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암사자 Feb 07. 2023

작업실병이 재발했다

<소설 쓰고 앉아있네> 6화. 작업실병


소설을 쓸 새로운 소재가 떠오르지 않거나, 그동안 써왔던 소설의 진행이 허리쯤에서 콱 막혀버렸다거나, 단편으로 써둔 글을 수정해야하는데 도저히 나아질 기미를 보이지 않는 때 등. 집중해서 키보드를 두드리기 힘들어질 때면, 집에서 작업하는 나는 집안 곳곳에 미뤄둔 일들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한다.


빨래통에 가득찬 빨래를 세탁기에 붓고, 설거지를 하고, 방을 쓸고 닦고, 화장실의 물때를 닦고. 평소엔 귀찮게만 느껴지는 일들이 손에 착착 감긴다. 시간도 숭덩숭덩 잘만간다. 그렇게 안 해 먹던 ‘집밥’까지 살뜰히 해먹고, 상쾌한 집에 앉으면 뉘엿뉘엿 해가 진다. 퇴근할 시간이다. 노트북의 글 편집 프로그램을 끄고, 넷플릭스를 켠다. 글 노동자로 제대로 한 일은 없어도, 정시 퇴근하는 루틴은 꼭 지킨다. 루틴 중 유일하게 살아남은 것과 함께 하며, 또르르 흐르는 눈물을 닦는다. 


이런 날을 며칠 보내고 나면, 어김없이 작업실병이 도진다. 네이버 부동산 매물, 사무실 구하는 앱 ‘네모’, 자취방 구할 때 유용한 ‘다방’, ‘직방’ 같은 플랫폼을 기웃거리며 시간을 보낸다. 지갑 사정이 넉넉하지 않은 작가이니, ‘진짜’로 희망하는 조건을 입력하면, 서울 도심에서 검색되는 작업실(사무실) 매물의 수는 0건. 간신히 하나 검색되더라도, 흡사 범죄 현장을 연상케 하는 지하 창고 뿐이다. 보정이 잔뜩 된 사진이라도, 벽에 핀 곰팡이들이 가려지지 않는 그런 지하 창고.


하는 수 없이 범위를 넓혀 검색한다. 보증금 500에 40만 원짜리 작업실 하나를 발견한다. 서울 시내에서 이런 조건의 매물을 발견하기란 쉽지 않다는 걸 알기에, 작업실병 말기인 나는 가방을 챙겨 얼른 부동산으로 향한다. 부동산 사장님은 이런 조건에 얻기 쉽지 않다며, 잘 찾아왔다며 나를 칭찬해준다. 작업실을 찾기 위해 혈안이 되어있던 시간을 떠올리며, 칭찬으로 작은 보상을 받은 마음에 어깨를 으쓱대는 것도 잠시. 나는 500에 40 작업실의 실체와 마주한다. 냉랭하고 으슥한 복도, 상가 건물이라기엔 부담스럽게 고요한 건물, 에베레스트를 등반하듯 가파른 계단을 세 개 층은 올라야 마주할 수 있는 화장실 등. 이런 조건에 얻기 쉽지 않다는 말이 다른 의미로 와닿는다. 또다시 또르르 흐르는 눈물을 닦아낸다.


하지만 겨우 이까짓 일로 나을 작업실병이 아니다. 아무리 열악하더라도 ‘집보단 낫겠지’ 하는 생각 때문이다. 어려운 시절을 보내고 유명해진 작곡가, 미술가, 소설가 모두 처음부터 좋은 곳에서 작업하진 않았다. 열악하더라도, 나만의 작업실에서 작품을 써내려간다면 왠지 그들처럼 멋진 결말을 맞이할 것만 같다. 부동산 사장님께 집에서 아주 조금만 고민해보겠다고 약속하고 집으로 발걸음을 옮긴다. 작업실을 구해 생활할 돈을 셈해보기 위해 통장 잔고를 조회한다.


통장(35, 무직)
안녕하새오. 텅장입니다.
작업실은커녕 생활비도 간당간당합니다.
꿈 깨새오.


불치병일 것만 같던 작업실병이 깨끗이 낫는 순간이다. 갑자기 집이 아늑해보이고, 작업도 그럭저럭 잘 될 것만 같다. 가격대비 괜찮아보였지만, 결코 좋은 조건은 아니었던 작업실도 기억에서 희미해진다. 식탁으로 쓰던 작업 테이블 앞에 앉는다. 아주 잠시 집중해 끊어졌던 글을 이어나간다. 역시, 장인은 장비 탓을 하지 않는 법, 하며 길지 않은 시간을 보낸다. 


그러다 며칠이 채 지나지도 않은 때, 또 새로운 소재가 떠오르지 않고, 소설의 흐름이 막히고, 수정을 할 수 없게 되자 스멀스멀 번져오는 작업실병... 무한루프에 갇혔다. 가난한 작가는 어떻게 해야 작업실병에허 헤어나올 수 있을까. 엉엉. 오늘은 대성통곡이다.




작업실병?
주로 집에서 작업하는 작가들에게 주기적으로 발병하는 증상으로, 작업시 집중력 저하, 아이템 고갈, 창의력 부족, 자신감 하락 등을 모두 ‘작업실 없음’을 원인으로 삼는 특징이 있다. 이들의 상당수는 개인 작업실만 있으면 이 모든 증상을 극복하고, 엄청난 대작을 쓸 수 있을 것이란 무근본 신념을 가지며, 작업 시간의 상당 시간을 부동산 매물 구경에 투입한다. 치료법은 따로 없으나, 보통 ‘텅장’ 확인 후 자연치유 또는 호전되는 경향이 있다.
매거진의 이전글 혼자 글 쓰면 외로울까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