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치의 보태보태병
자동차를 사려고 마음먹자, 병에 걸리고야 말았다. 이른바 '보태보태병'.
'보태보태병'의 증상은 '시지프스의 형벌' 같은 무한 굴레에서 빠져나오지 못하는 것이다. 그러니까 나의 경우엔, '운전연습을 겸한 막 굴릴 수 있는 600만 원 정도의 중고 경차를 사자'는 것이 본래의 계획이었다면 보태보태병으로 인해, 몇 시간 뒤에는 깡통 옵션의 외제차 매물을 온라인상에서 뒤적이고 있게 된다는 거다. 그러다 외제차의 엄청난 수리비에 화들짝 놀라 본래의 계획인 600만 원 정도의 중고 경차로 돌아오고, 거기에 조금만 더 보태어 소나타, 아반떼, 다양한 브랜드의 SUV로 눈길을 자꾸만 돌리게 되는 것이다.
몇 달 동안이나 사용자가 많은 중고차 거래 플랫폼 몇 군데를 전전하며, 보태보태병의 무한 굴레에서 허우적거렸다. 한두 푼 하는 것이 아니니, 합리적이고 꼼꼼하게 검토하고 구매를 하는 게 응당 맞으나 이 굴레에 빠져 있다간 평생 자동차를 살 수 없을 것 같았다. 차를 사지 못하는 건 둘째 치고, 일상이 망가질 지경이었다. 프리랜서이다 보니, 내 시간을 자유롭게 쓸 수 있는 것도 한몫했다. 새로 올라온 중고차 매물들을 들여다보고 있다 보면 하루가 금방 갔다. 이러다 자동차를 구매하기 전에 폐인이 되어버릴 것 같은 불길한 예감이 들기 시작할 때쯤,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래. 중고차 매매 단지에 직접 가자!"
D를 꼬드겨 부천에 있는 중고차 매매 단지에 갔다. 1층부터 옥상까지 넓은 주차장이 이어졌고, 판매하는 차들이 닿을락 말락 할 거리를 두고 빽빽하게 주차돼 있었다. 사무실이 있는 내부로 들어서자, 온갖 간판들이 나를 반겼다. 업체들의 이름엔 '정직, 착한, 안심, 바른' 같은 단어들이 유독 많이 들어 있었다. 어쩐지 더 쫄리는 기분. 그럴 때면 나는 D를 자꾸만 앞세웠다. D는 자동차에 대해 잘 알지는 못하지만, 내 주변 사람들 중 가장 인상이 강하기 때문에 동행하기에 적합했다.
사전에 봐두었던 매물을 가지고 있는 업체로 찾아갔다. 배우 고창석을 닮은 자동차 딜러는 친절했고, 나름 솔직하기까지 했는데 그런다고 해서 나의 소심한 데다 쭈뼛거리기를 잘하는 내가 차를 마음껏 볼 수 있을 리 만무했다. D가 특유의 강한 인상과 껄렁이는 연기력으로 중고차 딜러의 시선을 사로잡는 동안, 나는 나름의 기준으로 딜러가 소개해준 자동차들을 꼼꼼하게 살펴볼 수 있었다.
"이 차가 고객님 예산에도 딱 맞는 모닝인데, 어떠세요? 후방 카메라 옵션도 있고, 연식도 그렇게 오래되지 않았어요."
"와... 그런데 어떻게 이 가격에?"
"저는 양심적으로 고객님들께 전부 다 말씀드리거든요. 이 차의 경우엔 잘 수리가 되었지만, 요기 요 쪽 엔진룸이 반 이상 먹혔던 차였어요. 그래서 싼 거지만, 운행하시는 데는 전혀 문제가 없을 겁니다."
"운전자가 많이, 음... 아팠겠네요."
"그렇다면 이 차는 어떠세요? 무사고! 연식도 얼마 안 됐습니다. 가격은 천만 원이고요."
연식도 얼마 안 된 무사고 경차는 거의 새 차 값과 맞먹어서 제대로 보지도 않고 고개를 돌려버렸다. 무조건 중고차 매매 단지에서 차 한 대를 사서, 위풍당당 서울까지 몰고 오겠다는 큰 꿈은 그렇게 꺾여버렸다. 운명 같은 '내 차'는 거기 없었다. D에게 맛있는 저녁을 사주기로 약속했으면서, 머리가 지끈거리고 발이 퉁퉁 부었다는 핑계로 집으로 돌아갔다. (D... 지금도 미안해.)
보태보태병이 치료법은 단 한 가지. 차를 구매하는 것뿐.
자동차를 구매하지 못한 나는 또다시 중증 보태보태병에 시달리며 하루하루를 보냈다. 중고차 구매팁, 사기 안 당하는 방법, 허위매물 구별법 같은 온갖 종류의 자료들을 섭렵했고, 하도 매물들을 들여다보고 비교하느라 도로 위를 지나다니는 차량의 중고 시세 정도는 빠삭하게 꿰고 있을 정도였다. 내 직업이 중고차 딜러도 아닌데, 도대체 왜!
알고리즘이 나를 구원했다. 아니, 나를 망치러 온 구원자에 가까울까.
평소 눈여겨보던 경차가 연말을 맞이해 대대적인 행사를 한다는 광고를 보게 되었다. 최대 2백만 원 할인이라는 파격적인 조건이었다. 이미 생산된 차량이기 때문에, 무려 '온라인'에서 주문을 하면 쿠팡의 로켓배송처럼 며칠 안에 차를 받아볼 수 있다고도 했다. 인상이 센 D를 다시 꼬드겨 앞세울 필요도 없고, 쭈뼛거리며 누군가와 협상할 필요도 없었다.
물론, 덜컥 구매하진 못했다. 또 한 달을 꼬박 모니터 앞에서 고민하는 시간을 보냈다. '파격 행사'의 마지막 날이 되어서야 눈을 질끈 감고 주문 버튼을 눌렀다. '보태보태병'에 지독하게 시달린 터라, 오히려 내 차의 옵션은 덜고 또 덜었다. 덜지 말아야 할 것도 덜어버렸는데, 그중 하나가 내비게이션(+후방카메라)이다. 내비게이션이 있어야 할 자리엔 무려 '라디오'가 떡하니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것. 꼭 넣으라던 '터보 엔진'도 과감히 빼내고, 기본 중의 기본만 있는 자동차를 합리적 소비자 행세를 하며 고른 셈이었다. 물론 내비게이션과 터보 엔진은 꼭 보태야 하는 것이었다고 훗날 땅을 치며 후회하기 되지만, 아무튼 온라인으로 주문한 것 중 내 인생 가장 비싼 물건인(그러나 자동차 시장에선 가장 저렴한 축에 속하는) 내 첫 차를 그렇게 샀다. 사람들이 말했던 것처럼 '로켓배송'에 버금가는 속도로 내가 사는 빌라 주차장에 차가 도착했다.
이쯤되어서 고백하는 중요한 사실 하나.
'인생 첫 차'를 모는 '초보운전자'의 악세레다와 브레끼를 오가는 짜릿한 진짜 이야기는 아직 시작도 못했다는 것.
아무튼, 나의 인생 첫 차를 주차장에 세워둔 첫 날 나는 이렇게 말했던 걸로 기억한다.
"철과 알루미늄으로 된, 아주 커다란 텐트를 빌라 주차장에 펼쳐두고 집에 올라온 기분이야."
자, 이제 겁쟁이 초보운전자가 바퀴 달린 텐트를 움직일 차례다.
*AI 이미지 생성도구 DALL-E로 상상력을 더해 제작된 이미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