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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마음 흔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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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신혜정 Jun 16. 2024

내게 남겨진 흔적

네게 머문 마음

  핸드폰에 저장된 연락처들을 살펴본다. 주기가 정해져 있는 건 아니지만 마음이 내킬 때면 멀어진 마음들을 삭제한다. 주저하는 순간도 있고 과감히 삭제되는 번호도 있다. 오래오래 곁에 머무는 마음들도 있고 저장되자마자 삭제되는 급한 마음도 있다. 화면을 내리며 죽 내려가다 속절없이 한 지점에서 멈춘다. 저장된 이름을 오래오래 들여다본다. 이미 떠난 지 오래인데 내 핸드폰 속에서는 잠든 듯 살아있다. 어딘가에 살아있을 것만 같은 착각마저 든다. 지워야 마땅한 번호지만 쉬 지우지 못하고 남겨둔다. 그마저 지워버리면 마음에서도 지워질 것 같아서.     


  외삼촌이 돌아가신지 벌써 몇 달이 지났다. 건강하시던 삼촌이 암 진단을 받으셨고 곧 수술을 하셨다. 잠깐의 병원 생활 후 건강하게 걸어 들어가셨던 병원에서 마지막을 맞으셨다. 아무도 그렇게 빨리 우리 곁을 떠나실지 몰랐다. 처음 암 진단을 받으셨을 때만 하더라도 우리에게 남겨진 시간을 가늠하지도 않았었다. 수술을 받으면 완쾌하실 줄 알았고 그게 당연하다 생각했다. 하지만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은 지나치게 짧았다. 마지막으로 삼촌을 만난 게 언제인지도 모르겠다. 명절이면 엄마를 통해 꾸준히 전해드리던 용돈 5만원이 작은 위안이 되어 주었다.      


  외삼촌은 멋쟁이셨다. 염색을 하지 않고 백발로 다니셨는데 그 흰머리마저 멋진 분이셨다. 어떤 옷을 입으시든 눈길이 가는, 스타일이 좋은 분이셨다. 언제나 본인의 퍼스널 컬러에 딱 맞는 옷으로 코디를 하셨고 가끔은 모자로 포인트를 주기도 하는 센스 가득한 분이셨다. 아는 것도 많으셔서 대화의 주제는 마르지 않았다. 사교성도 좋으셔서 주변에는 항상 친구나 선후배가 끊이질 않았다.      


  삼촌은 아이디어도 많고 사업수완도 좋으셨다. 엄마의 말에 따르면 ‘렌트카’라는 개념이 없을 때 렌트카 사업을 기획한 적도 있었다고 한다. 하지만 너무 앞서간 아이디어는 성공을 거두지 못하고 시간 속에 묻혔다고 한다. 하지만 사람과 아이디어가 가득하던 삼촌은 내내 사업을 하셨고 큰 호황을 누려 전성기를 맞이하기도 하셨다.     


  엄마는 형제가 많은데 그중 이 삼촌이 우리와 같은 지역에 살았다. 일찍이 숙모가 돌아가셔서 삼촌은 홀로 삼 형제를 키우셨다. 삼촌과 같은 지역에 살고 있던 엄마는 오빠들에게 고모 이상의 역할을 했었다. 요리 솜씨가 좋던 엄마는 종종 반찬을 만들어 삼촌 집에 가져가곤 했다. 우리는 주로 51번 시내버스를 타고 삼촌 집으로 갔는데 엄마와 남동생, 어린 내가 나란히 앉기 위해 제일 뒷자리를 선호했다. 늘 같은 곳에 붙어 있는 간판은 한글 공부하기에 안성맞춤이었다. 차창 밖으로 보이는 간판은 훌륭한 한글 선생님이 되어 주었고 삼촌 집에 가는 버스를 타며 그렇게 한글을 뗐다.      


  삼촌이 암 선고를 받으시고 엄마는 다시 젊은 시절로 돌아간 것 같았다. 51번 버스를 타던 그때처럼 삼촌 집으로 가는 차를 탔다. 삼십 대의 엄마처럼 삼촌이 좋아하시는 반찬을 들고 칠십 대 엄마가 삼촌을 만나러 갔다. 삼촌은 세월은 지났으나 변치않는 정성이 배어든 반찬들로 끼니를 해결하셨다. 그러다 얼마 지나지 않아 수술을 하셨고 입원도 하셨다. 그때도 엄마는 병원으로 자주 가셨다. 보호자 1인만 들어갈 수 있는 곳이라 아들인 사촌 오빠들과 교대를 해 가며 삼촌 곁을 지키셨다.      


  적어도 내 기억 속에 있는 삼촌은 엄마에게 좋은 사람이기만 했던 건 아니었다. 잘 되던 사업이 몰락하던 순간에는 엄마에게 돈을 부탁하기도 했고, 반찬이며 청소며 엄마가 늘 삼촌에게 도움을 주는 듯 보였다. 가끔 오빠들 학교에 일이 생길 때면 엄마가 가야 할 때도 있었다. 엄마를 기쁘게 해 주기 보다는 힘들게 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삼촌이 돌아가시고 엄마에게 물은 적이 있다. 삼촌이 엄마를 힘들게 한 적도 많은데 엄마는 왜 그렇게 마음을 쓰냐고. 엄마는 함께 한 시간 때문이라고 했다. 엄마는 형제가 많아 내게는 이모, 삼촌이 많은데 이 삼촌과는 같이 지낸 시간이 많아 각별하다고 했다. 삼촌이 대학에 다닐 때 중학생이 된 엄마는 삼촌이 있는 외지로 나와 공부를 시작했다고 한다. 처음 엄마의 교복을 맞출 때, 용돈이 넉넉지 않던 대학생인 삼촌은 그 지역에서 제일 비싼 교복 집에 엄마를 데려가 최고급 교복을 맞춰주었다고 한다. 그렇게까지 비싼 교복은 필요 없었을 텐데 삼촌은 처음 도시로 나온 어린 동생에게 최고를 선물해 주고 싶었나 보다. 그때부터 계속 삼촌과 엄마는 같은 지역에서 공부를 했다. 서로의 인생에 가장 충실한 목격자이자 역사서가 되어 준 셈이다.     


  내게도 그런 사람이 있다. 내 친구 y가 바로 그렇다. 내가 y를 만나러 간다고 하면 큰 딸은 왜 그 친구를 만나는지 모르겠다고 한다. 자기가 보기에 그 친구를 만나 좋은 점이 별로 없어 보인다는 것이다. 항상 엄마가 그 아줌마의 하소연을 들어주는 편인 것 같고 대단히 취향이 잘 맞거나 좋은 영향을 받는 것도 아닌 것 같아 보인다고 했다.     


  딸의 말을 듣고 보니 전면 부인할 수는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현재의 y만 본다면 단톡방에 있는 ‘조용히 나가기’ 기능처럼 조용히 그녀와 멀어졌을지도 모르겠다. 그렇다면 나는 왜 아직까지 y를 만나고 있을까? 그것은 엄마와 삼촌처럼 우리가 함께 쌓은 시간 때문이었다. 한두 해가 아니라 30년간 우리가 공유했던 시간, 우리 안에 모아둔 서로에 대한 기억과 추억들 말이다.     


  y와 나는 중학교 2학년 때 짝으로 만났다. y는 공부도 잘하고 예쁜데다 밝은 친구였다. 짝이었기에 자연스레 가까워졌고 나보다 먼저 y와 친해진 다른 친구들과도 무리를 형성하며 친해졌다. 고등학교도 같은 곳으로 가게 되었고 대학생이 되어서도 함께 고향에 머무르게 되었다. 비록 학교는 달랐지만 서로의 연애사며 교우관계까지 알 정도로 계속해서 친밀하게 지냈고 우리 사이에 흐르던 모래시계의 언덕은 계속 쌓여갔다.     


  우리 사이에 조금씩 틈이 벌어지기 시작한 건 서로가 함께 하는 시간이 적어지면서 부터다. 직장의 유무, 결혼의 유무 등 서로의 처지가 달라지면서 우리의 모래시계는 더 이상 흐르지 않는 듯 보였다. 나는 조용히 우리 사이에 흐르던 모래시계를 뒤집고 싶었다. 높은 모래 언덕을 쌓는데 얼마나 오랜 시간과 공이 들었는지 알고 있었지만 가끔은 다시 시작해야 할 순간도 있음을 깨닫는 중이었다. 그러다 y에게 여러 가지 힘든 일들이 생기며 반쯤 뒤집어졌던 모래시계가 다시 원래의 자리로 돌아왔다.      


  y 스스로의 노력으로도 어쩌지 못하는 일들이었다. 삼십 대였던 우리는 인생이 뜻대로 되지 않는다는 것도, 우리의 노력으로 어쩌지 못하는 순간들과 마주할 수 있다는 것도 다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것은 이성적인 판단일 뿐, 마음은 고정된 나사가 빠져 헛도는 태엽인형처럼 y도 스스로를 어쩌지 못했다. 그 시간 속에 내가 있었다. 어쩌면 지금도 그 시간 속에 함께 있다. 함께 한 시간이 있기에 나는 y가 안타깝고 측은하다. 내버려 두기에는 그간 우리가 나눈 마음들이 나를 자꾸만 붙잡는다. y를 처음 만났던 그때처럼 y가 웃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모래시계의 모래알 사이사이를 채우고 있는 것만 같다.      


  엄마는 지금도 삼촌이 어딘가에 살아계신 것 같다고 했다. 이모들도 함께 모여 그런 이야기들을 나누었다고 했다. 좋아하시던 산에 살고 계실지, 평생 떼려야 뗄 수 없었던 바다에 살고 계실지 모르지만 아무튼 어딘가에 계실 것만 같단다. 너무 많이 울까 봐 삼촌의 장례식날도 장지에 가지 못했던 엄마는 49제가 끝나고 나서야 조용히 삼촌이 계신 곳을 찾아가셨다.      


  이제 삼촌과 엄마 사이에 흐르던 시간을 기억하는 사람은 엄마밖에 없다. 사후(死後) 세계가 있는지 모르겠지만 현재 우리가 살고있는 시간을 기준으로 본다면 그러하다. 그 기억이 좋았든 나빴든 모든 것은 추억이 될 것이다. 어쩌면 나빴던 기억들은 희미해지거나 사라지고 좋았던 기억들만 오롯이 남을지도 모른다. 대부분의 과거가 우리의 기억 속에 저장되는 방식이 그러니까.     


  오늘도 나는 y를 만나러 간다. 그녀와 나 사이에 흐르는 모래시계가 다시 속력을 내고 있다. 한 쪽의 모래 언덕이 더 높아지고 다른 한쪽의 언덕이 아예 사라지는 순간도 올 것이다. 그런 시간이 오기 전에 y가 처음 만나던 그때처럼 많이 웃을 수 있었으면 좋겠다. 서로의 핸드폰 속에 저장된 번호로만 남는 때도 올 것이다. 누가 남겨질 것인지 알 수는 없지만 그런 순간이 올 것은 확실하다. 그 시간이 오기 전에 y가 어서 웃음을 되찾으면 좋겠다. 그리고 그렇게 되기까지 나의 다정한 안부도 한 몫 하기를 바란다.      


  아직도 지워지지 않은 삼촌의 전화번호를 본다. 걸 수 없는 전화라는 건 알지만 지우지 않는다. 어쩌면 내 번호가 누군가에게 남겨지는 순간에도 지워져 있지 않을지도 모르겠다. 삼촌의 흔적을 보며 번호만 남겨두고 갈 사람이 언제든 생길 수 있다는 사실을 다시 한번 내게 각인시키고 싶은건지도 모르겠다. 마음을 전하는 일에 인색하지 말자고, 이름을 부르고 전화기 너머 다정을 전하는 일에 더 애정을 쏟자고 삼촌의 번호를 보며 다짐해본다.      


  내일 아침에는 y에게 좋은 하루 보내라는 짧은 메세지라도 전송해야겠다. 나의 안부가 그녀의 옅은 웃음이라도 끌어낼 수 있는 마중물이 되기를 바라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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