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화 “시급이 얼마예요”

시즌 ⌜4⌟ 모두 아름 다 왔다

by 아문선

중동 건설 노동자는 행복한 가정과 나라의 발전을 위하여, 머나먼 타국에서 땀 흘리고 있는 우리의 자랑스러운 국민입니다

-밀물|1983년 6월호|이승윤|해외건설협회장-



오일달러는 돼지 저금통으로 변신되었다

첫해 오일달러는 총채무가 얼마인지도 모르는 부모님 채권자가 통장을 가로채고 남은 것은 "고맙다"는 인사였다. 미용실을 운영하던 누나는 어린 공고생이 안쓰럽다며 커다란 돼지저금통에 동전을 모았다. 그렇게 일 년 동안 모인 돼지저금통의 묵직함은 허망했던 한 해를 위로하기에 충분했다. 채무 변제로 어머니가 웃을 수 있고, 돈이야 또 벌면 된다는 희망이 있어서다.


다음 해 들어온 오일 달러는 단칸 월세방을 방 두 칸 전세로 옮기는 데 쓰였다. 또 궁색한 살림살이에 이것저것 생활비와 동생들 학자금으로 보태고 나니, 통장은 금세 바닥을 드러냈다. 결심이 필요했다. 3년 차부터는 회사에서 운영하는 "전액 예치" 방식으로 급여 수령 방식을 바꾸기로 했다. 어머니와 가족들의 섭섭한 눈빛을 마주하는 건 미안했지만, 중동 건설 현장에서 참고 버텨낸 하루하루를 떠올리면 독한 선택을 할 수밖에 없었다.


대학졸업해도 그 돈 못 받습니다

1982년 1월, 대학 면접 날이었다. 면접장으로 꾸며진 강의실에는 학과장인 노 교수님과 서너 명의 교수가 앉아 있었고, 면접 대상 학생 열 명가량이 대기하고 있었다. 호명이 되면 자리에 앉아 교수들의 질문을 받았다.

"그래, 학생은 대학에 늦게 진학하는 이유가 먼가?"

미리 준비된 멘트를 한치 오차도 없이 힘차게 답변한다.

"네. 학문을 갈고닦아 인류의 발전에 기여하고 싶습니다."


이거 저거 둘러보신던 학과장님 또 머뭇거리듯 질문한다.

"지금 월급 얼마나 받나?"

자신감 넘치는 큰 목소리로 답변한다.

"네! 팔십만 원 받습니다" 돋보기 너머로 눈을 동그랐게 뜬 교수님

"헛소리 그만두고, 그냥 그 직장 계속 다니게"

면접 교수님은 대학 진학이 헛일이라고 한다.


그도 그럴 것이, 대학 면접을 보던 1981년에는 공무원이나 일반 직장인의 월급이 10만 원 미만이었고, 학과장인 교수님의 한 달 월급도 15만 원이 채 되지 않았다. 그로부터 한참이 지난 1989년 1월, 우리나라에서 최고 수준이라는 L그룹에서 첫해 받은 월급은 45만 원이었다.


기능직 채용은 1년 단위 계약제였다. 첫해 공고생의 계약 시급은 시간당 1.25달러였다. 그러나 1977년 3월 13일, H건설 주베일 현장에서 저임금으로 인한 분규가 발생하자, D산업도 일괄적으로 시급을 15% 인상하여 1.45달러로 조정했다. 게다가 중동 건설 현장의 급여는 달러로 산정되지만, 국내 입금은 원화로 이루어진다. 1977년에서 1984년 사이 원·달러 환율이 170% 절하되면서, 결과적으로 급여는 환차익으로 인해 170% 증가하게 되었다.


구체적으로 계산해 보자. 사우디아라비아 취업 첫해인 1977년, 한 달 급여 산정 시간은 대략 350시간이었다. 여기에 시급 1.45달러를 곱하면, 한 달 급여는 약 507달러였다. 이를 원화로 환산하면 약 25만 원 정도였다. 당시 9급 공무원의 월급이 5만 원 정도였고, 구로공단 가발공장 노동자의 급여가 3만 원 남짓이었던 것을 감안하면, 첫해 통장에 꽂히는 25만 원은 9급 공무원의 5배, 구로공단 근로자의 8배에 달하는 큰돈이었다. 일확천금이라는 표현도 과언이 아니었다.

¨1977년 원/달러 환율은 484원, 1980년 659원, 1984년 827원


생활력 강한 남자는 부업도 한다

목공 김 씨, 조적공 박 씨, 배관공 권 씨, 전기공 이 씨, 그리고 3~4명의 잡부가 한 팀을 먹는다. 휴일이면 현지인의 집을 짓거나 수리하는 일을 하는 것이다. 물론 회사에서는 이를 금지했지만, 생활력이 강한 몇몇은 휴일 아르바이트로 귀국 준비를 했다. 카메라도 사고, 부인에게 줄 스위스제 시계도 사고, 독일제 옷감도 샀다.


더욱 확실한 오일 달러는 Overtime이다. 야간작업이나 휴일근무를 전문으로 하는 것이다. 이경우 근무시간보다 1.5배 또는 2배까지 근로시간이 늘어난다. 재수가 좋으면 야리끼리|도급제|도 할 수 있다. 즉 일정 공사를 끝내면 약정된 급여산정시간을 Time Sheets에 달아 주는 것이다.


캠프 아르바이트도 있다. 동장을 맡거나 더 큰 직책인 새마을 위원 또는 새마을 위원장이 되면 수당이 따른다. 만약 이발 기술이 있다면 이발소 아르바이트도 괜찮은 돈벌이다. 이발비가 5 리얄 정도이고 하루에 5 사람이면 25 리얄 , 한 달이면 750 리얄 약 10만 원이다. 급여의 30~40% 정도 수입이다. 매점이나 도서실 그리고 휴일 행사 아르바이트도 한다. 음지에서 하는 아르바이트도 있다. 춤선생이다. 차차차, 지르박, 블루스를 가르치는 아르바이트다.


해외 취업자에게 정부가 주는 특혜도 있다. 첫 채는 국민주택 분양에 최우선권을 준다. 민간분양 주택도 전체의 10%를 해외 근로자에게 우선 분양한다. 만약 해외 취업자가 불임수술을 했다면 이건 최최우선이다. 또한 근로소득세 감면이다. 국내 근로자 10만 까지 소득세 면세 하지만, 해외근로자는 50만 원까지 면세 혜택을 준다. 해외구입 일상 용품 면세도 있다.


은행도 가세한다. 오일 달러를 유치하기 위해 일반 적금보다 1~2% p 높은 금리를 제공하는 경우가 많았다. 저축 금리 수준이 일반은 연 10~12% 였지만, 해외 노동자가 벌어들이는 오일달러로 저축하는 경우 연 12~ 14% 이상이었다. 여기에 세금 감면, 환율 우대 더한다. 정부는 해외에서 벌어들인 달러를 국내로 송금하도록 유도하기 위해 우대 금리를 적용한 것이고 은행은 건설 노동자들의 장기 적금으로 객의 운영 자금을 확보할 수 있기 때문이다.


공고생의 재테크는 학생 수준이었다

재 텍크에 밝은 부모님이나 형제가 있었다면, 우선 강남에 집을 샀을 것이다. 막 강남을 개발하던 시기에 압구정의 아파트 국평도 2,000만 원 남짓이었다. 즉 중동 건설 노동자도 2년이면 강남 아파트를 살 수 있었다. 그리고 더 이재 밝은 부모님이 계시다면 잠실 뽕밭을 마구 사들였을 것이다.


재테크에 맹탕인 가족과 공고생은 지방 도시에 집하나 사고, 약간의 사업자금을 건진 게 전부다. 더욱 안타까운 재테크는 시골 부모님의 논밭을 사드린 친구들이었다. 동네에선 효자라며 칭찬이 자자했지만, 정작 그 땅은 지금까지도 팔리지 않고 있다. 물론 재테크에 성공한 공고생 친구도 있고, 7년으로 모은 오일달러를 알량한 사업 한다고 꼴랑 까먹은 친구도 있지만, 평균적으로 집하나 사고, 그렇게 사는 수준이다.


사막의 오일 달러는 풍족함이라고 말하기는 어렵지만, 남보다 일찍 서울에 아파트 사고, 두 자녀 미국 유학까지 마치도록 마중물이 되어준 고마운 존재이다. 하나 더 있다. 중동 건설 노동자를 그만둔 지 10년쯤 뒤, 사우디아라비아 정부에 납부한 사회보장기금을 돌려받아 "마이 카"의 꿈을 이루었다.




참고 문헌 및 인용 관련 정보는 머리글에 게시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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