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축가 정확히 말하면 건축 설계가가 되고 싶었던 적이 있었다. 요즘은 설계 디자이너라고 하는 게 더 어울릴지도. 하여튼 갑작스럽게 닥친 장애는 내게 '먹고사는' 문제를 심각하게 고민하게 만들었고 다른 생각을 할 만큼의 여유를 갖지 못했다. 그저 몸은 재활에 매진해야 했고 정신은 미래를 걱정해야 했다. 그때는 1990년이었고 고작 대학 2학년이었다.
그렇게 동네 컴퓨터 학원에서 시커먼 도시락통만 한 5.25인치 플로피 디스크로 도스를 배웠다. 그리고 정보처리 자격증을 거쳐 오토캐드와 3DS까지. 오토캐드를 배우고 설계라는 게 흥미로웠다. 모니터 상이긴 하지만 상상 속 건물이 뚝딱 만들어지는 일은 매력적이지 않을 수 없다.
코엑스에서 열리는 건축 설계 전 출품도 하고 건축학과 친구의 졸작까지 캐드 디자인에 푹 빠졌다. 그때는 대부분의 설계는 수작업이었기 때문에 관련 학과가 아니어도 '먹고 살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이후 관련 학과에 캐드 과목이 생기고 결국 다른 길로 접어들어야 했지만 줄곧 '내 집은 내 손으로 설계하고 싶다'라는 막연한 생각은 변함없다.
이 책은 60여 명의 건축가가 그린 900여 점의 설계 일러스트가 담겨있다. 크고 묵직한 두께를 자랑하는 책은 처음부터 소장용으로 기획된 느낌이다. 영국, 캐나다, 네덜란드, 스페인, 이탈리아, 폴라드, 일본 등 세계 다양한 건축가들이 그려낸 도면들을 보는 것은 완성된 건축물을 상상하는 재미를 주기도 한다.
놀라울 정도로 굉장히 디테일한 묘사를 볼 수 있기도 하고 때론 그냥 쓱쓱 막 그려낸 러프한 스케치에 설계 모형까지 확실히 보는 맛이 있다. 흥미롭고 두근거린다.
서두에 저자는 건축 드로잉(스케치)을 시각 예술로 여기며 과거 어린 시절부터 끊임없이 다양한 건축물을 스케치 해왔음을 고백한다.
"과거에는 새로운 건물을 위한 설계의 모든 손이 그것을 손으로 그리는 한 개인으로부터 쏟아져 나왔으나, 이제는 대부분의 평면, 입면 및 단면이 플라스틱 마우스 부대에 의해 만들어진다!" p11
한편 디지털로 빠르고 좀 더 정밀해지는 것에 경계를 내비친다. 그러면서 빛의 반사나 냄새, 질감 등 다양한 감각이 중요함을 역설하면서 스케치북에 연필과 색연필로 표현하는 아날로그 감성이 왜 중요한지 강조한다.
특히 협업을 자주 하는 건축가들의 입장에서 스페인 건축가 팀의 스케치를 볼 때 다양한 메모를 볼 수 있는데 "스케치는 의사소통 수단일 뿐 아니라 분석과 창조를 위해 개별 또는 집단이 활용하기에 좋은 도구다."라는 그의 말에 공감되기도 한다.
암튼 앞으로도 건축 아니 설계라는 전문적인 일을 할 수는 없겠지만 이 책을 통해 내 집은 내가 그려볼 수는 있을지도 모른다는 설렘이 생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