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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신혜정 Jun 03. 2024

아빠의 도시락

네게 머문 마음

  오로지 급식만이 점심인 시대에 도시락이라니? 그것도 3일이나 도시락을 싸야 하다니! 메뉴가 김밥도 아닐 건데 일반 도시락에 싸 주기엔 밥이 차가워질 것 같다. 보온도시락이라도 새로 사야 하나 싶었다. 보온도시락을 산다면 어느 브랜드의 어떤 도시락을 사야 하는지 난감했다. 지금 사면 적어도 수능칠 때 가져갈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자 더욱 신중해지기 시작했다. 이것저것 검색하는 나를 보더니 남편은 명쾌한 대답을 내어놓았다. 가까운 곳에서 모 브랜드가 세일 행사를 크게 하니 그곳에 가서 저렴한 가격으로 사 오자고 했다. 귀가 솔깃한 제안이 아닐 수 없었다. 결국 우리는 주말을 이용해 행사장으로 갔고 따끈함을 예약한 보온도시락을 들고 돌아왔다.      


  수학여행 가서 병원까지 방문하는 고초를 겪었던 딸은 이번 체험학습에 불참하겠다고 선언했다. 되도록이면 가 보라고 구슬러 보았지만 딸은 안 가겠다고 했다. 2박 3일이나 되는데다 지리산까지 가야 한다며 고질적인 멀미를 걱정했다. 결국 담임선생님의 전화까지 받고 현장체험학습은 불참하고 학교에 남는 것으로 결론지었다. 그때까지도 다른 아이들은 다 가는 학교의 공식행사에 참여하지 않는 것이 마음에 걸렸을 뿐 다른 건 걱정되는 게 없었다. 그런데 현장학습이 며칠 앞으로 다가오자 딸은 청천벽력같은 소리를 했다.     


  현장학습이 진행되는 3일동안은 급식이 안 나오기 때문에 개인적으로 도시락을 싸 가야 한다고 했다. 도시락이라고는 당일치기 현장학습 갈 때 싸는 김밥이나 유부초밥이 전부였다. 예전에 우리가 학교 다닐 때처럼 매일매일 싸는 일상적인 도시락을 싸 본 적이 없었다. 하루도 아니고 3일이나 도시락을 싸야하다니! 말만 들어도 골치가 아팠다.      


  게다가 딸은 장이 좋지 않아 배아프다는 소리를 달고 살았다. 유산균도 먹여 보고, 알로에도 먹여보고 각종 방법들을 동원했지만 아직도 이렇다 할 해결책을 못 찾고 있다. 그런데 집에 있는 일반 도시락에 밥을 싸 가면 차갑게 식은 밥이 딱딱해져 복통을 호소할 게 뻔했다. 우리는 대안으로 보온도시락을 사기로 했다. 대체 얼마 만에 사 보는 보온도시락인지 몰랐다. 플라스틱이 아니라 올스텐으로 되어 있는 것도 마음에 들고 사이즈도 딱 좋았다. 연마제 제거까지 정성들여 하고 깨끗이 씻어 말려두었다.      


  도시락은 마련되었지만 누가 도시락을 쌀 것인가가 관건이었다. 아침잠이 많은 내가 딸의 도시락까지 싸고 출근하기에는 어렵다고 판단했다. 결국 아침형 인간인 남편이 3일 동안 딸의 도시락을 싸겠노라 먼저 나서주었다. 첫날 남편은 딸이 좋아하는 볶음 김치를 주메뉴로 구성했다. 남편은 유튜브를 검색하여 각종 레시피를 본 후 볶음 김치를 척척 만들어 나갔다. 갓 지은 밥을 도시락에 넣고 계란도 부쳐 얹었다. 반찬통에는 아빠표 사랑이 가득 들어간 볶음 김치를 담았다. 정성껏 싼 도시락은 내가 먹고 싶을 지경이었다. 친구들이 모두 떠나고 없어 평소보다 늦게 등교해도 된다고 하길래 우리는 딸 아이를 남겨두고 출근했다.     


  출근해서 얼마 지나지 않자 딸 아이에게 톡이 왔다. 헐레벌떡 나오느라 도시락을 집에 두고 나왔다고 했다. 남편의 정성이 일순간에 식어 버리는 것 같았다. 처음에는 화가 나다가 다음에는 점심을 굶을 아이를 생각하니 짠했다. 엄마에게 전화를 해서 가져다 주라고 할까 하다가 중학생이라는 점을 감안하여 스스로 겪고 깨닫게 하는 게 나을 것 같다는 데 생각이 미쳤다. 퇴근해서 와 보니 도시락이 깨끗이 비워져 있었다. 딸은 집에 오자마자 도시락을 먹었다고 했다. 따끈한 도시락이 너무 맛있었다며 극찬했다. 평소 급식만 먹던 아이들이라 친구들 중에도 도시락을 안 가져온 아이들이 더러 있었다고 했다. 딸 아이는 내일은 도시락을 꼭 가져가겠노라 결의에 차서 다짐했다.     


  둘째 날은 전날 만들어 놓은 볶음 김치를 한 번 더 출연시키기로 했다. 이번에는 볶음 김치에 비엔나 소세지를 조연으로 더했다. 역시나 밥은 갓지어 따끈했고 볶음 김치와 비엔나는 누가 보더라도 환상의 조합이었다. 지난번 실수를 거울삼아 딸 아이는 도시락을 잘 챙겨갔고 도시락이 너무 맛있었다며 입에 침이 마르게 칭찬을 했다. 친구들끼리 서로 어떤 반찬을 싸 왔는지 비교도 하고 맛보기도 하며 즐거웠다고 했다. 아빠의 볶음 김치를 먹고 친구들이 맛있다고 감탄했다는 말도 잊지 않았다.      


  마지막 날은 돈까스로 휘날레를 장식했다. 딸은 평소에 돈까스를 무척 좋아한다. 비록 냉동돈까스를 오븐에 굽는 것에 불과 하지만. 밥과 돈까스, 빠지면 안 되는 김치를 넣어 반찬을 구성했다. 그리고 소스를 찍어 먹는 것을 좋아하는 딸을 위해 남편은 멋진 아이디어를 더했다. 씻어 말려두었던 물약 병에 돈까스 소스를 넣어 도시락 가방에 따로 넣어준 것이다. 딸은 아빠의 아이디어가 너무 멋졌다며 엄지척을 날렸다.      


  3일간의 도시락 싸기가 끝나자 딸은 딱 일주일만 더 도시락을 먹고 싶다고 했다. 정말 맛있고 즐거웠다고 했다. 하지만 남편은 너무 힘들었는지 더 이상은 도시락을 쌀 수 없다고 일단락했다. 딸도 이해한다는 듯 쉽게 포기했다. 3일간의 도시락을 뒤로 하고 딸은 늘 그래왔던 것처럼 김이 모락모락 나는 급식을 먹으며 학교를 잘 다녔다. 매일 아침 급식메뉴를 검색하는 것도 잊지 않고.     


  나는 한 번도 급식을 해 보지 못하고 졸업한 세대다. 늘 엄마의 도시락을 들고 학교를 다녔다. 우리 엄마는 요리를 좋아하는 사람이라 도시락 반찬 때문에 걱정한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고 한다. 늘 냉장고에는 여러 가지 반찬이 들어 있어 도시락 통에 들어있는 자그마한 반찬통 하나 채우는 건 일도 아니라는 듯 말씀하셨다. 친구 엄마들은 도시락 좀 그만 쌌으면 좋겠다는 말을 달고 살았다고 하는데 우리 엄마는 한 번도 그런 말씀하시는 걸 들어본 적이 없다. 심지어 우리 집 근처에 있는 고등학교를 다니던 사촌오빠의 도시락도 기꺼이 싸서 가져다 주는 걸 본 적이 있다.      


  돌아보면 나를 키운 건 엄마의 집밥과 그 집밥의 온기가 오롯이 살아 숨쉬던 도시락이었던 것 같다. 배달 어플이 없던 그때나 지금이나 우리 엄마는 항상 집밥을 열심히 하신다. 이제는 70을 훌쩍 넘긴 할머니가 되셨지만 아직도 하루 세끼 집밥을 하신다. 결혼한지 10년이 넘어 20년이 가까워오지만 내가 아직도 모르는 제철 음식들이 우리 엄마의 밥상에는 항상 오른다. 어떤 재료들이 요즘 들어 비싸고 무엇이 싼지도 잘 알고 계신다. 마트의 진열대에 있는 상품들을 가격비교 없이 카트에 쓱 넣는 나와는 사뭇 대조적이다. 어쩌면 엄마의 지치지 않는 집밥 덕분에 아버지와 엄마가 아직까지 건강하신지도 모르겠다.      


  딸은 오늘도 아침을 먹으며 오늘의 급식 메뉴를 읊조린다. 요즘의 급식에는 마라탕도 나오고 브랜드 아이스크림도 나온다. 치킨이며 회오리 감자까지 아이들의 입맛에 맞게 다양한 메뉴들이 쏟아진다. 그 덕에 엄마아빠들은 편해졌다. 더 이상 도시락을 싸지 않아도 되고 어쩌면 아이들은 전문 영양사 선생님이 마련하신 더 따뜻하고 영양적인 밥을 먹고 자라는지도 모른다.      


  그런데 나는 가끔 도시락이 그립다. 도시락을 함께 먹던 친구들이 그리운 건지, 그때의 내가 그리운 건지 모르겠다. 그것도 아니면 내가 아이들에게 차려주는 게 아니라 누군가가 나를 위해 기꺼이 내어주던 정성 어린 밥상이 그리운 건지도 모르겠다. 그저 정성과 마음을 받기만 하던 시절, 그래도 되던 어린 우리의 시절들 말이다.      


  아직 채 날이 밝지 않은 새벽, 엄마는 벌써 부엌에 서 있다. 도마를 두드리는 칼질 소리와 참기름 냄새가 가득하던 부엌. 직장 일 하느라 지친 나와는 달리 생기가 가득한 젊은 엄마가 가족의 아침을 마련하고 도시락을 싸던 시간들. 엄마가 싸 준 도시락 뚜껑을 연다. 오늘은 무슨 반찬이 들어 있을지 설레는 마음이 벌써 마중 나와 있다. 보온도시락의 뚜껑을 열자 아직 채 가시지 않은 김이 모락모락 난다. 엄마가 싸 주던 정성과 온기 덕분에 나의 오늘이 이토록 따뜻한 것만 같다. 우리 딸 마음에도 아빠 도시락의 온기가 남아 그 언젠가의 날을 살아갈 힘이 되어주길 바란다.      


  내일은 비어 있는 도시락에 정성을 꾹꾹 눌러 담아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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