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망한 남자
"망해도 젊을 때 망해야 다시 일어날 수 있어요."
딱 1년.
호기롭게 벌렸던 애니메이션 스튜디오를 1년을 채 넘기지 못하고 정리했다. 그러면서 깨달은 사실은 '나는 사업가 그릇은 아니다'라는 사실이다.
최소한 대한민국에서는.
뉴스에 종종 보도되는 대로 접대 문화나 원청의 하도급 갑질이 여전한 상황이지만 당시엔 더 횡행하던 갑질의 비위를 맞추거나 모른척하기에는 내 성질머리가 너무 뻣뻣했다.
밤새 고생하면서 만들어 내는 작품의 퀄리티를 담보하는 게 정말 끔찍하게 싫었다. 그래서 정리하는 게 현명하다고 생각했다.
일도 없이 사무실을 돌리고 직원들 월급을 챙기느라 결혼하면서 부모님이 마련해 주신 집을 날렸다.
아주 깔끔하게.
결혼 2년 차, 탯줄에 피딱지도 안 떨어진 딸아이가 있는데 집을 날렸다. 어디 오갈 데도 없는 백수가 됐다.
부모 형제가 있으니 막막해도 기초생활수급자도 안된다. 정말 어쩔 수 없이 부모님 댁 옥탑방으로 고개도 들지 못하고 들어갔다.
재수 없는 일은 엎친 데 덮친다고 하더라만 그 말은 정말 맞다. 안 좋은 일은 여지없이 겹쳐서 온다. 보너스처럼 말이다.
망한 것도 모자라 불편한 몸에 신세계 같던 애니메이션을 시작하며 친형처럼 믿고 따랐던 PD가 있었다.
8년여를 거의 동고동락을 하며 의지했는데 인간적 배신을 당하고 애니메이션 바닥을 떠났다.
백수.
놀고먹는 자라니. 아니다. 다들 그렇게 생각하면 안 된다. 일하고 싶어도 일할 수 없게 만드는 무엇이 있다.
그들도 수도 없는 밤을 지새우며 이력서를 쓰고 고뇌하고 매달린다. 일하고 싶어서 혹은 일해야 해서.
난 후자였을까.
부모 봉양은 고사하고 처자식을 책임져야 하는 가장이다.
요즘에 이런 소리 하면 다들 '누가 누굴 책임지는 게 아니라 함께 사는 거다'라고 할지 모르겠으나
내 세대에는 그랬다.
모르긴 몰라도 남자에게는 가장의 무게라는 게 존재했다.
어쨌거나 다시 하던 일을 하긴 어려웠다.
짧지 않은 경력에 회사를 운영했던 경력이 추가되니 다시 현장으로 돌아가는 건 그 누구도 반겨하지 않았다.
젊을 때 망하면 다시 일어날 수 있다고? 그런 시답잖은 소리 개나 줘버려야 한다.
다시 못 일어난다. 주저앉아 있으면 다행이다.
열정에 못 이겨 집 팔고 패물 팔고 팔 수 있는 거 다 판 사람은 아예 널브러진다.
절대 못 일어난다.
쓰다 보니 눈물 난다. 아, 짜증 나.
암튼 팔 수 있는 거 다 팔고 집 날리고 거기에 형 같은 인간에게 뒤통수까지 맞고 그야말로 널브러졌다.
근데 희한한 건 이런 상황에서도 세상 하직할 생각을 안 해봤다. 지금 생각해도 희한하다.
계단 몇 개도 올라 다니기 어려운 장애인에 쫄딱 망하고 재취업은 안 되고 친형 같은 인간에게 배신당하고 이제 막 세상에 나온 딸까지.
그야말로 눈을 뜰 수 없을 정도로 어지러운 상황이었는데 그냥 그랬다.
말 그대로 뭐든 어떻게 되겠지.
하지만 이후로 1년이 넘게 내 직업은 백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