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에겐 애쓰지 않고도 사랑하며 할 수 있는 일이 필요하다
장르를 가리지 않고 닥치는 대로 읽는 그저 그런 다독가이지만 그중에 굳이 꼽아야 한다면 에세이를 좋아한다. 다양한 삶에 대한 이야기가 있고 나름 그 안에 깨달음이나 통찰을 담고 있어 편하게 읽으면서 때론 폭풍 공감에 눈물을 찍어 낼 때도 있다는 점을 좋아한다.
이 책을 왜 주저 없이 읽게 됐을까 잠시 생각했다. 언제나 그림이라는 내 로망에 대한 이야기라서? 나처럼 매일 사표를 만지작거려서? 어쩌면 "퇴사를 하고 말 거야!"를 입에 달고 살지만 정작 목구멍이 포도청이란 성현들의 말씀을 이해하며 침 한번 꿀꺽 삼키고 마는 나 자신이 투영되버려 이 작가도 적당히 치사하구나라는 생각에 웃음이 났다. 그래서 기분 좋았다면 이상한가?
예전부터 취미라는 빈 항목에 뭐라도 써넣어야 하는 것이 곤욕이었다. 그렇다고 지금도 나아진 건 없지만 독서라고 쓸 때면 "그건 취미가 아니고 당연한 거 아녜요?"라고 반문했던 후배의 목소리가 메아리처럼 공명한다. 나도 그랬다. 취미는 뭔가 끈질기게 그러면서도 집요하게 하고 있는 거란 생각. 그래서 2~3일에 한 권씩 읽어대는 통에 이제 후배의 목소리는 옅어졌다.
한데 하고 싶은 걸 짧든 길든 재미있든 없든 '해보는' 게 취미라는 말에 다시 생각해 본다. 그림을 그려보겠다고 타블렛도 사고 관련 책도 사고 오프라인 교육도 서성거려 봤지만 마음뿐 행동에 옮기지 못했다. 시간이 없어서, 피곤해서, 내 주제에 무슨 기타 등등의 핑곗거리를 끄집어 내서 그저 로망처럼만 떠받들었다.
오늘, 퇴근하고 뭐 하세요?
저자, 아니 작가 아니 아니 화가의 질문이 있었다. 잠시 응시했다. 딱히 "나는 뭘 하지?"라는 생각보다는 "뭘 해야 하나?"라는 생각이 먼저 들었다. 가뜩이나 사표는 가슴 팍에서 매일매일 데워지기만 하고 선뜻 내던지지 못할 정도로 진을 빼고 있는데 뭘 해야 하지? 뭐라도 할 수 있는 기력이 남아 있을 때 사표를 던질까? 뭘 할 수 있는 기력이 남은 채 퇴근한다는 게 부럽다.
"우리는 창조적인 활동을 통해 자신을 드러내고, 보여줌으로써 존재를 확인받으려고 한다." p22
특이한 사람이다. 사진 찍히는 것을 좋아하지만 새로운 사람들과 어울리기 어렵다는 사람. 관계가 솜사탕 기계에서 돌리기만 하면 솜사탕이 만들어져 나오는 것처럼 관계 맺기가 쉬운 사람 정도가 돼야 찍히는 걸 선호하는데 말이다. 관계 맺기가 수월하지 않은 나는 그래서 나는 모델보다는 찍는 편이다.
"오랫동안 그림을 그리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라고 고백처럼 회고하는 작가의 말에 "나도 그랬어요. 아주 오랫동안 그림을 그리고 싶었어요. 하지만 난 여전히 당신의 그림을 보며 부러워만 하고 있네요."라는 한숨이 나온다.
"'이번 주말에 연락할게'라거나 '일 마치고 연락할게'라는 희망 고문형 약속들을 거절했다. 누군가에게는 언제라도 만날 수 있는 좋은 사람이 될 수 있었지만, 정작 나는 어느 때도 편히 쉬지 못했다." p75
대부분의 직장인들이 그렇겠지만 작가의 고백 같은 말은 어쩔 수 없이 만들어지는 혹은 이어가야 하는 관계에 대한 피로도가 확 느껴진다. 어쩔 수 없이 지속해야 하는 접대용 멘트와 미소에 우리는 병들어 가고 있지 않을까.
내가 어떤 사람인지 나만 안다.
인생에서 칠할 정도는 내 의지와는 상관없이 돌아가는데 도대체 나를 안다는 게 어떤 의미가 있을까. 설사 안 다고 해도 이미 들어선 길에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서성이는 나를 볼 뿐이데, 그래서 더 서글픈데.
한데 작가는 인생의 무게를 덜고자 그림을 그리고, 그림을 그리면서 인생의 깊이를 깨닫는 것처럼 보였다. 그저 덮여버릴 색쯤으로 치부될 것들이 조색을 통해 중요한 색이 되는 것처럼 그저 취미쯤으로 여겼던 것들에서 인생이 풍요롭거나 깊이가 더해질 수 있다는 깨달음이 가슴 뛰게 했다.
"반복되고 지치는 일상 속에서도 반짝임은 있다. 반짝이는 순간이 있어 인생은 아름답다. 내가 그렇고, 모두가 그렇다." p259
울컥했다면 믿으실런지. 정말 매일매일이 똑같이 실망하고 답답하고 어쩔 줄 모르고 가슴에서 덥혀지는 것을 만지작거리는 일상에도 반짝임이 있다는 말은 그저 그런 위로가 아니라 숙제같이 엄청 큰 부담으로 다가왔다. "왜 있는 반짝임을 찾지 않는 거야!"라며 당장이라도 손을 잡아 끌 것 같았다. 그리고 사각사각 경쾌하게 울리는 연필 소리가 들렸다.
이 책은 누구나 예술을 할 수 있다는 이야기도 아니고 누구나 취미를 가져야 한다는 독려도 아니다. 그저 하고 싶은 게 있다면 할 수 있는 비전공자만 가질 수 있는 반짝임에 대한 행복한 이야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