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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슬기 Apr 18. 2023

과분한 업무가 사라졌다

초단편 소설 #5 화요일

이 부장의 책상 정리엔 꽤 오랜 시간이 걸렸다. 이 회사에서만 20년이었다. 회사가 성장하며 두 번의 이사를 했다고 하지만, 이 부장의 자리엔 20년의 세월이 켜켜이 쌓여 있었다. 마치 원래 그 자리에 있었다는 듯 단단히 늘어붙어, 닦으려 해도 쉬이 닦이지 않는 오래된 먼지들. 명예롭지 않게 떠나야만 하는 그에게 책상 정리란 마치 그런 질긴 것들을 정리하는 의미와도 같았다. 한 때는 그의 물건이었다가 쓰레기가 된 것들이 75L 종량제 봉투를 가득 채웠다. 되가져갈 짐이라곤 작은 사과 박스 하나 뿐인 그는,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아 보이는 것 같은 빈 책상을 물티슈로 닦고 또 닦는 중이었다.


"부장님 바쁘실텐데, 이만 들어가시지요. 책상은 이만하면 깨끗하게 치우신 것 같은데..."

"...그런가?"


더이상 바쁠 일이 없는 이 부장은 멋쩍은 표정을 지으며 뒷정리를 부탁한다는 말을 남기고, 단촐하게 짐을 챙겨 떠났다. 승규는 이 부장이 쓰던 책상을 살폈다. 그의 자리는 반질반질하게 윤이 날 정도로 깨끗하게 정리돼 있었다. 전문 청소 업체도 이토록 구석구석 깨끗하게 닦아 놓지 못했을 것만 같았다. 커다란 종량제 봉투만 치우면 더이상 정리할 것은 없어보였다. 승규는 종량제 봉투를 옮기기 위해 낑낑대다가, 잘못하여 엎었다. 종량제 봉투 안에 있던 것들 중 일부가 바닥에 나뒹굴었다. 그 중엔 이 부장이 마지막 출근, 그러니까 오늘 아침에들고 온 오래되어 낡은 서류 가방도 함께였다.


휴게실에서 승규는 진철을 마주쳤다. 진철은 머그컵에 먼저 내린 원두커피 한 잔을 승규에게 건넸다.


"이 부장님 가셨어?"

"응. 정리를 몇 시간째 하기에 좀 신경쓰여서 이만 가시라고 넌지시 말했더니, 방금 가셨어. 정리는 진즉에 끝내놓고 빈책상만 닦고 계시더라."

"케파 프로그램이 뭔지... 난 가끔 그게 진짜 정확한지 의심스럽기도 해."

"능력 없는데, 누구 눈에 잘 들어서 월급 많이 받고 하는 시대보다 백번 덜 의심스럽다고 봐."

"아무리 그래도 우리가 기계도 아니고... 아니 어떤 때는 죄수 같아. 업무 할 때 이름보다 숫자가 먼저 불릴 때 마다 그래. 중동 해외 개발 프로젝트 담당자 85포인트, 14일 6시간, 장모씨."

"완전 다른 말인데, 저번 중동 개발 프로젝트 공지 나왔을 때, 내 케파 포인트 얼마 나온지 알아?"

"글쎄. 중동 프로젝트 따낸 사람이 89포인트로 1등이었나? 유학파에, 좋은 학교 나온... 기억 났다. 89포인트, 2주 1시간, 스티브 킴. 너 케파 포인트 얼마였는데?"

"6포인트, 13년 2개월 9시간."

"와 대박. 13년? 누구는 2주에 처리하고, 누구는 13년 동안 해야하고... 근데 그 정도면, 이 부장보다 네가 먼저 회사 나갔어야 하는 거 아냐?"

"지금 하고 있는 프로젝트가 장기잖아. 그나마 그 프로젝트랑은 궁합이 잘 맞는지... 76포인트로 간신히 붙잡고 있다. 이 회사에서의 내 목숨줄도."


'케파 프로그램'은 5년 전 미국에서 '회사에겐 업무의 효율성을, 개인에겐 업무의 과분함을 사라지게 할' 센세이셔널 한 소프트웨어로 첫 선을 보였다. 전세계의 빅데이터 자료와, 한 개인의 업무 관련 모든 정보와 심지어 뇌파와 생체리듬 같은 바이오 측정 자료 등을 종합해 '특정 업무'에 대한 업무의 완성도와 예상 완료 시간까지 계산해 명확한 숫자로 보여준다. 업무 완성도는 포인트, 완료 시간은 프로젝트 시작 지정 시점으로부터 소요 시간을 일자와 시간으로 나타낸다. 'OOOO 프로젝트, 70포인트, 7일 3시간' 이런식이다. 철저히 업무와 관련해서는, 즉 회사 내에서는 완성도 지표인 포인트와 종료 일시는 모든 동료에게 투명하게 공개하는 것이 이 프로그램의 원칙이다. 완성도, 개인의 예상 업무 진행 프로세스 등 구체적인 '전체 정보'는 업무와 밀접하게 연관된 사람들만 열람할 수 있게 되어 있다.


한국에선 오랜 논의 끝에 2년 전 본격적으로 도입되기 시작했다. 사실 오랜 논의는 핑계에 불과했다. 정치인도 결국은 정치 관련 업무를 하는 직업인. 이를 도입하면 각 정당에서 밀고 있는 대선 후보들의 역량 측정까지 이뤄져, 어느 한쪽은 완전히 불리한 위치에 놓이게 되는 상황이었다. 결국 현재의 정권으로 바뀌고서야 케파 프로그램의 도입에 속도가 붙게 된 것이었다. '특정 업무 수행 능력 지표'라는 이름으로 각종 노동 관련 정책 등에 빠르게 반영되었고, 대표적으로 '해고'의 사유에 케파의 평균 수치가 근거가 될 수 있다는 조항이 추가됐다. 회사는 케파의 평균 수치를 근거로 한다면, 능력이 부족해 회사에 이득이 되지 못한 직원을 언제든 일방적으로 해고할 수 있게 됐다. 이 부장도 이를 근거로 한 해고를 당했다. 그는 회사가 담당하고 있는 모든 예상 프로젝트에서 평균 19.5 포인트라는 굴욕적인 숫자를 문신처럼 새기고 다녀야했다. 


케파 프로그램으로 역사적으로 유례 없던 강력한 능력주의 사회가 된 것은 분명해 보였다. 프로그램이 제시한 수치들의 실제와의 일치율은 98.99%에 달했고, 업데이트가 이뤄질 때마다 일치율은 더 올라갔다. 기업과 국가의 케파에 대한 신뢰도는 높아만 갔다. 학연, 지연 같이 인맥으로 이어지던 업무들이 자취를 감췄고, '사람을 갈아 넣어' 죽이되든 밥이되든 만들어낸 결과가 아닌, 그 일을 가장 빠르고 완전하게 처리하는 데 가장 적합한 인재를 찾아내 최선의 결과를 얻을 수 있게 된 것이었다. 과분한 업무와 부당 지시, 업무의 결과로 누군가를 탓하거나 비하하는 풍경도 서서히 옛 것이 되어가고 있었다. 


진철이 승규와 둘 뿐인 휴게실을 둘러보더니 조심스럽게 말했다.


"나 저번엔 진짜 그냥 궁금해서, 지난 토요일에 반대 시위에 한 번 나가봤어."

"그건 민주주의 사회에서 네 권리니까. 어차피 회사에서 네가 시위 나간 걸 안다고 해도, 케파 프로그램 따라서 철저히 업무 주고 월급도 줄텐데. 무슨 걱정이래."

"아니, 회사 눈치가 보인다는 게 아니라. 내가 들은 얘기가 있어서 그래."


용산 일대에선 하루가 멀다하고 시위가 이어지는 중이었다. 인간을 숫자로 보게하는 비인간적 프로그램 규탄한다! 승규와 진철이 일하고 있는 빌딩 건물에서도 창문을 열면 먼 곳에서 확성기를 통해 외치는 목소리가 종종 들리곤 했었다. 케파 프로그램을 통해 기업은 모든 업무 배분, 평가, 급여, 채용 등을 진행했다. 기업뿐만이 아니었다. 취업 전의 진로상담과 취업과 거리가 멀게만 느껴졌던 유치원 아이들까지 이런 평가 시스템으로 할 수 있는 일과 할 수 없는 일이 명확히 구분되기 시작했다. 혹자는 향후 몇 년 안에 직접 표를 행사하는 선거도 사라질 것이라 예상하기도 했다. AI가 자동으로 분석하고 추천하는 인물이 대통령, 장관, 국회의원 등의 자리를 맡게 되면서 막대한 선거 비용을 줄일 수 있다는 분석을 덧붙이면서.


진철은 자세를 더 낮추며 승규 가까이로 다가와 소근거렸다.


"너 저번에 여자친구한테 결혼하자고 프로포즈했다가 완전히 깨졌잖아."

"시위 얘기하다가 갑자기 그 얘긴 왜 꺼내고 그래."

"일단 들어봐. 이번에 프로포즈하다가 차인 것도, '더 케미' 때문이라 그랬지?"

"응. 반지 받고 감동의 눈물까지 흘려 놓고, 갑자기 '더 케미' 켜보라고 그랬다가 그 사달이 났지. 그건 아직 베타 버전인데도 맹신하는 사람들이 왜 이렇게 많은지."

"케파 프로그램 만든 회사에서 내놓은 거라 신뢰도가 상당해서 그렇지. 활용하는 데이터나 측정 방식이 완전히 다른데도... 아무튼그 시위에서 대학생 쯤으로 보이는 애 하나를 만났거든. 본인이 해킹 중개인이래. 걔가 뭐랬는지 알아?"

"뜸들이지 말고 그냥 본론부터 얘기해. 뭐, 케파가 해킹이라도 된대?"

"응. 너 귀신이네. 케파뿐만이 아니래. 세상의 모든 프로그램들을 모조리 다. 여기 명함도 주더라. 비트코인으로 비용 결제만 하면, 알아서 깔끔하게 만들어준다고."

"사기꾼인지 어찌 알고."

"본인 말로는 자기 본업이 이거 중개하는 일이고, 이 업계에서 신뢰로 먹고 산다고. 눈빛이 진실돼 보였어. 나 사람 잘 보는 거 알잖아. 물론 나도 걔가 무슨 말을 하는지 자세히는 이해 못한 건 맞지. 인공지능을 이용한 반자동화 시스템이라나 뭐라나. 사람이 직접 하지 않으니까 비용도 완전 저렴하다고 하고. 케파는 정부에서도 쓰는 거니까 감옥 갈 수도 있으니... '더 케미'만 손대봐. 속는 셈치고. 아무튼 너 여자친구 마음 돌려야하잖아. 올 해 안에 결혼하겠다며."


퇴근을 2시간 앞둔 시간. 승규는 진철이 준 명함을 꺼내 책상 위에 올려두었다. 별다른 정보 없이 빈 바탕에 QR 코드만 그려진 것이었다. 승규는 휴대폰 카메라로 QR 코드를 읽혔다. 사전 동의 절차 없이 승규의 휴대폰에 자동으로 '치트' 라는 앱이 설치됐다. 승규는 그 앱이 찜찜하긴 했지만, 무슨 일이 있겠냐는 마음으로 그것을 눌러보았다. 해킹하고 싶은 프로그램들의 목록이 상품처럼 진열되어 있고, 그것 중 하나를 선택해 비트코인으로 결제하면 자동으로 해킹이 진행된다는 간단한 설명이 붙어 있었다. 승규는 여러 상품 중 '더 케미'를 선택했다. 1건의 수치 조작에 드는 비용은 원화로 환산하면 대략 1만 원이 안되는 금액이었다. 서비스 결제 후 10분 안에 해킹 및 수치 조작이 완료되며 유효 시간은 6시간이었다. 승규는 아래 실제 고객들이 별점을 달아둔 '리뷰' 란을 살폈다. 칭찬 일색이었다.


KU9088** | 20회 째 서비스 이용중입니다. '더 케미' 신봉자들 늘어난 덕분에, 소개팅 성공률이 거의 100%에 가까워졌습니다. 그 덕분에 양다리, 삼다리, 사다리. 옛날 같으면 얼굴 반반한 사람들만 누렸을 호사를 제가 요즘 누립니다.


승규가 결국 결제까지 하게 된 건 아래 리뷰 때문이었다.


ZNDI109** | 지난달 결혼식까지 완료했습니다. '더 케미' 수치 98포인트로 맞춰두니, 상대가 두 말 않고 결혼하겠다고 했고요. 해킹 전 수치는 고작 11포인트였습니다. 이정도면 너도 이 여자한테 마음이 없는 걸 잘 알지 않겠냐 말하시겠죠. 네, 여자 배경 보고 결혼하는 건데 당연히 저도 사랑하지 않는 건 알죠. 그래도 쟁취하고 싶은 게 있으면 쟁취해야 되는 거 아니겠습니까.


결제가 완료되자마자, 메시지 한 통이 도착했다. '치트' 앱이 설치된 휴대폰을 통해 의뢰한 서비스-더 케미 희망 수치 반영 서비스-가 실행된다는 내용이었다. 휴대폰 화면이 제 멋대로 움직이길 반복하다가, 얼마 지나지 않아 평상시 배경화면으로 돌아와 멈췄다. 새로운 메시지가 도착했다.


의뢰하신 서비스가 실행 완료되었습니다. 유효 시간은 6시간입니다.


승규는 '더 케미' 앱을 실행시켰다. 지난 번 등록해둔 여자친구 혜은의 정보를 불러왔다. 1분 간의 데이터 분석 화면이 이어진 끝에 승규의 휴대폰 화면엔 혜은이 결혼을 승낙할 수 있을만한 수치가 떴다.


95포인트! 상위 1%의 사랑을 보유한 당신. 상대를 향한 사랑은 그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습니다.


승규는 혜은에게 메시지를 남겨두었다. '더 케미'의 비공식적인 업데이트가 있었다는 거짓말을 했다. 그리곤 놀라운 결과를 받아들었다고, 오늘 저녁에 자신과 함께 근사한 저녁 식사를 하자고.


퇴근 후 만난 혜은에게 승규는 식당에 들어가기도 전에 '더 케미' 앱을 켜 건넸다. 혜은은 제자리에서 폴짝폴짝 뛰어가며 기뻐했다. 혜은의 앱으로 조회한, 그러니까 혜은의 승규에 대한 마음은 78포인트였다. 승규는 고작 20포인트에 불과했기에, 혜은은 결혼하려던 마음을 접었던 것이었다. 그러나 승규가 내민 점수는 95포인트. 혜은은 승규에 대한 불신이 완전히 사라지는 기분이었다. 혜은은 오늘의 식사는 포인트가 낮은 자신이 미안한 마음으로 사야한다고 주장했다. 1인당 식사비용이 15만원이 훌쩍 넘는 레스토랑이었다. 혜은은 기분 좋게 30만원이 넘는 돈을 결제했다. 승규는 굳이 득실을 따지고 싶진 않았지만, 고작 만원으로 혜은의 마음과 근사한 식사를 얻어 먹을 수 있다는 사실이 꽤 즐겁게 느껴졌다.


식사를 마친 둘은 자연스럽게 승규의 집으로 향했다. 들어오는 길에 와인숍에서 구매한 와인 한 병을 꺼내고, 몇 종류의 치즈와 과일을 접시에 담으며 혜은은 끊임없이 그동안 자신이 보여왔던 시큰둥함에 대한 변명을 늘어놨다. 케파 포인트가 높아, 회사에서 여러 프로젝트를 맡아 시간적으로나 체력적으로 여유가 부족했다는 것이 주요한 이유였다. 사실 이 말은 변명만은 아니었다. 혜은은 능력있는 사람이었고, 여러 프로젝트 포인트가 높은 것은 어찌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몇 년전부터 아등바등 회사에서 버티듯 머물고 있는 승규와는 완전히 딴판이었다. 과분한 업무는 사라졌지만, 능력제 사회에서는 그만큼 수입이 적은 승규였다. 혜은과의 결혼을 다짐하게 된 것도, 승규 본인도 완전히 인정하고 싶진 않지만 생존을 위한 방편쯤이었는지도 몰랐다.


"우리가 결혼을 하면, 아이도 낳을 거잖아."


와인 코르크 마개를 열기 위해 힘겹게 애쓰던 승규를 향해 혜은이 불쑥 아이 이야기를 꺼냈다. 아이를 낳는다는 건 미래의 아내 수입이 잠시 끊긴다는 이야기였다. 짧게는 6개월에서 1년, 혹은 아이를 낳은 후부터 쭉 외벌이로 버텨야 할 수도 있다는 의미기도 했다. 승규는 오래도록 붙잡고 있는 장기 프로젝트를 제외하곤, 케파 포인트가 50점을 넘기는 일이 잘 없었다. 당연히 우선순위에서 프로젝트 담당자로 제외되는 일이 많았다.


"아이가 꼭 필요할까? 자기, 일 좋아하잖아. 요즘 애 없이 평생을 신혼처럼 사는 커플들이 얼마나 많은데..."


혜은이 무언가 깨달았다는 듯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승규를 바라봤다.


"우리 결혼을 약속한 거고, 예비 부부인거잖아. 그렇지?"

"...그렇지."

"요즘은 결혼전에 촌스럽게 통장 잔고 보여주지 않고, 미래 가치를 확인 시켜주는 것도 잘 알지?"


혜은은 알아서 내놓으라는 듯, 구체적인 말을 마치기도 전에 승규를 향해 빈 손바닥을 펼쳐보였다. 승규는 자신의 치부를 드러내는 것 뿐만 아니라, 앞서 혜은의 마음을 돌리기 위해 했던 조작과 연기들을 되돌리는 일을 하고 싶진 않았다. 잠시 멈칫거리는 사이 승규의 이마에서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왜 그렇게 당황해? 회사에서 일 잘 하고 있다며. 능력도 인정 받고. 회사에 있는 나이 많은 부장님도 다 자기 같은 능력 있는 젊은 사람들한테 밀려서 쫓겨 난거라고 그랬잖아."

"응. 그건 그렇지. 근데 자기야, 잠깐만. 오랜만에 좋은 음식을 먹어서 그런가... 배가 갑자기 아프네. 화장실 좀."


식탁에 올려둔 휴대폰을 혜은이 알아차리지 못하게 조용히 주머니에 넣고, 승규는 급한 일을 보러 가는 듯 화장실로 향했다. '치트' 앱을 켜고 구매할 수 있는 해킹 서비스 목록을 빠르게 훑어 나갔다. 케파에는 '인기 상품' 딱지가 붙어 있었다. 진철이 지나가듯 한 말처럼, 케파 조작은 자칫하면 감옥에 갈 수도 있는 일이었다. 하지만 능력 없는 사람이란 이유로, 혜은을 붙잡지 못하게 되고 결국 머지않은 시기에 이 부장처럼 다 치운 책상을 닦고 또 닦으며 꾸물대듯 회사를 빠져 나가야 할지도 모를 일이었다. 커다란 종량제 봉투엔 오늘 아침 들고 갔던 서류 가방을 버린 채. 승규는 고개를 세차게 좌우로 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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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규는 결제 버튼를 누르기 직전 잠시 고민했다. 막연한 불안감을 해소하기 위해 승규는 '더 케미' 해킹 서비스를 이용했을 때 도움되었던 리뷰란을 눌러 살펴보기 시작했다. 분명 이 서비스에 대한 경고를 하는 사람도 있었지만, 승규의 눈에는 서비스에 대한 칭찬의 내용만 보이는 듯 했다.


Raise77** | 이렇게 쉬운 걸 왜 마음 고생만 했는지 모르겠습니다.
Ttqop011** | 결국 나 빼고 이 서비스를 다 이용한 건 아닌가 억울할 지경입니다. 높은 포인트로 프로젝트 담당하고 나서가 걱정이라고요? 능력 거래 사이트에서 인센티브나 성과급 50%만 떼어줘도 하겠다는 프리랜서들이 널렸는데... 늦게 하면 할수록 손해입니다.


"자기. 많이 안좋아? 내가 약 좀 사다줄까?"


문을 두드리며 외치는 소리에 승규는 깜짝 놀라 휴대폰을 떨어뜨릴 뻔 했다.


"괜찮아. 금방 나가."


인생은 아무리 눈 똑바로 뜨고, 머리를 굴리고, 힘을 주고 애를 써도 결코 마음대로 풀리는 법이 없었다. 승규는 얼굴도 모르는 사람들이 남긴 호평뿐인 리뷰를 눈 감고 믿어보기로 했다. 당장 저 문을 열고 마주해야 할 문제부터 해결하는 게 급선무인 것 같다. 승규는 [결제] 버튼을 눌렀다. 동의를 필요로 하는 항목들이 나열됐다. 어차피 불법적인 서비스인데, 이런 동의 서비스를 받는다는 자체가 의미 없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승규는 의례적이겠거니 하며 항목을 읽어내려갔다.


요청하신 서비스는 정부기관의 엄격한 모니터링 대상인 프로그램입니다.
ㅁ 네, 알고 있습니다.

치트 서비스 제공 후, 향상된 수치로 인해 과분한 업무가 당신에게 부여됩니다. 이에 대한 업무 처리 및 향후 책임 소재는 의뢰자 본인에게 있음을 확인하였습니다.
ㅁ 네, 확인하였습니다.

본 프로그램은 다른 프로그램들과 달리, 정부와 유관 기관 전산망 및 데이터 전체에 대한 전면 수정 작업이 진행되어, '영구적'으로 수치가 반영됩니다.
ㅁ 네, 확인하였습니다.

 

"뭐가 이렇게 많아?"


항목을 하나씩 뜯어보던 승규는 진짜로 배탈이 난 것처럼 아랫배가 아파오기 시작했다. 배를 움켜쥐고 확인했습니다, 부분을 반복해 체크했다.


향후 개인의 양심상의 이유로 해당 앱에 대한 고발 및 폭로가 있을시, 의뢰자 개인의 모든 정보를 불리하게 활용할 수 있습니다.
ㅁ 네, 동의합니다.


승규는 자신의 정보를 불리하게 쓴다는 말이 무슨 말인지 퍼뜩 이해되지 않았다. 그러다 다시 한 번 더 아랫배에 싸한 통증이 느껴졌다. 불리한 건 지금의 상황인 것만 같아 그는 그 항목에도 '동의합니다'에 망설임없이 체크했다. 그로부터 몇 분의 시간이 흐르고, 서비스 완료 메시지가 도착했다.


의뢰하신 서비스가 실행 완료되었습니다. 유효 시간은 무한대입니다.


이윽고 휴대폰 메일함에 5통의 메일이 도착했다. 해외지사에서 보내온 것이었다. 프로젝트의 완벽한 적임자를 찾고 있었으며, 그것이 승규라는 내용이었다. 모든 사실은 케파를 기반으로 공정하게 제안한다는 내용도 덧붙어 있었다. 승규는 회사 생활을 하며 이런류의 제안 메일을 단 한 번도 받아본 적 없었기에, 어떻게 답해야할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업무 시간에 다시 답변하겠다는 짤막한 회신조차 번역기를 돌려 해결해야 했다. 오랜만에 느껴지는 부담감이었다.


화장실 밖으로 나온 승규를 혜은은 걱정스러운 눈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괜찮냐고 묻는 말에 승규는 억지 웃음을 지으며, 괜찮다고 했다. 혜은은 승규를 식탁 의자에 앉혔다. 승규는 바지 주머니에 넣어두었던 휴대폰을 꺼냈다. 화면에는 업무 제안서, 프로젝트 협업 제안, 이직 제안 등의 이메일과 메신저 팝업창이 쉴새없이 떠오르고 있었다. 혜은의 표정이 밝아졌다.


"케파 포인트가 높으면 다들 거만하기만 한데. 자기는 겸손하기까지 하네. 여자친구까지 감쪽같이 속았어."

"이게 뭐 대단한 거라고..."

"대단한 거지. 참, 자기. 심한 배탈이면, 와인은 먹지 않는 게 좋겠어."

"괜찮아. 오늘이 어떤 날인데."

"기념비적인 날이지!"

"혜은아."

"응."

"넌 나한테 참 과분한 사람이야."

"사랑한다는 말이지?"

"비슷하지."


승규는 와인잔을 입에 가져다댔다. 꽤 비싼값을 주고 산 와인이어서 승규는 꽤 기대를 하고 있었던 것이었다. 와인을 한모금 입에 머금자마자, 승규는 싱크대로 뛰어가 입에 든 것을 모조리 뱉어냈다. 떫다 못해 상한 것처럼, 비위를 건드리는 기분 나쁜 맛이었다. 입에 남은 향 조차 거슬려 물로 헹구고, 침을 뱉는 승규를 보며 혜은은 당황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혜은은 잔에 남은 와인을 마저 입에 흘려 넣으며 말했다.


"오늘 자기가 컨디션이 많이 안좋긴 한가봐."

"이거 못 먹을 정도인데, 자기도 그만마셔. 썩었어."

"그럴리가 없지. 이 와인이 '더 와인' 앱에서 평점 1위인데."

"더 와인?"

"케파, 더 케미 만든 회사에서 만든 앱이잖아."

"거기서 만들면 그냥 다 믿는거야?"

"그럼, 안믿어?"


승규는 또 다시 역한 기분이 들었다. 아무리해도 떫은 맛은 사라지지 않는 것만 같았다. 승규는 혜은이 와인 한 병을 다 비워내는 동안에도 입을 헹구도 또 헹궜다.



<끝>





'출근길에 읽는 초단편'은 출근하는 마음으로 쓰고, 공개하는 짧은 시리즈 소설입니다.

돈 벌고, 먹고 사는 일에 관한 모든 수고들을 소재 삼아 써나가려 합니다.

들려주고 싶은 이야기가 있다면, 그래서 나의 삶과 닮은 소설을 읽어 보고 싶다면 언제든 연락주세요.

인스타그램 @hit_seul

이메일 kslgi06@naver.com


아무도 시키지 않았지만, 월화수목금 쓰고, 토일 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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