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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암사자 Feb 14. 2023

시작은 창대하지만, 끝은 미약한 것은?

<소설 쓰고 앉아있네> 7화. 용두사미

시작은 창대하지만, 끝은 미약

내가 하루 하루 만들어내는 매일의 소설들은 ‘시작은 창대하지만, 끝은 미약’하기 그지없다. 소설의 초반은 놀랍다. 엄청난 대작의 기운을 풍기는 것만 같아, 글을 쓴 내가 봐도 두근거릴 때가 있다. 그런데 문제는 잘 쓴 부분만 계속 다듬게 된다는 거다. 뒷부분은 점점 대작과는 멀어진다. 개연성은 제로에 수렴하고, 기본적인 문법도 틀린 오탈자 투성이에, 소위 '급마무리'가 된다. 누군가 죽거나, 주인공이 시시한 깨달음을 크게 얻는 식의 것들.


용의 머리로 시작해 뱀의 꼬리로 끝나는 소설들의, 머리만 쓰다듬는 날들이 여럿 지났다. 나도 무슨 잘못을 저지르는 줄 알지만 습관적 행동을 반복하다 문득 이런 생각이 떠올랐다.


‘어? 이 상황 뭔가 익숙한데.’


나는 대표적 수학 포기자였다. 고등학교 시절 수학 과목에선 거의 전교에서 꼴찌였다. 마음 좋은 수학 선생님이 하위권 학생들 몇몇에게 주말 수업을 해주겠다고 한 적 있으나, 그마저도 도망다니느라 바빴다. 포기할 수만 있다면 냉큼 포기하고 싶은 수학은 꼴보기 싫은 존재였다. 하지만 대학엔 가야했고, 수능은 거쳐갈 수 없는 이벤트였다. 나는 꾸역꾸역 자리에 앉아 수학 공부를 '하기는 했다.' 그 결과, 나의 수학 참고서는 앞 부분만 새까맣게 변했다. 너무 어렵게 느껴지는 수학이었지만, 앞 부분은 그나마 쉬운 부분이어서 그럭저럭 이해가 되었고, 이해가 되는 부분은 계속 보면 볼 수록 이해가 더 되었고, 나름의 애정을 가지게 될 정도였다. 나는 수학의 '집합 마스터'가 되었고, 불행일지 다행일지 ‘극히 일부분만 공부한‘ 수학 포기자로 졸업을 했다. 하하.


노트들의 운명도 그랬다. 체계적이거나 계획적이라는 단어들과 거리가 멀었던 나의 노트들은 늘 앞 몇 장만 끄적이다가 방치되는 때가 많았다. 필기들이 그랬고, 일기가 그랬고, 아이디어 노트들이 그러했다. 한 권의 책처럼 멋진 필체로 채워진 노트를 갖는 건 '꿈'과 같은 일이었다. 완벽한 노트를 갖고 싶은 나는, 노트의 앞장을 뜯고 새로운 주제의 노트로 사용하곤 했다. 이런 날들이 반복되다보면 결국 이가 빠진 것처럼, 원형 탈모가 온 것처럼 허전하게 반토막이 된 노트들만 남는다. 반쯤 뜯겨져 나간 사연 많아 보이는 노트들은 이사 때마다 재활용 수거함으로 골인.


운동도 마찬가지였다. 비장한 마음으로 운동을 등록하러 간다. 등록하는 날 모든 운동할 짐들을 싸들고 갔기 때문에, 나는 운동을 한다. 그것도 아주 열심히. 국가대표가 된 마음으로 운동을 하고 나면, 그 다음날엔 어마어마한 근육통이 찾아온다. 내 몸을 보호하기 위해 일단 하루 결석. 피로가 누그러지는 그 다음날이 되면 입맛이 싹 돈다. 과식을 하고, 배가 아플까봐 운동을 가지 않고... 이러다보면 나는 다시는 헬스장을 찾지 않게 되는 것이다. 건강을 얻지 못했지만, 체육 산업의 발전에 또 한 번 이바지했다는 뿌듯함만 남는다.


의지박약, 용두사미로 살아온 날들이, 그리고 내가 지금 쓰고 있는 소설들은 주인을 잘못 만나 박복한 운명을 타고난 것 같다. 그래도 나는 뭐든 계속한다. 살아간다. 뱀의 꼬리 같은 결말일지라도 시도를 하고, 또 하고, 또 하고, 하고, 하고, 하고 또 하다보면, 꽤 많은 뱀의 꼬리를 만들게 된다. 만들어 놓은 것들을 주워다가 꼬리를 이어붙이고, 붙이고, 붙이고, 붙이고, 붙이다보면 용의 꼬리 비슷한, 개성 있는 무언가가 되곤 하기 때문이다. 콩나물 시루에 물을 붓고, 그 물이 다 아래로 쏴아- 떨어져도 결국 콩나물이 자라는 것처럼. 그렇게 아주 조금 자란다. 창대한 시작과 미약한 끝이 여러번 모여, 인생 전체를 놓고 보면 미약한 시작과 창대한 끝처럼 보이지 않을까 하고.


오늘도 완벽하게 정신승리를 완료했다.

사는 건 결국 의미 부여하기 나름이니까.

나는 또 다시 용두사미 소설을 쓰러 간다. 총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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