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과 2년 전만 해도 나는 매일 약속이 있었다. 친구 관계가 넓은 편이었고, 다양한 사람을 만나는 것을 좋아했다. 만나자는 약속을 거절한 적이 없다. 지금 다니는 회사는 각계각층 정말 다양한 사람들을 만날 일이 많다. 누군가와 같이 식사할 일도 많았고, 입사 초반에는 다양한 사람들을 만나서 다양한 이야기를 듣는 것이 재밌게 느껴졌다.
나는 예전부터 실천은 하지 못했지만 자기 계발서를 좋아했다. 하지만 관련 책들이 공통적으로 이야기하는 것 중에 불과 몇 년전까지만 해도 이해하지 못했던 것이 있다. 익숙한 것들과의 이별, 매일 만나는 사람들과 멀어지라는 것이었다.
내가 만나는 사람들은 내게 정말 소중하고, 희로애락을 함께 했으며 만나면 정말 즐거운데 그만 만나라고? 행복에도 인간관계가 미치는 영향이 중요하다고 하는데 갑자기 끊어내라는 말은 나로서는 이해할 수도 실천할 생각도 들지 않았다. 그러니까 위로 올라갈수록 외로운 것 아닌가 생각했다. 본인의 목표만 중요하고 주변은 돌보지 않으면 사람들이 떠나갈 것이다. 성공했는데 내 성공을 축하해 줄 사람이 없다면 무슨 의미가 있나, 그렇게 생각하며 시도하려고 하지도 않았다.
그러던 어느 날, 자주 만나던 친구들의 말이 늘 비슷하고 다양한 사람들을 만나도 결국 하는 이야기의 대상만 바뀌고 알맹이는 다 똑같이 들렸다. 다양한 사람을 만날 수 있어서 재밌던 회사였는데, 회식이 너무 많아지니 힘들었다. 비슷한 이야기를 반복해서 듣는 것도 질리고 몇몇 만남들은 재미도, 의미도 없이 그냥 만나게 되는 날들이 많았다. 사람의 행동에도 관성이 있다고 생각하는데, 친구들과 만나는 것도 관성에 따라 누구 생일이니까, 무슨 날이니까, 시간이 비어서 등 관성처럼 만나 관성처럼 한 얘기를 반복하는 것이었다.
내가 무언가 이루고 싶은 일들이 생기자 관성적인 만남을 거절하기 시작했다. 원래 나는 거절을 잘 못하는 편이었는데, (지금도 다는 못하지만) 이유 없이 만나는 모임은 내가 해야 할 일이 있을 때는 가지 않기로 했다. 수많은 자기 계발서들이 익숙한 것과, 만나던 사람과 이별하라는 말이 그제야 이해가 가기 시작했다. 내가 변하고 싶다면 같은 행동을 반복하는 관성 속에서는 변할 수 없다. 맹모삼천지교가, 환경설정의 중요성이 괜히 나오는 것이 아니다.
나의 내면이 더 단단해지고 내적 동기가 생기고나니 나는 어떤 일에도 웬만해선 흔들리지 않고 밖에서 위로를 구하지 않는다. 불과 2년 전의 나도 친구들에게 위로를 구했고 외부요인에 따라 기분이 좌지우지되곤 했지만, 이제는 어떤 일 생겨도 그렇게 힘들게 느껴지지도 않고, 힘든 일이 생겨도 누군가한테 이야기하면서 풀지 않는다. 나는 나만의 방법을 찾았고, 온전히 내게 더 집중할 수 있게 됐다. 그렇다고 모든 만남을 거절하거나 인간관계를 단절한 것은 아니다. 나를 존중하지 않는 사람과 나를 더 피곤하게 하는 만남은 지속하지 않는다.
자주 만나는 것보다 순간의 힘을 이용한 임팩트 있는 만남이 더 낫다. 자주 못 보는 친구들인 만큼 만났을 때 대화에 더 집중하며 만남을 더 소중히 여길 수 있었다. 나의 한정된 시간과 에너지를 더 소중한 곳에 쓰고 싶다. 아직 미완성인 과정이지만 더 소중한 관계에 시간과 에너지를 쏟는 관계에도 미니멀이 필요하다.
나도 누군가에게 그만 만나고 싶은 대상이 될 수 있다. 관계는 내가 줄 수 있는 만큼 유지할 수 있는 것이다. 나도 남이 그렇다고 해서 서운해하거나 이기적인 선택이라 생각하지 않는다. 물론 관계의 역학구도는 그렇게 간단하지 않고, 맥락과 상황에 따라 다르기 때문에 칼로 무 자르듯 적용하긴 어렵지만 10명의 사람을 한 번씩 만나는 것보다 1명의 사람을 10번 만나고 싶다.
과거의 내가 오해했듯 누군가도 오해하지 않길 바란다. 당신이, 사람이 싫은 것이 아니라 관심이, 선택의 가치관이 바뀐 것이다. 과제를 분리해야 한다. 내가 또는 남이 그런 선택을 한다고 자신을, 상대를 부인할 필요 없다. 관심과 가치관은 움직이는 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