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게 머문 마음
그녀의 손에서 여러 개의 반지가 반짝인다. 그 가운데 유독 나의 눈길을 끄는 반지가 하나 있다. 나도 한번 껴 보자며 그 반지를 내 손으로 가져온다. 그녀는 손에 맞으면 가지라며 선뜻 반지 주인을 나로 바꾼다. 줘도 되는 거냐고 묻자 자기는 많으니 괜찮다고 한다. 아무리 얇은 반지라도 비쌀 거 같아 선뜻 반지의 주인이 되지 못하고 머뭇거린다. 그러자 그녀가 속 시원히 한 마디 뱉는다. 그 반지 가짜라고!
대학생 때는 14k나 18k로 된 장신구들이 비싸게 느껴졌다. 그래서 도금한 것들을 즐겨 샀다. 디자인이 마음에 들면 뭐든지 샀고 다양한 연출이 손쉽게 가능해서 좋았다. 그러다 결혼을 하게 되면서 14k나 18k로 된 장신구들을 갖추기 시작했다. 결혼이나 임신을 기념한다는 명목으로 반지나 목걸이들을 샀고 지금도 내 몸의 한 곳에서 반짝이고 있다.
소위 말하는 진짜 금제품들을 갖기 시작하면서 도금을 한 가짜들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알이 빠지는 팔찌나 반지들이 제일 먼저 정리 대상이 되었고 색이 변하거나 자주 손이 가지 않는 것들을 정리했다. 가짜를 하고 있으면 나이에 맞지 않는 듯했고 품위를 지키지 못하는 듯한 느낌마저 들었다. 그 후로는 진짜라고 일컬어지는 것들만 사기 시작했다.
그런데 그날 그녀를 만나고 오랜만에 가짜 반지를 끼기 시작했다. 아주 얇고 점처럼 작은 큐빅들이 박혀있는 반지다. 엄마가 봤다면 사십 대에 어울리지 않는 작은 반지라며 당장 빼라고 했을지도 모를. 하지만 나를 사로잡은 반지가 내 것이 된 다음부터는 계속 그 반지를 끼고 있다. 마치 내 몸의 일부인 것처럼.
그 반지는 시간이 지날수록 훨씬 더 마음에 들었다. 일단 무게가 가벼웠다. 진짜 금들은 다소 무게가 나가서 끼고 있으면 반지의 존재감이 많이 느껴지곤 한다. 그런데 이 반지는 끼고 있다는 사실조차 잊을 만큼 가벼웠다. 어쩌다 내 손에 눈길이 머물면 내가 여기서 빛나고 있음을 잊지 말라는 듯 고요히 존재감을 빛내고 있다. 설거지를 할 때도 장갑을 껴도 걸리적거리지 않았다. 나의 무의식에서 가짜니 잃어버려도 그만이라는 생각이 샘솟는 것인지 아무 곳에서나, 아무렇게 끼고 있어도 될 것만 같았다. 좋은 날 격식을 차려 멋진 옷과 같이 끼는게 아니라 매일 입는 속옷처럼 항상 내 몸에 붙어 있는 느낌이었다.
며칠 지나지 않았지만 거의 매일 끼다 보니 반지는 기스도 생기고 칠도 벗겨졌다. 혹시라도 더 험해져서 끼고 다닐 수 없게 될까봐 아직 오지 않은 반지와의 이별이 벌써 걱정되었다. 앞으로도 굳이 진짜를 고집할 필요가 없을 것 같다는 생각도 들었고, 이 반지를 가져가 똑같은 모양의 금반지를 만들까 하는 생각도 동시에 떠올랐다. 반지에 대한 마음만큼은 진짜 반지보다 더하면 더했지 덜하진 않았다.
반지를 만지작 거리다 보니 엄마가 떠올랐다. 종종 우리 엄마를 보면서 나는 가짜 엄마라는 생각을 많이 했기 때문이다. 엄마가 나를 키울 때 했던 많은 일들을 떠올려 보면 내가 우리 딸들에게 해 주고 있는 것들은 가짜 중에서도 가짜다. 물론 엄마는 전업주부였고, 나는 워킹맘이라 다를 수 밖에 없다고 위안하곤 한다. 하지만 아이들을 대하는 엄마와 나의 다른 태도를 보며 반성할 때가 많다.
미숙아로 태어난 내가 지금처럼 건강하게 클 수 있었던 건 다름 아닌 엄마의 밥이었다. 내가 가장 인상깊게 기억하는 장면은 엄마가 밥을 밥솥에서 그릇으로 옮길 때였다. 엄마는 밥을 뜨면서 기도를 했다. 두 손을 모으고 허리를 구부려 마치 밥통 속에 신이라도 있는 것처럼 간절하게 기도했다. 엄마에게 왜 그렇게 하냐고 물으니 밥을 뜨면서도 가족의 건강과 안전을 빈다고 했다. 엄마가 한 따뜻한 밥이 차가운 세상의 파도를 견디는 힘이 되어주기를 바랐던 것 같다. 밥솥에 밥을 잔뜩 한 다음 냉동실에 얼린 뒤, 전자렌지에 돌린 밥을 용기째 그대로 밥상에 내곤 하는 나와는 정성의 무게가 다르다.
엄마는 손재주도 좋다. 코바늘로 뜨개질하여 딸들에게 가방도 만들어 주고, 자투리 천을 이용해 인형 옷도 만들어 주신다. 아이들이 어릴 적에는 안 쓰는 캐노피를 활용하여 공주놀이 할 때 입으라며 드레스도 만들어 주셨다. 아이들은 세상에 하나뿐인 할머니표 드레스를 입고 진짜 공주가 된 듯 즐겁게 놀았었다. 할머니가 만들어 준 가방이나 드레스는 아이들에게 새로운 장난감이 되어 주었고 삶의 온기를 채워 줄 가슴 속 추억이 되었다. 만들어 줄 생각은 전혀 못하고 주로 장난감을 돈 주고 사는 나와는 사뭇 대조적이다.
아이들이 크면서 엄마는 자연스럽게 육아에서 손을 떼게 되었다. 중학생이 된 큰 딸은 이제 할머니가 집에 오시는 걸 부담스러워한다. 그것이 할머니에 대한 애정이 식어서가 아니라는 걸 알지만 그래도 나는 서운했다. 엄마는 나보다 얼마나 더 서운할까 싶었는데 엄마는 역시 나와 달랐다. 엄마는 아이들이 자라면 자연스럽게 부모로부터 멀어지는거라고 했다. 그것이 성장하고 있다는 증거라고 했다. 혼자 있고 싶어하는 시간이 늘어가고 부모나 조부모와 함께 있는 것이 부담스러워지는 것이 당연하다고 했다. 도대체 엄마는 어디에서 부모교육을 받은 것일까? 나는 엄마 딸인데도 왜 이다지도 가짜 같은가?
손에 낀 반지가 아직도 반짝이고 있다. 그런데 가짜면 뭐 어떤가? 가짜가 진짜가 되려고 하는 건 애초에 불가능하다. 가짜지만 예쁘고, 가볍고, 무엇보다 내가 만족하면 되는거 아닌가? 내 비록 우리 엄마에 비하면 가짜에 가까운 엄마지만 열심히 일하면서 가정을 돌보고 아이들에게 귀감이 되는 부모가 되기 위해 오늘도 고군분투하고 있지 않은가? 진짜가 되기 위해 가랑이 찢어지는줄 모르고 노력한다고 가짜가 진짜가 될리는 없다. 차라리 가짜지만 그 존재 자체로도 사랑받는, 멋진 가짜가 되기로 한다.
오늘도 가짜는 진짜에게 전화를 한다. 아이들의 운동화며 교복이 새하얗지 않아서 어떻게 하면 엄마처럼 새하얀 교복과 운동화를 만들 수 있는지 물어본다. 엄마는 오늘도 진짜의 비법을 가짜에게 전수한다. 찌든때 제거 스프레이 칙칙 뿌려 세탁기 돌리지 말고 세탁비누 팍팍 묻혀 손으로 열심히 비벼 빨라고. 소매나 목주변은 다 쓴 칫솔을 모아두었다가 문지르라고. 진짜 엄마의 주옥같은 조언을 뒤로 하고 오늘도 바쁘다는 워킹맘 전용 핑계를 대며 세탁기를 돌린다. 나는 확실한 가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