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서평

[사회문제] 아이들의 계급 투쟁

by 암시랑


'탁아소, 정치에 완패하다.'


이 책의 첫 문장, 추천의 글이기는 하나 이 문장보다 대한민국 보육 현실을 더 이상 정확하게 표현할 수 있는 말이 있을까 싶다. 아이들의 제대로 된 육아를 위해 사립유치원들의 막가파식 비리 좀 막아보자고 발의한 '유치원 3법'을 여전히 막아서고 있는 정치인들이나 그 뒤에서 온갖 지원을 퍼붓고 있을 전국의 사립유치원 관계자들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그들은 여전히 아이들의 건강한 미래를 빌미로 자신들의 배를 불린다. 모두 아는데 자신들만 모른다. 무슨 닭도 아니고.


이 책은 영국에서 자원봉사로 시작해 보육교사로 일한 저자의 경험을 적고 있다. 보육사로서 시작과 끝을 저변 탁아소에서 보내며 보고 느낀 실상을 객관적이지만 주관적 시선으로 보여준다. 구빈법으로 시작한 사회복지의 요람인 영국의 사회복지가 점점 무덤으로 변모하는 느낌이다.


첫 문장에 이미 분노 게이지가 달아오른다.


"이 시대에는 계급이 인종이 되었고, 계급에 따라 분리 정책이 실행되고 정당화된다. 내 아이를 보호한다는 명목으로 말이다. 하층에 대한 혐오와 경멸은 정치적으로 완벽히 '옳은 것'처럼 실천된다." p6


귓속을 맴돌아 가슴 벅차게 만든 단어가 있다. 비록 내가 여타의 정치적 문제나 사회 문제에 목소리를 내본 기억은 없지만 이 '대인적 목소리'가 얼마나 중요하고 의미가 있는 것인지는 이해한다. 그래서 벅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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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해하는가? PC(Political Correctness, 정치적 올바름)를? 뒤통수 한 대 맞은 것처럼 번쩍했다. 외국 이민자가 많아진 요즘 '다문화 가족'이라는 표현이 차별적 의미라며 지적하는 사람들이 생겨날 정도로 이 정치적 올바름에 대한 의식이 한층 높아진 게 사실이다.


하지만 저자가 지적하는 것처럼 자국민의 하층민, 즉 저소득층이나 노숙자, 장애인 등 사회적 약자에 대한 차별은 결코 멈춰지지 않는다. 심지어 노동하지 않는 사람은 살 '가치'가 없다고까지 하는 세상이다. 그렇게 노골적으로 차별하는 사람들 스스로도 레이시즘(Racism, 인종차별)은 하지 않는다고 믿을지 모르지만 외국인에 대한 차별이나 혐오 역시 경제적 계층에 따라 다를 뿐이다.


아내는 보육교사였다. 더 이상 보육교사가 아니다. 보육교사로 일하면서 아이들과 즐겁게 일하는 것과는 다르게 퇴근 후 택배를 찾으러 온 사람처럼 아이를 한 바퀴 빙글 돌려가며 흠집 난 곳이 없는지 확인하는 부모들에게 질려버려 그만두었다.


아내는 그렇게 아이들을 택배 돌려주 듯 돌려주고 마시는 커피 한 잔만큼 자존감을 훼손 당했다. 게다가 원장조차 보육교사가 아닌 택배 주인 편에 서서 행여 아이들끼리의 사소한 다툼이 있기라도 할라치면 '주의를 시키겠다'라며 보육교사가 한눈팔아서 생긴 잘못으로 돌려버리는 일은 참을 수 없는 건 당연한 일이다. 남의 편은 남편 하나로 족하지 않은가.


이렇게 이 책은 우리가 믿는 정치적 올바름은 과연 제대로 작동하는지 숱하게 고민하고 반성하게 만든다.


영국의 언더 클레스가 대한민국의 언더 클레스와 같다고 할 수 없을지는 모르지만 무조건적 시혜의 이면에는 그들의 자존감을 푼돈으로 뺏어 버리는 정책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일할 곳도 없지만 더 이상 일할 생각조차 하지 않게 무능력하게 만드는 일일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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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긴축'은 사람들을 흩어지게, 고독하게, 그리고 의기소침하게 만들었다." p70


"사회가 진짜 변한다는 것은 밑바닥이 변하는 것이다."라는 저자의 말에 이견이 있을 수 있을까. 대한민국 역시 사회적 약자의 고립이 더 이상 만들어지지 않고 그들이 대중교통을 이용하기 위해 목숨을 내놓고 리프트 위를 불안하게 오르지 않아도 되는 일, 그로 인해 보다 많은 사람들이 자존감을 잃지 않고 사회 구성원으로 자기의 역할을 찾을 수 있는 노력을 함께 만들어 가는 일. 그것이 바로 정치적 올바름이 아닐까.


분명한 것은 비키의 '도프'와 '쿨' 하다는 것은 결국 저 밑바닥에 웅크릴 수밖에 없는 사람들이 벌이는 변화를 위한 시도다. 긴축은 저소득층에 있는 사람들이 위로 올라갈 수 있는 기회마저 박탈하고 있고 더 이상 일하지 않는 언더 클레스가 되지 않으려고 발버둥 치게 만들 뿐이다.


"격차는 당연하다고 생각해. 부유한 사람과 가난한 사람은 어느 시대, 어떤 곳이든 있으니까. 문제는 하층 계급에 속한 사람이 거기서 탈출할 가능성을 열어두지 않는 사회라고." p161


자본주의 시대에서 경쟁은 당연하고 그 경쟁으로 벌어지는 계층의 격차는 어쩌면 당연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당연하다고 해서 불평등하거나 불합리 한 것들까지 당연하다고 생각할 이유는 없다. 격차가 당연하다면 그 격차 안에서 공평하게 자신의 권리를 누릴 수 있는 당연함 역시 공존해야 한다. 우리는 그런 공평함이 실종됐다는 게 문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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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다 보면 영국의 실상이 정말 이 정도일까라는 의구심이 들 정도로 사회복지의 발상지인 이곳이 왜 이렇게까지 돼버렸는지 놀랍다. 저자도 이야기하지만 영화 <나, 다니엘 블레이크>가 그저 영화 속 이야기만이 아니라 현실 속 잭의 엄마라니 착잡하다. 영화에서 푸드 뱅크에 들어서자마자 허겁지겁 콘을 따 먹던 장면이 선명해졌다.


최소한의 복지는 그저 시혜를 베푸는 게 아니다. 인간다운 생활을 이어갈 수 있는 장치다. 그걸 공무원의 편의주의적 발상이나 주관적 판단으로 결정할 문제는 분명 아니다.


책을 손에서 놓을 수가 없다. 탁아소를 통해 보여주는 적나라한 복지를 기반으로 사회 문제, 특히 빈곤의 문제를 다루는 이 책은 불평등이나 계급 혹은 계층 분리 같은 확실하고 확연히 드러나는 문제를 충분히 자극적일 수 있는 것들을 전혀 자극적이지 않게 담담하게 보여준다. 어떻게 이렇게 분노스러워야 할 빈곤의 문제와 인간 존엄적 불평등 문제를 일부러 부각시키지 않으면서 풀어내는지 놀랍기 그지없다.


물론 영국의 문제라고 치부할 수도 있을지 모른다. 하지만 긴축 경제가 불러온 빈곤은 빈곤한 사람들을 더 빈곤으로 내몰았으며, 더 이상 일자리를 내주지 않았다. 그리고 변방으로 내 몰기까지 했다. 그리고 그 자리를 메운 건 푸드뱅크였다. 대한민국 역시 저소득층의 식탁을 푸드뱅크가 점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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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원센터에는 이런 여성들이 꽤 있다. 분명히 어떤 재능을 가지고 있다. 하지만 장애나 정신건강 문제로 세상에 나가 그 재능을 돈으로 바꿀 수 없는 ‘아줌마들’이다." p269


또한 이 저변 탁아소를 구성하는 인원을 보자니 놀라지 않을 수 없다. 경험이 풍부한 사람 1명, 아이 돌봄 과정의 학생 1명, 그냥 놔도 둬 되는 사람 1명, 도움이 필요한 사람 1명으로 총 4명이 한 팀으로 구성한다. 그런데 가만 보면 말 그대로 전문가는 1명뿐이다. 실습생에 그냥 자원봉사자 그리고 어디든 '문제'가 있는 사람이라니. 특히 여기서 도움이 필요한 사람은 '장애인'이다. 책에 등장하는 베키는 누가 봐도 중증 장애인이다. 지적 장애와 정신 장애의 중복 장애를 지닌.


그런 '도움'을 받아야 할 장애인이 아이들을 '돕는'일을 한다니. 놀라움을 넘어선 그 무엇이 있다. 그런데 '무직자와 저소득자를 위한' 지원센터이므로 '일을 할 수 없는 사람들을 지원' 한다거나 '아이들을 만나는 것 자체가 치료 기능을 한다'라는 기본정책이라는 것이 얼마나 멋진 말이며 감동인지 가슴이 먹먹해졌다. 중증 장애인이라 하더라도 그들이 구성원으로 '역할'을 할 수 있도록 지원한다는 게 너무 멋지다.


정말 놀랍지 않은 게 없을 만큼 놀라운 책이다. 어쨌거나 저자가 말하는 '저변 탁아소' 그러니까 대한민국의 어린이집 정도인 보육 시설을 통해(근데 대한민국은 영국처럼 최빈곤층 만을 위한 보육 시설이 존재하기나 하는지 모르겠다.) 국가가 국민의 단 한 사람도 포기하지 않아야 함을, 수당이나 푸드 뱅크의 음식으로 일할 수 없는 사람으로 무기력한 삶을 이어나가는 것이 아닌 인간적 존엄을 지키며 스스로의 역할을 기능할 수 있도록 하고 나아가 사회 시스템이 제대로 작동될 수 있도록 하는 게 얼마나 중요한 일인지 깨닫게 해준다.


분명하게 인간답다는 의미를 찾을 수 있게 해주는 책이다. 2019년 최고의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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