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제목이 이토록 부정적으로 읽혔는지 모르겠다. "넌 아직 나 따라오려면 멀었어!"라며 잘난체하던 친구가 떠올랐다. 그때의 분함도 덩달아서. 그런데도 표지의 파스텔 톤 그림이 주는 따뜻함이 뭔갈 기대하게 한다.
혼란스럽고 먹먹함에 읽다 쉬다 생각하다를 반복해야 했다. 책을 읽을 때는 작가의 생각이 나 감정을 굳이 알려고 애쓰지 않는다. 그저 닿는대로 내버려 두는 편이랄까. 그런데 이 소설은 난해한 영화를 본 것처럼 의미를 알고 싶어 애를 쓰고 있다. 바스락거릴 정도로 건조한 문장이 짙은 우울을 입은 듯 꽤나 힘겨운 독서가 되고 있다. 조금씩 기운 빠져나가는 게 느껴진다.
다영에게 명덕이 소외되는 기분이 왜 아릿한지. 나 역시 딸과의 사이에서 서투르게 '잘 하지 못하는' 태도에 동감한다. 반면 소희가 지녔을 버려짐에 대한 처연한 감정은 도무지 감당이 되지 않았다. 불쾌하게 입안에서 씹히는 이물감같이 활자가 머릿속을 불편하게 휘젓는다. 배경이 영국이라 막연히 생각했는데, 디엔과 데런은 청계천 근처에 살고 뿌옇고 축축한 안개에 휩싸인 희미한 기억처럼 분간을 할 수 없다.
이렇게 감정을 긁어내는 것 같은 소설을 좋아하지 않으면서도 한편으로 그렇게 짜내듯 감정을 쏟아낸 우울은 또 나쁘지 않다고 느끼는 이유는 뭘까 싶다. 분명 축축한데 말라 건조한 느낌. 축축한 건조함이랄까?
"잡급직들은 잡급직답게 잡스러워야 한다." p149
어쩜 이렇게 잔인하고 천박스러운 표현이 담담할까 싶다. 경계라는 것, 정규와 비정규, 기간제와 무기, 장애와 비장애 같은 이분되지만 같이 존재해야 하는 것들. 그래서 더욱 뚜렷해지는 구분을 세상은 요구한다. 그래서 경계에서 희미하게 살아내는 사람들에게 세상은 결국 그 너머를 맛보지 못하는 부류들로서 존재를 허락한다. 2학년 4반의 2개월짜리 교사는 결국 너머를 보지 못했고 버리지 못하는 것들을 이해해 버렸다. 그래서 아프다. 친구가 친구가 아닐 수 있는 힘의 논리. 장난과 폭력의 차이. 가해자를 피해자가 걱정하는 일. 그 차이를 감내하는 민수를 보며 "왜 해도 됩니까, 한 번은?"이라며 소리치던 다영의 말이 맴돌았다. 또 도리와 의무 사이 어디쯤 갈팡질팡하는 자식들 이야기는 우리의 자화상이 아닐까 싶었다. 이미 다 타고 남은 재처럼 더 공허할지 아니면 더 충만해질지 모르지만 어쨌거나 카프카의 변신은 이미 처연하다.
"모든 건 사라지지만 점멸하는 동안은 살아 있다. 지금은 그 모호한 뜻만으로 충분하다." p250
우린 듣지 않는 세상을 향해 혼자 계속 떠드는 일을 하고 있는 게 아닐까 싶은 생각을 했다. 관계는 넓어가는 만큼 얇아지고 서로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지 않게 되고 혼자만 따든다고 착각하게 되는. 슬쩍 주머니에 포스트잇과 볼펜을 넣어본다.
소설은 분명 암울하고 먹먹하다. 그런데 슬픔을 슬픔으로 불행을 불행으로 좌절을 좌절에 대한, 다른 감정의 찌꺼기들이 끼어들지 않은 그렇게 오롯한 감정으로만 관통한다. 그래서 먹먹하지만 아프지 않고 슬프지만 분노하지 지 않게 만드는 무엇이 있다. 그런데 그 무엇이 제목에서 말한 '아직 멀었다'라는 이유를 설명하진 않는다. 오히려 그레고르의 흐릿해진 벌레의 눈처럼 생각을 뿌옇게 만들어 놓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