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장한 다는 것

장애인 아빠와 가족의 농밀한 이야기

by 암시랑

인생은 노력하지 않으면 얻을 수 있는 것이 없기에 난 결혼도 무척 열심히 그것도 최선을 다해 노력했다.

애니메이터로 일할 때 작품 마감은 이틀이 멀다 하고 철야를 하게 했다.


철야를 해야 했던 무수히 많은 날 중 그때도 이틀 연속으로 밤을 꼴딱 새워야 했다.

눈을 뜨고 있다기보다 벌어져 있다는 게 맞았다.

눈꺼풀을 손가락으로 들어 올리고 봐야 할 정도로 피곤이 찌들었던 그 날.

마음에 둔 여인네의 전화를 받았다.


오빠 정동진 차량 봉사 가줄 수 있어?


피곤이 덕지덕지 붙은 몸은 거의 바닥에 꽂힐 지경이었다.

생전 정동진엔 가보지도 않았지만 아주 가깝게 느껴졌다.

그렇게 여인네 말 한마디에 차를 몰았다.

그때 내게 결혼은 죽음을 불사했었으리라.


일일이 다 열거하기도 힘든 파란만장한 사연들은 나중에 기회가 있으면 따로 공개하기로 하자.

어쨌든 그런 노력의 결실로 난 세계에서 제일 이쁜, 때론 엄마보다 살짝 못할 때도 있지만 뭐 대체적으로 더 괜찮은 그런 엄청난 미모와 지성을 지닌 아내와 결혼했다.(쓰고 보니 오해의 소지가 있을지도 모르겠다. 그 마음에 둔 여인네와 지금 아내는 다른 사람이다.)

친구들은 인간 승리라 했다.



그리고 아이들이 둘이나 생겼다. 딸과 아들. 이제는 다 커서 18살과 12살이 되었다.


아이들이 세상에 태어나면서 당황스러운 게 한 둘이 아니었다.

누군가 그랬던 것처럼 아빠가 처음이니 당연히 그런 것이겠지만 난 그들보다 조금 더 당황스러울법한 중증 장애인 아닌가.


큰 애도 그랬고 둘째도 그랬다.

뭐 입장을 바꿔보면 아이들도 그랬을 수도 있었겠다.

태어나서 눈 뜨자마자 처음 본 아빠가 장애인인 데다가 감격에 마지않아 자신들을 안아 들고 벅찬 눈물을 흘려주는 것도 아니고.



아이들을 안아 든다는 건 상상도 할 수 없었다.

불편한 팔, 행여 삐끗해서 떨어트리면?

힘 조절이 안 되는 강직성 장애로 아이를 조여버리면?

이런저런 마음이 앞서 난 그저 옆집 아저씨도 다 안아보는 내 아이들을 안아주지 못했다.

'지켜만 보는 것도 너무 행복해'라는 말도 안 되는 스스로 하는 위안은 그저 자책을 감추기 위한 과도한 포장일 뿐이다.

그럴 때마다 가슴은 시베리아 벌판만큼이나 춥고 황량해졌다.

아이들이 조금 더 자라자 당연하겠지만 더 안아보기 어려웠다.

그땐 아예 무게를 감당할 수 없었으니까.


아이들이 원하지 않은 게 아니라 내가 지레 거리를 둔 것이다.

그래서일까? 아이들은 아빠와 스킨십 같은 건 하려 하지 않는다.

익숙해졌지만 그래도 때때로 너무 서운할 때가 있다.

하지만 하이파이브 한번 하겠다고 번쩍 들어 올린 손이 벌벌 떨리는 꼴을 보이는 것보다 낫다고 생각해서 시도하지 않는다.


오랜만에 가수 이승철이 TV에서 더없이 행복한 표정으로 나왔다.

한동안 성대 수술 후 마음고생이 심했다던 그가 딸아이가 '쪽' 하고 달라붙을 때 가장 행복하다고 했다.

한데 그 말이 자꾸 귀에 달라붙는다.


껌딱지처럼 아빠 곁에 붙는다는 딸과 아빠 사이의 감정이 뭘까.

어떤 기분이고 어떤 감촉이며 어떤 냄새가 날지 도무지 상상이 안된다.

해본 적이 없으니 나는 모를 수밖에.


그래서 아파 누워 있을 때 딸이 머리에 얹어 주는 손이나

밤늦도록 식탁에 앉아 책을 보는 내 어깨를 툭툭 쳐주는 손이나

아빠의 불안한 걸음에 팔을 슬쩍 내밀어 줄 때처럼

어쩌다 딸아이가 보여주는 작은 스킨십에도 나는 세상에 다시없을 감동의 쓰나미가 들이친다.

그렇다고 아이들이 아빠를 창피해하거나 피하거나 하진 않는다.

그저 어릴 때도 하지 않았던 스킨십이 다 커버린 지금은 더 하기 어렵다는 것일 뿐.

더 이상 아이들과 몸에서 몸으로 전해지는 부녀, 부자간의 감정은 나누진 못한다는 것일 뿐.



아들이 유소년 축구클럽에 다니기 시작하고 나서 박지성이 되겠다고 오진 꿈을 키웠다.

4살 때였다. 그때 아빠를 필요로 했었다.


아빠, 나랑 축구하자.


이 말에 덤덤한 척했지만 얼마나 미안하던지.

갑자기 바닥이 푹 꺼지면서 꿈틀대던 감정선이 끝도 없는 나락으로 떨어졌다.

짧은 순간이었지만 억겁이 시간이 흐른 것처럼 숨이 멎었다.

하얗게 변색된 아내의 놀란 얼굴이 내 시선과 마주쳤다.


승우야, 축구는 네 친구 아빠랑 하는 거야.


유소년 축구 교실을 운영하는 녀석의 친구 아빠에게 수고를 떠 넘겼다.

아들은 이 축구 교실에서 축구를 한다. 친구 아빠와 셋이서.

담담하고 또박또박한 내 말에 아내는 평정심을 찾았다.

그렇게 아이들과 할 수 있는 것과 없는 것의 구분을 지었다.


주말에도 특별한 행사가 아니면 내가 알아서 어딜 데려가는 경우는 거의 없다.

그렇다 보니 아이들은 주말만 되면 "우리 어디 가?"를 확인한다.

그렇게 자란 아이들이 18살, 12살이 되었다.

그중 18살인 딸아이는 혼자 지하철을 타고 서울 시내를 돌아다니는 것도 무서워한다.

그런 아이를 볼 때면 마음이 착잡하다.

이젠 아이들은 주말에도 집을 벗어나려 하지 않는다.



걷는 것보다 뛰어다니는 일이 더 많았던, 말 그대로 팔딱팔딱하던 내 인생이었다.

고작 장애가 좀 생겼다고 요즘은 휠체어 건 소파 건 어디라도 엉덩이만 붙이려는 든다.

나만 편하고 좋으면 되는 줄 알았는데 아내나 아이들은 그런 나를 위하느라 그런 것들을 다 참아주고 있다는 생각이 들어 미안해진다.


결혼하겠다고 꽤나 노력했는데 결혼하고 나니 행복하려는 노력을 거의 하지 않은 건 아닌지 반성해 본다.

그동안 외식은 가족끼리 하는 거 아니라고 우겼다.

근데 외식이라도 하면 좋겠다는 마음이 들었는데 하늘이 돕지 않는다.

하필 비가 오다니.(이 글을 쓸 때는 비가 왔다.)

비가 올 땐 휠체어로 밖을 나돌아 다니는 건 쉽지 않다.

그래서 이번엔 패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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