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AMUGAE MUSIC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아무개 뮤직 Mar 31. 2016

만들어진 우상이 주류가 되다.

멋진 스타가 탄생한다면 그건 그것대로 즐거운 일이 아닐까?


“가수가 노래를 불러야지 왜 홀딱 벗고 나오냐?” 밥상에서 아버지는 말씀하셨다. TV에서는 여성 아이돌 그룹이 한창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아버지, 불편하시면 뉴우-스를 틀겠습니다.” 난 리모컨을 잡았다. 그 순간 아버지는 “잠깐만 기다려봐.”라며 날 멈췄다. 그렇게 우리 가족은 다 함께 음악방송을 보며 식사를 해야 했다. 


물론 위 대화는 허구다(우리 아버지는 ABBA 팬이다). 하지만 음악에 관심이 있고, 이런저런 커뮤니티를 돌아다니는 독자이라면 이 글의 첫 문장과 같은 말을 적어도 한 번은 들어봤을 것이다. ‘아이돌이 무슨 가수냐’라는 식의 말을 말이다. 하지만 그런 우려의 목소리와는 별개로 음악, 방송 등 접근성이 높은 문화 산업은 이미 아이돌이 없이는 생존을 위협받을 위기에 처해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아이돌이 없어진다면 유수의 기획사들이 문을 닫을 것이며 여러분들이 평소 즐겨보던 TV 프로그램도 태반은 종영을 피할 수 없을 것이다. 문화 생태계의 큰 줄기가 되어버린 이들을 언제까지나 ‘과도한 상업주의가 낳은 저급 문화’라며 천대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더군다나, 다들 돈 좋아하잖아? 그런데 돈 벌려고 기획사가 만들어낸 아이돌은 싫다니. 사촌이 땅을 사면 배가 아프다곤 해도, 이제는 좀 더 열린 시각에서 어떻게 하면 바람직한 우리네 문화에 이바지할 수 있을까 고민해볼 시간이다.


마침 여러분에게 보여주고 싶은 좋은 사례가 있다. 그룹 ‘여자친구’이다. 환상 속의 동물의 이름을 한 이 신비로운 걸그룹은 2015년 미니앨범 <Season of Glass>로 데뷔를 했다. 타이틀곡은 ‘유리구슬’이었다. 난 저 노래를 군대에서 처음 들었다. 당시에는 ‘또 반짝하다 사라질 그룹이 나왔군’이라며 곡을 재생했는데 좀 놀랐다. “뭐야, 좀 좋잖아 이거?” 


흡사 J-Pop을 연상시키는 선율이 여타 양산형 그룹과는 달리 신선하게 느껴졌다. 하지만 결국 이마저도 한 귀에 들리는 후렴으로만 승부를 보려는 후크송일 뿐이었다. 그렇게 몇 개월이 지나 민간인이 된 후, 또다시 이들의 신곡이 발표가 되었다. 제목도 희한하더라. ‘오늘부터 우리는’이라... 부제가… 미 구스 따… 뚫훍 뭐라고? Me Gustas Tu라는 괴상한 이름이 붙은 노래는 전작과 별반 다르진 않았다. 여전히 후크송이었으며, 여전히 교복을 입고, 여전히 상큼함을 어필하고 있었다. 2015년 1월의 ‘유리구슬’, 7월의 ‘오늘부터 우리는’, 그리고 다시 6개월이 지난 2016년 1월, ‘시간을 달려서’가 공개되었다.          

반응이 뜨겁다. 더 이상 이들을 양산형 걸그룹으로 취급하는 기사는 없는 듯하다. 모두가 호평일색이다. 곡 자체의 완성도가 뛰어난 것도 한몫한다. 자극적인 후렴구로 승부를 보려 한 나머지 후렴 외의 부분이 부실했던 전작들과는 다르게 ‘시간을 달려서’는 내실 있는 벌스(Verse : 1절, 2절, 3절의 그 ‘절’)가 멋진 후렴구로 수렴하고 있다. 짜깁기에 가까웠던 ‘유리구슬’, ‘오늘부터 우리는’과 비교했을 때 비로소 온전한 하나의 노래가 됐다는 느낌이다.

하지만 뜨거운 반응에는 다른 이유가 있다. 소신을 잃지 않고 하려 했던 것을 밀어붙인 소속사의 저력 덕분이다. 만약 이전 음반의 뜨뜻미지근한 반응에 실망해 성적 매력을 어필하는 방향으로 선회했다면 분명 대중으로부터 비웃음을 샀을 것이다. “거봐. 얘네도 뻔하다니까.”라면서요. 하지만 그러지 않았다. 물론 애초에 ‘학교 시리즈’라는 이름으로 기획된 트릴로지였다고는 하지만 그런 거야 조용히 모른 채 하면 그만이지 않은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초기의 기획 의도를 밀어붙였단 건 그만큼의 믿음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을 것이다. 대중은 그 믿음, 그들이 보여준 나름의 색깔에 응답을 해준 것이고 말이다.       

‘섹시 콘셉트’라고 해서 무조건 저급하다는 뜻이 아니다. 문제는 그것을 얼마나 자신의 것으로 만들었느냐에 달려 있다. 마침 이에 걸맞는 사례가 있다. 작년에 발매됐던 가인의 <Hawwah>라는 음반이다. 아담과 하와라는, 대중음악과 전혀 어울릴 것 같지 않은 소재를 끌어와 하나의 콘셉트 음반을 탄생시킨 가인은 여타 ‘섹시 여가수’와는 궤를 달리 한다. 가인이 보여주는 섹시함이란 선악과를 앞에 둔 하와의 고민, 뱀의 유혹 등을 표현하기 위한 도구로서 기능하고 있다. 성량이 뛰어난 건 아니지만 정확한 발음과 깨질 듯 연약한 음색은 한순간 소비되고 끝나버릴 성(性)이 아닌 진정한 관능이 무엇인가를 보여준다. 이쯤 되면 가인에게 아이돌이란 수식이 붙는 것이 적절한 지 고민이 된다. 

과연 여자친구나 가인이 음반을 내놓으면서 자신의 고민을 얼마나 음악에 녹여냈을지는 모르는 일이다. 어쩌면 그들이 콘셉트를 강요당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애당초 나의 생각이었건건 아니었건 간에 주어진 역할을 충실하게 수행했다는 건 부정할 수 없다. 작곡가가 따로 있고, 스타일리스트가 따로 있으면 어떤가. 우리의 눈과 귀를 즐겁게 해줄 멋진 스타가 탄생한다면 그건 그것대로 즐거운 일이 아닐까? 비록 그들이 ‘만들어진 우상’이라 해도 말이다.

매거진의 이전글 선우정아 - 그러려니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