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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암사자 Jan 25. 2023

평소에 글 안쓰는 작가 특징

<소설 쓰고 앉아있네> 4화. 평행이론


학창시절, 나는 공부를 열심히 하는 ‘상상’을 할 때 행복했다. 공부를 할 때 행복하면 변태(?)니까 당연한 소리 같겠지만. 아무튼 실제로 행동했을 때보다 상상할 때 즐거운 것 중 하나가 나 자신의 공부하는 모습이었달까. 스탠드 불이 켜진 책상에 앉아 밤이 늦도록 어려운 문제들을 풀어 나가고, 문제집 위로 코피가 한두방울 똑똑 떨어지면 고개를 젖히는 그런 열정맨 같은 모습을. 그런 모습을 과몰입해 상상하다보면, 아무도 인정해주거나 칭찬해준 것도 아닌데 혼자서 어깨가 으쓱댔다. 


물론 그 상상이 현실이 된 적은 없다. 수험생활 3년 동안 한 번도 코피 난 적이 없고, 친구들의 기억속에도 잠 많은 친구로 남게 됐다. 수업을 듣거나 참고서를 쳐다보면 쏟아지는 졸음을 참기 어려웠고, 의지박약 수험생이었던 나는 반성의 눈물 대신 흥건한 침을 잔뜩 흘렸다. 자고 또 잤다. 


그런 의지박약, 상상으로만 공부하던 학생이던 나는 기숙사에서 수험생활을 했었다. 명절이나 긴 연휴를 맞아 집으로 돌아가는 때가 되면, 나는 또 특유의 상상력을 발휘하곤 했다. 기숙사나 학교에서는 잠만 자고, 꿈만 꿨지만 왠지 집에서는 공부를 잘 할 수 있을 것 같은 그런 확신이 들었다. 잠도 자지 않고, 엄마가 깎아다 준 조각 사과를 포크고 집어 먹으며 불굴의 의지를 가지고 참고서를 넘기는 상상 속의 나 자신의 모습이 얼마나 대견하던지. 그렇게 나는 기숙사 방 안에 있는 책꽂이에 있는 거의 모든 참고서와 교과서, 문제집, 오답노트로 정리하기에 너무 많이 틀려버려 손도 대시 못한 지난 시험지, 꼭 들어야 할 인터넷 강의 목록 등을 주루룩 적어둔 노트까지 바리바리 쌌다. 고작 2박 3일 정도 밖에 되지 않는 연휴 기간을 위해 짐을 싸다보니, 기숙사 책장이 반쯤은 텅 비었다. 


책으로 가득한 캐리어를 끌고, 집으로 향하는 버스 정류장으로 향했다. 바퀴달린 가방인데도, 끌고 가는 것부터가 고역이었다. 버스가 도착하고, 캐리어를 들어올리는데 와지끈하고 손잡이가 부러졌다. 손잡이 없는 캐리어를 힘겹게 들고 40분 거리의 집까지 낑낑대며 갔다. 결론은, 들고 간 책의 한 권은커녕 ‘한 장’도 보지 못했다. 연휴마다 이런 일은 반복됐다. 지금 생각하니, 적어도 체력은 늘었을 것 같다. 그 때의 나는 무척 건강했던 것 같은데, 잘 자고, 잘 먹고, 가끔 근력 운동을 해서 그런 것 아니었을까. 


미련한 수험생은 졸업을 하고, 대학생이 되고, 직장인이었다가, 이제는 글 노동자가 되었다. 쏜 화살 같이 빠르게 시간이 지난 것 같지만, 그동안 많은 사람들과 시간이 알려준 것들로 조금씩 성장하는 어른이 됐다. (방금 주마등처럼 지난 시간들이 스쳐 지나갔는데, 눈물 약간 찔끔) 


어른이라는 단어가 전혀 어색하지 않은 그런 나이 한 가운데, 나는 명절 연휴를 맞아 서울에서 고향집으로 향하는 기차역으로 향했다. 많이 성장하고, 변했고, 어른이 된 나의 어깨는 가방의 무게에 짓눌려 결려온다. 맥북, 아이패드, 애플펜슬, 지금껏 계속 미뤄온 교정지 한 묶음, 읽으면 정말 좋을 멋진 소설책 3권과 한 달 동안 공부해도 시간이 모자랄 소설 작법서와 아이디어 노트까지 챙겼다. 밀리의서재(전자책 구독 서비스)에는 명절에 읽기 좋은 책 목록을 가득 내 서재에 담았다. 가방에 여벌 옷은 하나도 넣지 않았으면서. 욕망의 가방을 들고 서울역으로 향하면서 나는, 또 상상했다. 기차 안에서 멋지게 노트북을 두드리며 글을 쓰는 나, 책을 읽는 나. 고향집에서도 시간을 쪼개 글을 쓰고, 책을 읽고, 고뇌하는 나의 모습을. 


버스, 택시, 기차, 비행기… 가릴 것 없이 탈 것들에서 멀미를 하는 나는, 기차 안에서는 노트북을 아예 꺼내지도 못했다. 고향집에선 의자에 한 번 앉지 않고 와식 생활을 하며 시간을 흘려보냈다. 다만 10대 시절과 다른 것은, 내가 이럴 거라는 것을 어렴풋이 알고는 있다는 사실이다. 하지만 상상 속에서만 존재하는 성실한 ‘나’의 모습에 대한 그런 일말의 희망을 갖게 했고, 또 힘겹게 이사에 가까운 이동을 했다. 인간은 같은 실수를 반복하는데, 그것도 아주 오-래 반복한다는 사실을 어깨 아프게 느끼면서. 


올 해는 부디, ‘평소’에 잘하고 연휴나 여행은 가벼운 몸으로 훌훌 떠날 수 있는 날들이 많아지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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