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결계, 혹은 마법진: 5개의 초보운전 스티커

도로 위에서 가장 위험한 짐승은 나니까

by 김슬기 Feb 25. 2025

퀴즈. "아침엔 한 개인데, 저녁엔 다섯 개 인 것은?"

정답. 내 초보운전 스티커.


차가 출고되기 전에 쿠팡에서 자석으로 된 초보운전 스티커를 미리 주문해 두었다. 초보운전 스티커도 종류가 많았는데, 숙고 끝에 거북이 그림이 그려져 있고 '초보운전' 네 글자가 크게 쓰여 있는 것으로 샀다. 빌라 주차장에 차를 세워두고, 나는 시트 비닐을 벗겨내는 것보다 더 우선해서 초보운전 스티커를 붙였다. 반듯하게, 꾸미기 스티커를 붙이는 그런 마음으로.


그렇게 덜렁 스티커 하나만 붙이고, 지인의 도움을 받아 첫 차로 대망의 첫 운전을 끝냈다. 핸들을 쥔 손에 땀이 흥건했고, 액셀과 브레이크를 밟는 오른쪽 발목이 시큰거렸다. 무엇보다 멘털이 와장창 깨졌다. 정글 같은 도로 위의 공사다망하신 운전 선배님들은 나무늘보처럼 도로를 기어가는 초보운전자에 자비를 베풀 여유가 없었을 터였다. 혼잣말로 '죄송합니다'만 백 번쯤 외쳤다. 혹독한 신고식을 치른 뒤 차에서 내리고 나서도 '빵-' 하는 클랙슨 소리가 환청처럼 들리는 것 같았다.


"자비가 더 필요해."


다이소에 갔다. '국민 초보운전 스티커'를 판다는 이야기를 들었기 때문이었는데, 한 장에 단 돈 천 원이었다. 나는 거기서 초보운전 스티커를 네 개나 추가로 더 구입했다. 즐겨하던 다이소 신상품 구경도 하지 않고 곧장 집으로 돌아왔다. 쿠팡에서 산 거북이 스티커 하나, 다이소표 스티커 넷. 총 다섯 개의 초보운전 자석 스티커를 골고루 붙이기 시작했다. 후면 좌우에 각각 하나, 운전석과 동승석 문 쪽에 또 각각 하나. 그리고 보닛 위에 하나. 사방에 완벽한 '결계' 혹은 '마법진'을 부착한 격이 되었다. 내가 기댈 수 있는 건, 운전 선배님들의 자비밖에 없으므로. 정성을 다해 어필하는 수밖에!


기분 탓인진 모르겠지만, 사방에 '초보운전 스티커'로 결계를 친 이후 운전이 조금 순탄해진 것 같기도 했다. 끼어들기 타이밍을 못 잡아 쭈뼛거리고 있는 나에게 속도를 한껏 늦춰주는 차량이 있는가 하면, '빵빵' 재촉하는 경적 소리도 덜 듣게 된 것 같았다. 아직 세상은 살만하구나, 도로 위의 선배님들이 바빠서 그랬지 초보운전을 미워하는 건 아니구나, 하고 안심하고 있던 때 친구 A가 말했다.


"배려가 아니라, 무서워서 피한 거 아닐까? 이렇게 사방에 초보운전 스티커를 붙이고 있으면... 나 같아도 무서울듯한데."


졸지에 도로 위에서 가장 위험한 짐승인 나무늘보가 되어버렸다. 하긴 그 말도 맞다. 어디로 튈지 모르는 서툰 운전 실력을 가졌으니, 가장 위험한 게 맞고, 도로의 흐름에 몸을 실을 마음의 여유 따윈 없어 아주 느리게 기어간다. 그러니 나무늘보가 맞지. 나는 보닛 위에 붙어 있는 까만 바탕에 노란 글씨로 된 초보운전 스티커라도 떼야 하나 한참을 고민했다. 주차장에 가만히 세워져 있는 차, 그것도 보닛에 붙은 초보운전 스티커라니 조금 부끄럽기도 했다. 이웃들이 지나다니며 수군거릴 것 같기도 했다. 아무도 뭐라 하지 않았는데 얼굴이 화끈거리는 기분이었다. 


나는 다섯 개의 초보운전 스티커를 당분간은 유지하기로 했다. 다른 운전자들을 공포에 떨게 하는(?) 무시무시한 결계가 되었든, 절로 마음에서 자비를 베풀게 만드는 부적이 되었든, 나는 그 도로 위의 '관종'이 되는 편이 훨씬 안전하다는 판단에서였다. 그렇게 생각하니, 약간은 초보운전자로 관심받는(그리 유쾌하진 않을 테지만) 이 시간도 나쁘진 않을지도.



에필로그: 3일 뒤, 한 세차장.

집과 가까운 주유소 세차장에 갔다. 자동 세차 기계에 들어가기 전, 세차장 직원분이 고압수를 차 전체에 쏘아주고, 거품 솔질을 해주는 곳이었다. 다섯 개의 초보운전 스티커를 붙이고, 어색하게 세차 대열에 합류하자 요청하지 않았는데도 직원분이 와서 세차 방법에 대해 설명해 주셨다. 기계에 들어가기 전, 사이드미러는 접고, 기어는 중립, 절대 브레이크를 밟지 않는다. 모든 것이 새롭고 낯선 경험들. 나는 직원분이 알려준 내용을 혹여나 잊고 실수를 할까 봐 계속해서 사용 방법을 마음속으로 되뇌었다.

촤아-

굵고 날카로운 물줄기가 자동차 이곳저곳에 부딪히며 때를 벗겨내는 소리가 들려왔다. 내가 직접 차를 몰고 세차장에 와서 세차를 하다니! 어른이 된 지 한참인데도, 퍽 어른이 된 것 같은 기분에 사로잡혀 있는데 동승석 쪽에서 불길한 노크 소리가 들려왔다.

똑똑똑.

내가 뭔가 실수를 한 것인가. 당시의 나는 창문 내리는 버튼에도 익숙하지 않았다. 잘못하여 뒤쪽 창문을 한 뼘쯤 내렸다가, 다시 닫고 동승석 쪽 창문을 내렸다. 꾸물꾸물, 반쯤 내려간 창문 사이로 세차장 직원분이 물이 뚝뚝 떨어지는 뭔가를 건넸다.

"물 뿌리다가 이 스티커들이 다 떨어졌네요."

"죄... 죄송합니다. 아니 감사합니다. 이게 약하네. 아하하하하."

기어는 중립, 브레이크에서는 발을 떼고. 나는 거대한 식기세척기 같은 세차 기계에 아주 천천히 빨려 들어갔다. 물이 뚝뚝 떨어지는 초보운전 자석 스티커 세 개를 손에 쥐고. 눈을 질끈 감았다. 고작 물줄기 한 번에 사방팔방 날리는 나의 결계, 나의 부적들을 생각하니 부끄러움은 온전히 내 것이었다. 결계고 부적이고, 자비고 두려움의 대상이고 나발이고. 얼른 도로에서 눈에 띄지 않는, 흐름에 몸을 싣는 여유로운 드라이버가 되고 싶었다.



*AI 이미지 생성도구 DALL-E로 상상력을 더해 제작된 이미지입니다.









이전 05화 자동차를 사보자

브런치 로그인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