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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신혜정 Jul 04. 2024

좋은 어른

네게 머문 마음

  공연히 눈가가 뜨거워졌다. 특별히 눈물이 날 만한 포인트도 없었다. 하지만 자꾸만 눈물이 새어 나와 나는 급기야 고개를 숙였다. 애써 태연한 척 잠시 그러고 있었다. 내 눈앞에 놓인 애꿎은 시집(詩集)만 만지작거렸다. 할 수 없이 조용히 손수건을 꺼내어 눈가를 닦았다. 그리고는 아무 일 없다는 듯 다시 고개를 들었다. 다시 눈물이 날까 걱정이 됐지만 애써 참은 눈물은 다행히도 잘 숨겨졌다. 그분은 내가 잠시 울었다는걸 모르시는지, 알면서도 모르는척 해 주신건지 계속해서 귀한 손님 이야기를 이어나가셨다.


  내가 그 책방을 알게 된 건 바로 그 유튜브 채널을 통해서였다. 그 채널은 주로 당일치기 도심 여행을 소개하는데 항상 책이 같이 등장한다. 글쓰기 지망생으로 보이는 채널지기는 자신이 좋아하는 글귀를 소개하고 여행지에 있는 다소 특별한 까페, 문구점, 책방, 맛집 등을 소개한다. 그녀는 나와 취향이 비슷하여 그녀가 방문하는 까페나 책방은 항상 나의 호기심을 자극했다. 그날 그녀는 대구로 여행을 떠났다. 내가 사는 곳과 가까워 당일치기 여행으로 충분히 갈만했다. 그리고 무엇보다 그 책방! 시집만 전문으로 판매한다는, 늦은 나이에 창업을 하셨지만 일주일마다 책들의 자리를 일일이 바꾸는 열정을 가진 사장님이 계신다는 그곳이 매우 궁금했다.    

 

  마침 그날은 남편과 나의 결혼 17주년 기념일이었다. 결혼기념일을 맞아 가까운 곳으로 당일치기 여행을 가기로 했다. 처음 물망에 오른 곳은 우리가 자주 갔던 남해였다. 하지만 남해는 당일치기를 하기에는 다소 거리가 있었고 일기예보도 좋지 않아 운전하기도 힘들 것 같았다. 당일 아침까지 고민하던 우리는 가까운 대구로 떠나기로 했다. 유튜브 채널에서 보았던 그녀의 대구 여행 코스를 다시 돌려보며 그중 몇 군데를 추렸다.        

  앞산 까페거리에 위치한 그 책방은 작고 아담했다. 문을 열고 들어가자 생각했던 것보다 많은 책들이 자리잡고 있었다. 그곳은 시집(詩集)만 전문으로 다루는 독립책방이었다. 사장님은 우리에게 어디서 왔는지 물어보셨는데 그 눈빛이 매우 인상적이었다. 단순히 맑고 선하다고 하기에는 부족함이 있었다. 오랜 시간 쌓아 온 단단함과 모아 둔 열정 같은 것이 뿜어져 나오는 것 같았다. 얼굴의 모든 부분들은 현대 의술의 힘을 빌려 수술로 변화시킬 수 있지만 눈빛만은 수술할 수 없다던 어느 성형외과 의사의 말이 떠올랐다. 사장님께서는 멀리서 왔다며 당신이 직접 쓰신 책 한 권을 선물로 주셨다. 귀한 걸 선물로 주셔서 감사하다는 말을 전했고 그렇게 우리의 이야기는 시작되었다.      


  사장님은 그 책방을 일흔에 여셨다고 했다. 그러면서 그 책방에 오는 ‘귀한 손님’에 관한 이야기를 꺼내셨다. 그 책방에는 매주 한 번씩 방문하는 남자 중학생 2명이 있다고 한다. 학교가 끝나면 책가방을 메고 와서 새로 나온 시집들을 이리저리 뒤져본다고 한다. 그러다가 마음에 드는 시구(詩句)가 있으면 서로에게 읽어주기도 하고 킥킥거리며 웃기도 한단다. 하지만 단 한번도 시집을 사 간 적은 없다고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어린 손님들이 귀한 이유는 시를 읽으며 놀던 아이들이 어른이 되면 그들의 자녀에게도 시집을 읽히고 거실 탁자 위에는 무심한 듯 시집이 놓여있지 않겠냐고 하셨다. 까페가 계속 생기고 누구나 커피를 들고 다니듯 너도나도 시집을 들고 다니며 시를 읽으면 좋지 않겠냐고 하셨다. 동네마다 시를 만날 수 있는 책방이 생기고 그곳에서 아이들이 시를 읽으며 자랄 수 있으면 그 또한 좋지 않겠냐고 하셨다.      


  그 지점이었다. 눈가가 뜨거워지고 불쑥 눈물이 나기 시작한 것은. 상상만으로도 가슴이 벅찼던 것 같다. 휴대폰을 보느라 거북목이 된 아이들이 너도나도 시집을 본다면, 단톡방을 가득 채우는 가벼운 말들 대신 마음을 녹이는 시가 그곳을 수놓을 수 있다면, pc방 대신 동네 책방에서 아이들이 삼삼오오 모여 조그만 입으로 시를 낭송할 수 있다면. 그런 일들이 현실이 될 수 있다면 우리 사회는 더 행복해질 것이라는 생각이 불현듯 들었던 것 같다. 그리고 그런 생각을 머릿속에만 두지 않고 실천으로 옮긴 분이 계신다는 것이 말할 수 없이 기뻤다. 좋은 어른은 책에만 존재하고, 강연장에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바로 지금, 내 앞에 그런 분이 계신다는 것이 감사했다. 없을 것이라 생각했던, 이상적이라고만 생각했던 허상이 실제가 되어 내 앞에서 가능한 현실임을 증명하는 것 같았다.     


  나는 오래 서가를 거닐었다. 이 책방에는 유명하고 베스트셀러인 작가들의 시집은 없다고 하셨다. 이곳에 전시되어 있는 책들은 이곳이 아니면 모두 작가의 방에 쌓여 있다가 먼지와 함께 버려졌을 거라고 했다. 무심히 집어든 책의 날개를 펼쳐 작가소개를 보았다. 방 한구석에 쌓여 있기에는, 그러다 조용히 숨을 거두기에는 너무나 아까운 이력이었다. 사장님은 그곳에 와서 책은 한 권도 안 사도 된다고 하셨다. 하지만 한 편의 시라도 읽고 갔으면 좋겠다고 하셨다. 나는 시집들과 눈을 맞추다 내 마음이 이끄는 곳에서 손을 뻗었다. 그리고 조용히 시를 읽어나갔다. 나 또한 정말 오랜만에 읽어보는 시였다. 마음에 드는 책 2권을 가지고 계산대로 갔다. 사장님은 10% 할인된 가격으로 책을 계산해주셨다. 헤어지기 전에 무언가 더 의미있는 말들을 하고 싶었다. 하지만 많은 말들이 머리에만 맴돌 뿐 적절한 단어들이 떠오르지 않았다. 그때의 내 마음을 언어로 표현하기에는 모든 것이 부족한 것만 같았다.      


  전하지 못한 말들을 책방에 남겨두고 우리는 돌아왔다. 품에 안고 온 시집 2권을 읽으며 오래 행복했다. 그런 공간이 없었다면 나와 만날 수 없었던 언어들. 독자들에게 전해지지 못한 진심은 방구석에서 고요히 숨을 거두었을 것이다. 그리고 계속해서 글을 써 나가지 못하게 된 시인 또한 조용히 사라져 갔을 것이다. 그 책방이 아니었다면 만나지 못했을 마음과 마음들이 하나로 이어지는 것 같았다. 한 번도 만난 적 없는 시인이지만 이미 나와 오래전부터 만나고 있었던 것 같은 착각마저 들었다.      


  생물학적인 나이로 어른이 된지 오래다. 하지만 진정한 어른인가에 대해 생각해보면 고개가 갸웃거려진다. 내 곁에 있는 아이들, 후배들에게 나는 진정으로 어른이었던가를 곱씹어본다. 그리고 그 어른이라는 것이 어떤 모습이어야 하는가에 대해서도 생각해본다. 저 사람처럼 살고 싶다는 마음, 저 사람이 살아가는 모습을 보면 그렇게 되고 싶다는 마음을 불러일으키는 사람이 있다면 그가 진정 어른이라는 생각이 든다. 늘 그런 사람이 되고 싶다고 생각했지만 현실에서는 어렵기 그지없다. 생각한 것을 머릿속에만 넣어두지 않고 현실이 될 수 있도록 노력하며 배움을 게을리하지 않는 것. 나는 과연 언제쯤 어른이 될 수 있을까?     


  책방 계정을 팔로우한다. 내가 올린 서평들에 연달아 좋아요가 눌러지며 나의 계정을 책방 사장님도 팔로우하신다. 연결되어 있다는 연대감이 묘한 설레임과 흥분을 자아낸다. 다 읽은 시집을 다시 읽는다. 읽을 때마다 멈춰서는 대목이 다르다. 시와 시 사이에서 작가와 만난다. 그 작가가 오래오래 시를 썼으면 좋겠다. 그 시가 씨가 되어 사람들의 마음속에서 싹을 틔웠으면 좋겠다. 동네 어귀마다 작지만 따뜻한 책방들이 인터넷 서점을 재치고 활개를 치면 좋겠다. 아이들은 그 서점을 지나치지 못하고 들어와 시의 숲을 거닐었으면 좋겠다. 그리고 그 귀한 손님들이 자라 가슴에 뿌려두었던 시를 품고 저마다의 꿈을 향해 날아갔으면 좋겠다. 그들이 그곳에 다시 시를 뿌리고, 온 들녘에 시가 넘실댔으면 좋겠다. 그렇게 된다면 우리의 마음은 지금보다 따뜻해지고 그 마음에서 자라난 언어들은 온기를 품고 있을 것만 같다.     


  작은 책방에서 시작된 나의 꿈은 이미 큰 세상으로 나아가고 있다. 그곳에서는 나도 어른이었으면 좋겠다. 내 발자국 따라 걷는 그이의 손을 꼭 붙잡아주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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