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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슬기 Feb 15. 2023

외로움은 가장 완벽한 형태의 희망인지도 몰라.

그림책 <52헤르츠>와 함께

"너는 눈이 높아서 연애를 못하는거야."


A는 친구들과 마주 앉은 식탁에서 혼이 났다. 요 몇달 사이 소개팅을 세 번이나 했는데, 단 한 명과도 이어지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친구 B는 그 중 한 명을 건너건너 소개 시켜줬던터라, 더 답답해했다. B의 말에 따르면 상대는 A를 꽤 마음에 들어 했는데, A가 한사코 애프터를 거절했노라고. B는 A가 연애를 못하는 이유를 '눈이 높아서'라고 콕 집어 지적했다. 4인용 식탁에 함께 앉아 있던 다른 친구 둘도 그 말에 힘을 보탰다. 다른 친구 둘엔 나도 포함돼 있었다. A는 소개팅 상대들과 이어지지 않은 이유에 대해 더 상세한 상황과 조건들을 덧붙여 설명하려 애썼다. 모든 항변이 '눈이 높아서'란 말들에 튕겨져 나왔다. 튕겨져 나온 단어들에 A의 마음에 구멍이 숭숭 뚫렸다. 그 구멍 사이로 차갑고 날카로운 바람이 비집고 들어갔을테다. 


52 헤르츠 고래(52-hertz whale)가 있다. 아직 사람에 의해 목격된 적은 없는, 주파수로만 확인된 고래로 알려져 있다. 앞에 52 헤르츠가 붙은 건, 그 고래가 다른 고래 종의 울음소리 주파수보다 훨씬 높은 주파수, 그러니까 '다른 고래들은 듣지 못하는 주파수'를 낸다는 특징 때문이다. 52 헤르츠 고래 소리는 여러 마리나 무리이기보단 한 마리로 추정되어, 세상에서 가장 외로운 고래로 불리기도 한다고. 같은 고래종이 듣지 못하는 소리를 내며, 깊은 바다를 떠도는 고래에게 '외로움'이란 단어는 어쩌면 가장 어울리는 단어인지도 모른다.


그림책 <52헤르츠>는, 세상에서 가장 외로운 고래에 대한 이야기를 그려냈다. 아무리 외쳐도 다른 고래들은 듣지 못하는 소리를 내는 수 밖에 없어, 가족들과도 헤어지게 되고 첫 눈에 반한 다른 고래와도 다시는 만나지 못하게 된 그런 외로운 고래에 대한 이야기다. 하지만 고래는 외로움 때문에 절망하거나, 혼자만의 세계에 스스로를 가두지 않는다. 대신 '언젠간 내 노래를 들어주는 친구, 마음이 통하는 친구 하나쯤은 있을 것'이란 기대를 품고 깊은 바다를 떠돈다. 


https://youtu.be/nDqP7kcr-sc



책을 덮고 나서, 유튜브에서 'Whale sound'를 검색해, '8시간짜리 심해 고래 소리'를 재생했다. 내가 앉아 있는 작은 방이 순식간에 넓은 심해가 되었다. 먹먹한 물 소리 아래에 잠겨, 알아듣지 못하는 고래 소리를 무한 반복해 들으며 생각했다. 누구도 알아 듣지 못하는 소리를 내는 외로운 고래, 사실 우리 모두가 그런 외로운 고래가 아닐까 하고. 다만, 외로움에 스스로를 가두느냐, 아니면 내 목소리를 들어줄 유일할지 모르는 단 한사람을 위해 먼 여행을 떠나느냐 그 차이 뿐인 건 아닐까하고.


너무도 분명하게도, '나'라는 외로운 고래는 완벽한 친구를 찾는 여행을 떠나기보단, 지레짐작으로 포기하고 스스로를 가두는 편이었다. 내 주변에 있는 적당한 누군가와 알아듣지 못해도 억지 미소 지으면서, 다 이해한 척 하고, 잘 통하는 체 하면 되었다. 그건 우정이나 연애, 사회적 관계 모두에 해당되었다. 틀린 것은 아니지만, 무척이나 쉬운 방법이었다. 외로움은 '당연히' 해결 될 수 없는 것이라고 문제를 덮어놓고, 소란스러운 가운데를 유영하며 살아왔다. 


A를 다시 생각한다. A는 아직, 자신의 노래를 들어줄 사람을 찾는 여행 중이다. '눈이 높다고' 치켜올리는 듯 상대를 깎아내리는 말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A는 자신만의 멋진 여행을 하고 있는 것이다. 어쩌면 당신의 인연이 먼 곳에 있을지 모른다는 한 결혼정보업체의 광고 카피처럼, 나 또한 A에게 조금 느리고 먼 여행을 떠나는데 도움이 될 지지와 응원을 해줘야 했는지도 몰랐다. 


현실에 타협해 다 곪아터진 외로움을 없는 척, 묻고 사는 것보단 A처럼 고고하게 자신만의 외로운 여행을 떠나는 편이 훨씬 낫다. 적어도 자신에게 운명 같은, 완벽한, 자신의 목소리를 오롯이 알아들을 수 있는 인연을 찾을 수 있다는 희망이 있으니까.  


나도 내 목소리로 노래하며 깊은 바다를 향해 떠날 여행을 시작해야겠다. 

가장 완벽한 형태의 희망인 외로움을 품고서.




마르틴 발트샤이트 글/그림 <52헤르츠: 세상에서 가장 외로운 고래>를 읽고 든 생각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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