웹툰 미지의 세계 속 음악.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15화에는 얼떨결에 친하지 않은 아이의 생일을 축하하게 된 미지가 있다. 친구의 친구로 미지와는 아주 잠깐 본 사이다. 부모님이 1억 2천짜리 전세 복층 원룸을 마련해주는 민혜미. 집에서 빔프로젝터로 영화를 보며 파티를 열 수 있는, 자신이 선택한 소수의 아이들에게 축하를 받을 수 있는 여자 아이다.
미지는 그 생일 파티에서 부모님에 대해 떠올린다. 가난하고 아픈 부모님에 대해. 부모님은 미지에게 해줄 수 있는 게 적고 미지가 부모님께 해줄 수 있는 것도 적다. 미지가 그 아이의 집에서 먹고 마시는 동안 미지의 부모님은 가난하고 힘없이 잠들 것이다. 마치 미지의 엄마가 카톡 끝에 언제나 붙이는 줄임표처럼.
이 에피소드의 제목은 “절대 탄생 묵시록”이다. 이 구절은 1997년 TV 도쿄에서 방영된 애니메이션 “소녀 혁명 우테나(少女 革命 ウテナ)”의 삽입곡 “절대 운명 묵시록(絶對 運命 默示錄)”에서 찾아볼 수 있다. 가사 중 ‘나의 탄생 절대 탄생 묵시록(わたしの 誕生·絶對 誕生·默示錄)’이라는 부분이다. 이 노래는 결투 장면에서 나온다. 락 기타에 혼성 합창으로 세기말 특유의 장엄하고 긴장감 있는 분위기가 느껴진다. 묵직한 주제를 독창적으로 풀어내던 애니메이션답게 여타 애니메이션의 배경 음악과는 퍽 다른 구조로, 곡 후반부에는 어떤 압도가 느껴지기까지 한다.
16화는 미지의 신입생이던 시절 이야기다. 어정쩡하게 겨우겨우 학교생활을 해내고 있는 아웃사이더 미지. 그런 미지가 학교에서 유일하게 어울리는 학생들은 음악 동아리 소속이다. 미지가 가입한 음악 동아리에서는 정기적으로 음감회를 갖는다.
힙한 음악 들으며 고급 취향 사람들과 대화를 나누는 건 언제나 좋다. 고급 생산물 그 자체가 주는 만족감, 고급 취향을 향유하고 있다는 키치적 감정, 함께하는 사람들에 대한 동경……. 16화의 제목은 The Smith의 Panic이다. 팝 음악을, 디스코를 불태워버리자(Burn down the disco). 축복받은 디제이를 교수형에 처해버리자(Hang the blessed DJ). 왜냐하면 그들이 트는 노래는 내 삶에 대해 아무런 이야기도 해줄 수 없기 때문이다(Because the music they constantly play, It says nothing to me about my life). 대신 외국 인디 음악을 듣자. 그 편이 미지에겐 훨씬 행복한 일이다.
18화: Jake Bugg - Lightning Bolt
“이런 거 느낌 없다. 라이트닝 볼트로 함 가자.”
음감회가 끝나고 모두 힙한 노래에 들떠 있는 찰나에 동아리 선배가 툭 내뱉는다. 여기서 말하는 라이트닝 볼트는 Jake Bugg의 노래 “Lightning Bolt”일 것이다. “Lightning Bolt”는 장르를 넘나드는 음악이 성행하는 요즈음에 정통 브리티시 포크로 인기를 얻은 곡이다. “Lightning Bolt”가 수록된 Jake Bugg의 데뷔 앨범 “Jake Bugg”는 UK 앨범 차트 1위에 오르기까지 했다. 비틀스의 초기 히트송을 연상시키는 “Lightning Bolt” 앞에서 힙한 음악 나부랭이는 느낌 없어져 버린다. 그리고 미지는 집에 가서 유튜브로 이 노래를 찾아봤을 것이다. 조금 더 느낌 있는, 조금 더 멋진 음악을 알기 위해서.
“Jake Bugg”에 대한 자세한 리뷰는 여기에서 더 볼 수 있다.
19화: Cocteau Twins - The Spangle Maker
19화의 제목 “Spangle Maker”는 에티리얼 장르의 어른들(Elders of the Ethereal genre. 지극히 가볍고 여린 어른들이라는 뜻으로도 번역된다.)이라 불리는 Cocteau Twins의 노래다. 잔뜩 울려 퍼지는 기타 소리와 반복적인 코러스가 인상적이다.
이 에피소드에서 미지는 팔찌를 만든다. 왜냐하면 파는 팔찌는 비싸기 때문이다. 하지만 악세서리를 만들어본 사람은 알 것이다. 그게 정말 귀찮고 생각보다 돈 많이 드는 짓이라는 걸. 동대문 종합 상가 안에서는 길을 잃기 일쑤고 자잘한 부자재는 챙기기 번거롭다. 심지어 싸 보이던 부자재는 몇 개 사다 보면 금세 몇만 원을 넘겨버린다. 게다가 그렇게 열심히 만든 악세서리를 팔려고 해면 막상 안 팔린다. 가격만 물어보는 사람 가끔 있을 뿐이다. 다행히 사가는 사람이 한 두 명 있긴 하다. 그러나 나머진 다 미지에게 관심 0이다. 미지가 악세서리를 만들면서 상상하는 일은 절대 일어나지 않는다.
미지는 어떻게든 아름다운 것을 갖고 싶어 하고 그것을 통해 멋진 일이 일어나길 바라지만 가난하기 때문에 불가능하다. 19화에서 미지의 모습은 빈털터리에 숨이 가쁜(Broke and winded) 스팽글 메이커나 다름없다. 공주의 눈물방울이 떨어지면 보석이 된다는 어느 동화와는 달리 미지의 현실은 처참하다.
23화는 침대에서 Suede의 “The 2 of Us”를 듣는 미지의 모습으로 시작한다. 미지는 그저 그런 섹스 파트너와 섹스를 한 뒤 노래를 듣는 중이다. 미지의 엄마는 미지가 잘생기고 건전하고 건장한 남자애랑 사귀기를 바란다. 미지라면 충분히 그럴 수 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미지는 그렇게 하지 못한다.
미지가 할 수 있는 건 집은 좀 살지만, 키 작고 소인배인 남자애와 애정 없는 섹스를 하는 것 정도이다. 그리고 누워서 좋아하는 밴드 음악을 들으며 자신의 실수를 바라보는 것 정도이다(Lying in my head watching my mistakes I listen to the band). 사랑을 이룰 수 있었을 거라는 가사의 밴드 음악을 듣고 있다는 노래(I listen to the band they said that it could be the 2 of us)를 들으며 절망하는 것 정도.
- 다음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