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책 <불행이 나만 피해갈 리 없지>와 함께
감당하기 힘들 정도로 슬플 때가 있다. 불안의 한가운데 있지만, 기댈 곳 없이 휘청이는 때도 있다. 아무도 나의 슬픔이나 불안을 실질적으론 나눌 수 없다는 사실을 직면한다. 그런 때면 늘 함께야, 약속했던 모든 가까운 관계들에 회의감이 든다. 탓하고 원망할 기운이 남아 있다면, 함께 슬픔을 나누자 약속했던 관계들에 화살을 돌리지만 그럴 힘조차 남아 있지 않은 때는 철저한 외로움과 고립감을 느낀다. 만석인 카페에 앉아 커피를 마셔도 느긋할 수 없고, 시끌벅적한 시장 한복판을 걸어도 홀로라는 사실에 몸서리가 쳐진다. 행복하지 않는 순간을 꼽는다면 이런 때다. 불행이라는 단어를 때때로 직면하는 순간들이다.
이런 때엔 가까운 사람들과 잠시 멀어지는 편이 낫다. 드러내놓고 하소연을 해보아야, 모든 일을 이해받지 못할 뿐더러, 가까운 사람들의 감정 쓰레기통도 쏟아지기 직전이기에 내것까지 가져다 부으면 언제 흘러 넘쳐도 이상하지 않다. 그런 단점들을 상쇄시킬만큼 위로가 크지 않다는 것이 가장 큰 이유긴하다. 이 또한 지나가리라, 하는 마음으로 단것을 좀 먹으며 깊은 수렁에 있는 동안 살도 더 찌우고, 손에 잡히지 않던 일을 완전히 놓아버리는 방법들을 쓰며 나를 살살 달래며 버티는 수 밖에 없다. 계속해서 되뇐다. 신이 있는지 없는지 모르지만, 이번엔 신의 장난이나 시험이 내 차례에 미쳤구나 생각하며. 공평한 신이 만든 세상에서 불행은 결코 나만 피해가지 않는다고. 그렇게 생각하면 괴롭고 외로운 시간들이 버틸만한 어떤 것이 된다.
책을 통해 타인의 확실한 불행과, 그 불행으로 벌어지는 일들을 ‘읽는’ 것은 어찌보면 이런 과정에서 가장 큰 위로다. 소설은 주인공의 확실한 불행을 담보한다. 나는 불행할 때마다, 우울할 때마다, 외로울 때마다 나와 비슷한 처지에 있을 주인공의 이야기를 찾아 읽는다. 주인공이 속한 세계에서 함께 울고, 부서지고, 때때로 구원 받으면서 나도 다시 일어설 용기를 얻는다. 불행이 나만 피해갈 리 없고, 우리는 함께 불행을 겪는 동료로 세상을 살아간다는 위안이다.
오늘도 소설을 쓰다가 잠시 괴로웠다. 세상에 존재하지도 않은 주인공의 삶을 생각하다 가슴이 저릿했다. 나이와 성별과 거주지가 다른 ‘나’이기도, 내 주변의 아픈 사람이기도, 세상 어딘가에 존재할 법한 그 주인공의 삶을 만들어내다보면 때때로 회의감이 든다. 소설이 아니더라도, 우린 충분히 때때로 불행해야 했고, 세상엔 내가 절대 겪고 싶지 않은 슬픔을 이겨내야 하는 실제하는 사람들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나는 확실한 불행을 가진 주인공들의 이야기를 계속 쓰기로 한다. 슬픔의 바다에 잠겨 숨조차 쉬지 못하던 더 어린 시절을 떠올리며 쓴다. 더 많이 새로운 사람들과 상황들을, 그로 인해 더 높은 확률로 불행과 맞부딪히게 될 사람들을 생각한다. 모두가 아니더라도, 몇몇에게 위로가 되는 글을 남기고 싶다. ‘나에게만 왜 이런 일이’ 생각하다, 마음이 상하고, 곪아 세상을 떠나는 일이 없었으면 좋겠다. 허접한 내 글이 그 곪은 마음에 연고가 되었으면 좋겠다.
정미진 <불행이 나만 피해갈 리 없지>를 읽고 든 생각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