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칙을 고수하고 맡은 일엔 최선을 다하는 고복희는 그냥 융통성이라곤 일도 없는 꽉 막힌 사람일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표지에서 정면을 응시하는 고복희와 눈을 맞추니 막연한 어떤 흥미로움이 생겼다.
고1, 어쩌면 고2였는데 아이들에게 반공사상을 드높이려 했던 당시 정권은 학생들에게 단체 영화를 강요했다. 그중 하나가 킬링 필드였다. 그곳이 캄보디아였다는 건 한참 나중에 알았다. 영화 내용은 일일이 다 기억할 수 없다. 어제 일도 그리 생생하지 않은 요즘이다. 오십 대의 삶이 그럴 테지만.
어쨌거나 '참 많은 사람을 죽이는구나 게다가 잔인하게'라거나 '이런 영화를 고등학생이 봐도 되나?'라는 생각을 했던 거 같다. 그 기억을 고복희가 새로 썼다. '캄보디아의 수도가 프놈펜인데 앙코르와트가 왜 없냐'라는 박지우의 질문에 '불국사는 서울에 있냐'라는 고복희의 대답이 어우러져 이놈의 원더랜드가 진짜처럼 느껴졌다. 가고 싶다.
"와! 두근두근!" 나도 박지우처럼 심장 뛰는 소리를 입으로 따라 할 만큼 들뜸이 가시지 않는다. 오베 할아버지의 시크함은 고복희의 단호함에 명함도 못 내민다. 암만!
소설은 막연하게 판타지 같은 내용으로 재미를 만들려 애쓰지 않는다. 오히려 "옳다고 생각하는 일만 하고 산다는 게 오히려 너무 힘든 세상'이라는 녹녹치 않은 현실을 판타지에 녹여 이야기한다. 웅숭거리 게 만드는 추운 날 언제나 따뜻함만 있는 남쪽 나라로 가게 된 고복희의 아픈 사연이나 뭐든 안 되는 인생이 어떻게든 안 되는 인생임을 확인 시켜 줄 뻔한 박지우의 사연에 더해 성실과 노력이 빛을 발하면 새로운 희망이 될 수 있다는 린의 사연까지 세 여인의 인생을 품은 캄보디아의 원더랜드는 더 이상 판타지가 아니다.
분명한 건, 개 같은 세상. 고복희가 살았던 대한민국에서 조금 더 나아지지 않은 좀 더 개 같은 세상에서 박지우가 산다. 그래서 그녀들은 지금 남쪽나라에 있다는 거다.
'나태한 학생', 또박또박 힘줘서 읽자 괜히 나태주 시인께 황송해진다. 학창 시절 선생님들의 눈에는 나 역시 나태한 학생 중에 하나였으리라. 그럴싸한 꿈도 거창한 목표도 없고 눈뜨고 있는 시간보다 눈 감고 있는 시간이 많았다. 수업 시간은 수면 시간이었다. 조회 시간에 못 본 담임을 종례 시간에도 못 본 날이 많았다. 어떤 날은 오줌이 마려워서 일어나니 야자 시간이기도 했다.
어쨌거나 고복희의 기준에서 나태하다고 해서 아이들이 나태한 건 아니다. 걔네들도 뭐든 해보려고 애쓰기도 하고 그다지 생산적이지는 못할지는 모르더라도 생각은 한다. 심지어 많이. 다만 그렇게 보는 사람들의 기준에 못 미치거나 성에 안 차서 눈에 보이지 않을 뿐이다. 박지우처럼 말이다.
"세계는 절대로 공평하지 않다. 더 잔인한 것은 마치 공정한 것처럼 가면을 쓰고 있다는 것이다. 그 당연한 사실을 최근에야 깨달았다." p103
자본주의 자체가 잔인한 것이라고 그랬다. 자본주의를 굴러가기 만드는 원칙이 '경쟁'인데 경쟁 자체를 두고 뭐라 하면 어쩌냐는 거다. 경쟁을 통해 이긴 놈은 돈을 버는 거고 진 놈은 쪽박을 차는 거라는 너무 당연한 자본주의의 원칙이 사람을 미쳐돌게 만드는 이유는 경쟁 자체의 문제가 아닌 '분배'의 문제라는 지적이다.
경쟁을 계급을 나누고 치열하게 만드는 개 같은 세상에 산다. 우리는. 그래서 고복희는 남쪽 나라에 살고 박지우도 잠깐 갔다. 나도 가고 싶다. 근데 박지우와 린은 왜 돌아왔을까. 결국 거기나 여기나 그게 그건가?
원더랜드가 있는 캄보디아의 한인 사회를 통해 사람 사는 문제는 어디에나 있다는 경쟁에 이기고 지는 부류는 잘 사는 나라나 못 사는 나라나 존재하고 남이 아닌 나 먹고살기 바쁘면 거기가 거기라는 생각이 들게 한다.
눈치와 술수로 버티는 사람, 다소 느리지만 우직하고 충성스러운 사람, 잘못을 알고도 눈 감는 사람, 잘못을 깨닫고 반성하는 사람, 살기 위해 바둥거리는 사람, 그리고 원칙과 성실함을 지키는 한결같은 사람들의 모습을 통해 사람 사는 모습을 판타지로만 보여주지 않는다. 그래서 더 많은 공감이 된다.
"돌아가고 싶은 곳이 있다는 건 사람을 외롭게 만든다. 한쪽 발은 저 멀리 두고 한쪽 발로만 현실을 살고 있으니까." p169
이 문장에서 사람은 어쨌거나 타인과 관계로 살아가는 존재라는 점을 인정하게 된다. 철옹성 같은 고복희가 원숭이가 원숭이처럼 그려진 티셔츠를 입고 나타난 멍청이 박지우에게 마음을 열고, 원칙과 상관없이 린을 후원하는 일을 상상이나 하겠는가. 또 주말 밤마다 디스코텍에서 디스코를 추던 장영수나 디스코는커녕 비트에 어깨도 엉덩이도 들썩거릴 줄 모르는 고복희가 그런 장영수를 지켜보기만 하던 일과 정신 차리고 보니 그와 결혼을 하게 된 일이라든지.
소설 속 등장하는 인물들이 영화나 연극처럼 입체감 넘치게 활약하는 모습을 보며 우린 우리를 돌아보게 된다.
"누군가 정박했던 공간은 흔적이 남기 마련이니까. 생생한 지문이 마모되기를 기다렸던 것이다." p252
장편 소설을 단편처럼 홀쭉하게 만드는 재주가 작가에게 있는 건지 고복희에게 있던 건지 애매하지만 고복희가 혼자 남는 건 싫었다. 그리고 김인석이 계란 정도로 용서가 되는 것도 싫었다. 그냥 그랬다. 하지만 프놈펜에 가면 고복희는 없더라도 원더랜드는 있었으면 좋겠다. 아닌가? 반댄가? 원더랜드는 없더라도 고복희가 있으면?
어찌 됐든 사람은 누구나 가슴 한쪽에는 바람이 불면 흔들리는 아픈 상처 하나쯤은 갖고 사는 거라는 걸 고복희가 굳이 말로 하지 않아도 알게 해주는 재미보다는 아름다운 책이다. 근데 꼭 하고 싶은 말이 있다. 표지 고복희는 너무 어린 거 아녜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