 겨우겨우 착하고 좋은 친구였다고 대답했지만 흐르는 눈물은 도저히 참을 수가 없었다. 원래 나는 남 앞에서 우는 것을 싫어하고 울지 않았는데 아마 이 날부터 나는 남 앞에서도 잘 우는 사람이 되었다. 이때 사실 친구들에겐 말하지 못했지만 몇 년간 집에서 투병생활하시던 우리 할머니도 갑자기 아프셔서 병원에 입원 중이셨다. 미신에 따르면 둘 중 하나를 가지 말아야 했지만 그럴 상황이 아니었다. 며칠간 같은 병원의 장례식장과 중환자실을 오갔다.


그리고 두 달 뒤엔 학교 선배의 장례식이 있었고 친한 친구의 아버지들, 친구 형, 할머니까지 3일 내내 빈소를 지키며 장지까지 가는 장례가 두 달에 한번 정도 있었다. 그 1년 동안 어떻게 살았는지 모르겠다. 그냥 나는 늘 울고 있던 것 같다. 부모님이 걱정하실까 집에서는 울지 못했다. 학교를 가는 지하철에서도 울었고 모든 것이 슬퍼 보였다. 내가 지금까지도 가장 슬프다고 생각하는 장면은 자식을 먼저 보낸 부모님의 뒷모습이다.


그전에 갔던 장례식은 대부분 친구의 조부모님이셨기에 다들 담담하게 반응하고 나도 친분이 없던 분들이라 크게 슬프게 다니진 않았다. 하지만 친했던 사람들의 장례를 단시간에 자주 겪게 되니 정말 가슴이 아팠고 갑자기 전화가 와도 불안했다. 첫 번째 친구 장례식 이후 6~7번의 장례 때는 뭔가 불길한 예감이 늘 있었다. 누구의 연락 일지 알 수는 없지만 왠지 장례식에 가야 할 것 같은 기분이 엄습했고 그 예감은 늘 맞았다.


jan-tinneberg-gJJhG4gM7NA-unsplash.jpg


사람은 누구나 죽는다. 갑작스러운 친구의 죽음을 겪었을 땐 이십 대 초반이었고 그 죽음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잘 몰랐다. 다른 친구들도 많이 힘들어하면서 내게 많이 의지했다. 그 친구들을 만날 때 내 슬픔은 참았다. 그것도 나중에 큰 폭풍으로 돌아왔다. 누군가를 갑자기 다시 볼 수 없게 되는 것이, 갑작스러운 연락이 두려웠다. 처음 동네 어르신이 'ㅇㅇ 잘못됐데'라고 전해주신 말도 참 야속하게 느껴졌는데 지금까지도 그 장면이 기억난다.


대인기피증이 생기기도 했다. 슬픈 내 모습을 보여주기도 싫었다. 새로운 인연을 만들면 언젠가 또 헤어짐이 있을테니 그런 마음 아픈 순간을 견딜 자신이 없었다. 허무주의에도 빠졌다. 어차피 나도 언제 갈지 모르는데 이런 거 해서 뭐하나 싶기도 했다. 어느 책에서 한 사람의 자살은 적어도 주변 사람 약 20명에게 영향을 미친다고 했다. 나도 그중 한 명이었던 것이다.


그렇게 슬픔 속에 잠겨 살다가 그 친구 동생에게 연락이 왔다. 우리 형은 어떤 사람이었는지 묻기도 하고 형 대신 의지해도 되겠냐고 했다. 언제까지 이렇게 살면 안 되겠다 싶었다. 하늘에서 날 지켜보고 있을 텐데 감히 그렇게 못하겠지만 친구들 몫까지 열심히 살자고 다짐했다. 일단 내 슬픔을 달래려고 이런저런 책을 찾아보았다. 여러 책을 읽었고 '리얼 라이프' 란 책의 도움이 컸던 것 같다. 그리고 일기를 쓰기 시작했다. 전하지 못하는 편지지만 편지도 여러 통 썼다. 치유의 글쓰기 덕이었을까 나는 점차 나아졌다. 이제는 그런 불안한 감정은 느끼지 않는다.


벌써 10년째 우리는 매년 여름 친구 기일에 맞춰 친구를 보러 간다. 우리는 이 날을 우리만의 명절이라 부른다. 무더운 여름날이 오면 자연스레 언제 보러 갈 것인지 날짜를 맞춘다.


[목소리를 잃어버린 디자이너의 말하기]에서 작가는 '아픈 몸을 살다'라는 책으로 용기를 얻는다.


질병이 제공하는 기회를 붙잡으려면 질병을 적극적으로 살아내야 한다. (...) 생각하고 말하고 씀으로써 우리는 개인들이자 한 사회로서 질병을 받아들일 수 있다. 또 그때야 질병이 그리 특별한 것이 아님을 배울 수 있다.

<아픈 몸을 살다>


여기서 질병을 고통이나 아픔으로 바꿔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한다. '고통'이 제공하는 기회를 붙잡으려면 적극적으로 살아내야 하고, 고통을 받아들이고 나면 그리 특별한 것이 아님을 배울 수 있다.


나는 아픈 마음으로 살았다. 이 아픔 극복하고 나니 나는 더 성숙해졌다. 먼저 간 사람들에게 아쉬운 것은 더 이상 함께 하지 못하는 것도 있지만, 같이 있는 동안 잘해주지 못한 미안함이 제일 크다. 죽음이 있기에 삶이 소중한 것이다. 살아있는 동안은 늘 최선을 다해 모든 순간을 사랑하자. 그날이 언제일지 아무도 모르니 사랑과 표현을 아끼지 말자. 내 친구가 내게 알려준 것 들이다.


보고 싶다 친구야



매거진의 이전글시작이 곧 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