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12회 수림문학상 수상작
'5천만 원'에 꽂혔다. 이런 고료의 수상 작가 필력은 도대체 어떤지 알고 싶었다. 저자 이릉은 15년간 스포츠와 대중문화 분야 기자로 전 세계의 현장을 취재했고, 현재는 집과 도서관을 오가며 글을 쓴다고 한다.
"그 순간 호기심은 무모함과 동의어였다."라는 뇌리에 박히는 문장처럼 워리어의 등장에 시간 태엽이 과거로 감겼다. WWE 건 WWF 건 관계없다. 그냥 프로레슬링이라고 하면 충분했다.
그리고 십 년은 고이 묵혀둔 스트레스를 한방에 날려버릴 박치기왕 김일의 번쩍이는 머리통에 열광했던 시절이었다. 이마를 타고 흐르는 피가 눈으로 턱으로 흐르는 채로 머리통을 박살 내고야 말겠다는 듯 안토니오 이노키의 머리칼을 잡고 내리꽂는 모습은 진짜 레슬링의 세계였다.
정말 빨려 들어 숨 쉴 타이밍을 놓치게 된다. 탄탄한 이야기에 그가 직접 달았다는 그 시대의 주석까지 레알 레슬링 덕후로 인정할 수밖에 없다. 주석만 읽어도 타임머신을 탄 것 같았다.
언어의 유희가 폭풍처럼 몰아치는 문장에 시종일관 피식거리면서 그 안에 담긴 의미를 찾아 몇 번이고 반복해서 읽는 통에 곤란한 내 문해력을 다시 깨달았다.
남일의 인생이 망가지고 멍청해진 이유를 듣다가 문득, 같이 머리를 다쳤어도 남일이 워리어를 흉내 내던 중학교 시절, 입에서 담배 냄새가 절었던 선배에게 높이뛰기 매트에서 땅바닥으로 내동댕이 쳐서 그렇게 됐든, 나무던가 옥상이던가 아무튼 높은 곳에서 떨어져 그렇게 됐다는 코요태 김종민과 같은 처지와 같은데 남일은 멍청하지만 멍청한 걸로 끝나고 김종민은 멍청하지만 끊임없이 천재일지 모른다는 의혹을 남기는 멍청한 걸로 다르다는 점이 그를 좀 더 불쌍하게 만든다는 생각이 들었다.
또 문득 2011년 11월 세계 7대 자연경관 투표에 제주도 행정력이 빛난 결과로 211억이 넘는 ARS 투표 비용을 혈세로 메꾼 사실을 대놓고 까는 건 엄지척이다. 게다가 그런 결과를 얻어내고도 홍보나 관광객 유치에 소극적이었다는 걸 한 번 더 까는 것에 다시 한번 엄지척했다. 당시 분명히 홍보했을 텐데 기억을 못 하는 걸 보면 확실히 효과는 없었다.
"나 같은 보수 인사는 보수만 제대로 주면 어디서든 어떤 말이든 할 수 있지. 무보수였다면 가지 않았겠지." 107쪽9_#16
아까운 세금 낭비 같은 메시지나 보수 받는 보수 같은 놈들 이야기도 아주 자연스럽게 녹여낸다. 참으로 멋지다!
“거울 속에서 난, 늘 다른 나를 봐 왔었다. 나를 보고 있을 때도, 내가 본 건 내가 아니었다. 나 너머의 나를 바라봐 왔고, 늘 나 이상의 나를 꿈꿔 왔다. 그래서인지, 오랜만에 거울을 통해 보는 지금의 내가, 나는 마음에 들지 않았다. 언제나처럼 다른 누군가가 거울 속에 나타나길 바랐지만,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하는 수없이 나는 거울 속의 나를 응시했다.”
177쪽_#27
높이뛰기 메트에서 내동댕이쳐진 중학생 이후 남일은 멍청하다거나 한심하다는 시선으로, 변했다고 평가받는 자신이 진짜 그렇게 변한 자신으로 여기며 살아왔던 순간이 워리어의 티셔츠를, 그것도 영국 냄새가 잔뜩 묻어나는 그런 티셔츠를 입는 것으로 현재의, 변한 모습 이전의 모습이 아닌 마흔일곱 살 자신의 모습을 본다는 것은 어떤 기분일까 생각한다. 쓰고 다시 읽어보니 좀 헛갈리지만 그래도 어떤 모습이 진짜 자신인지 헛갈리는 혼란스러운 상황에서 갑자기 남일이 짠해졌다.
이후 게스트 하우스 로비에 설치되는 링과 모여드는 레슬러와 관중들의 모습은 드디어 이 이야기가 판타지의 세계로 절정으로 치닫는 것을 실감하게 하는데, 그런데 또 한편으로는 이게 진짜 판타지인가 하는 생각도 슬쩍 들어서 눈을 뗄 수 없고 정신을 놓을 수 없는 현실과 너무 닮은 링의 세계라는 점이 막 서글프다. 링은 놀이터가 아니고 세상도 그렇고 우린 링이든 세상이든 서 있는 이유 자체를 잊으면 안 되는데 그게 자꾸 잊는 게 문제다.
마지막은 결국 쇼가 아닌 다큐로 마무리되는 이 소설에서 울컥하고 말았다. 다름 아닌 작가가 작가의 말을 빌려 한 말 때문인데, 그는 이 소설을 K-판타지 중장년 성장 소설이라 했고, 그 속 뜻은 "남녀노소 상관없이, 삶에서 길을 잃었다는 생각이 드는 분이 이 소설을 읽으면 좋겠다."라고 연합뉴스 인터뷰에 했다는 말 때문에 그랬다. 55세인 나는, 요즘 길을 잃었다고 생각돼서 나도 모르게 링 밖으로 밀려나 있는 것 같아서, 지금 이 소설은 내겐 쇼처럼 느껴지는 삶을 쇼가 아니라고 확인 시켜주는 것 같아서 눈물 나는 소설이다. 정말 강추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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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스24 리뷰어클럽 서평단 자격으로 도서를 제공받고 작성한 리뷰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