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즌 ⌜4⌟ 모두 아름 다 왔다
-밀물|1985년 12월호|해외건설 역군들에게|이은미|시인-
▬노동자의 공항 패션
여기는 김포국제공항 입국장, 밤새 날아온 대한항공 보잉 747은 수백 명의 중동취업자를 풀어놓는다. 그리운 남편•자식•형제를 기다리는 가족들은, 노동자들의 소지품과 이민가방을 풀어 헤치는 세관원의 만행에 분개하며, 자동문이 열릴 때마다,
"보인다" 그리고
"나온다"를 외친다.
목에는 F1.4 일안렌즈 카메라, 한 손에는 테이프로 두툼하게 포장한 더블 덱크 카세트 라디오 그리고 다른 한 손엔 귀국 가방을 끌고 빠져나온다. 귀국 가방에는 독수공방 부인을 위해 샤낼 넘버 5•랑콤 콤팩트• 베르도 옷감 등이 쏟아져 나오고, 좀 럭셔리한 가방에서는 스위스 오메가나 일본 세이코 시계가 튀어나온다. 자녀들을 위한 선물로는 소니 워크맨이 최상품이고, 좀 어려우면 손목시계로 퉁친다.
중동에서 돌아온 20대 노동자의 패션은 어딘가 과감해졌다. 갖추어야 할 기본 품목은 라이방 선글라스, 엘로우 골드 금목걸이, 쌍마 청바지에 Lee 로고가 선명한 와이셔츠이다. 와이셔츠 윗주머니에는 멀리서도 또렷하게 보이도록 여권을 꽂아두고, 때로는 뒷주머니에 타임지를 꽂은 채 맹물 다방에 나타나기도 한다.
어두운 조명 아래 번뜩이는 라이방 선글라스, 10돈쯤 되어 보이는 18K 금목걸이, 그리고 햇볕에 검게 그을린 얼굴이야말로 그가 중동 취업자임음을 말해주고 있었다.
▬카메라 와 카세트 라디오
중동의 노동자의 시간은 다르게 흐른다. 일반 상대성 이론에 따라, 시간은 고정된 흐름이 아니라 속도와 중력에 따라 달라지는 물리적 개념이 적용된다. 일 년 계약 기간이 반으로 꺾이는 6개월까지의 시간 길이는 정상이다. 그리나 중력이 점점 커지는 귀국 100일 지점에 이르면, 빨간 X 마크가 시작되면서 시간은 놀라리 만큼 길어진다. 자 이제부터 귀국 준비 시간이다.
들고만 가면 한국사람들이 환장하는 "물 건너온" 물품을 준비하는 것이다. 직구로도 원하는 해외 물건을 살 수 있는 세대에게는 납득이 어려운 이야기이지만, 외화가 부족으로 산업 원자재도 엄격한 수입허가를 받아야 했다. 일반 가전 전자제품이나 소비재의 수입을 금하고 있는 시대라, 중동 건설 특수 그리고 20만 중동 건설 노동자들이 하나씩 들고 오는 귀국 물품들은 "물 건너온 귀한 물건"이 된다.
면세가 허용하는 품목과 수량에 따라 귀국준비를 한다. 카세트 라디오 1대•카메라 1대•비디오테이프 3개•시계 1개•향수 1병•볼펜 및 샤프펜슬 1타•담배 10갑•주류 1병•우황청심환 10정•테니스 라켓 1개•알부민 3병이 중동 건설노동자가 면세로 가져올 수 있는 품목과 수량이다. 이 범위 내에서 선물용과 소장용을 잘 구분하여 준비를 시작한다.
자가 준비도 한다. 휴일에 사막에 숨어있는 장미석을 찾거나 홍해 바다로 뛰어들어 산호도 채취한다. 장미석이나 산호초가 부러지지 않도록, 화장지를 물에 풀어 정성스럽게 감싸 채우는 아이디어도 등장한다. 솜씨 좋은 사람들은 목각이나 아크릴 프레임을 정성껏 만들어 가족사진을 끼워 넣는다. 새로 장만한 집 거실 한편에 그 사진틀을 놓는 상상만으로도, 저절로 콧노래가 흘러나온다.
그리고 이 사람 저 사람 인사치레로 건넬 목적으로는 캠프에서 한 달에 2개씩 지급하는 "LUX" 비누도 아끼고 아끼어 모은다. 좀 섭섭한 분들은 던힐, 말보로, 카멜 등 양담배가 제 격이다. 요즘 갑자기 나타나는 주차 단속원처럼, 양담배 단속원이 있던 시절이라, 양담배도 귀한 대접을 받았다.
▬국산품 장려를 위한 쿠폰제도
1980년대 초, 칼라 TV가 막 도입되던 시기엔 "내 돈 내고 내가 사는" 것도 쉽지 않았다. 공급은 턱없이 부족했고, 수요는 폭발적으로 늘어나 공급자가 왕처럼 군림하던 시절이다. 그 가운데 중동에서 일하던 노동자들에게는 또 하나의 특혜가 주어진다. 바로 "쿠폰 제도"다. 지금은 삼성과 LG|금성사| 양강 체제이지만, 그 시절에는 대우, 아남, 대한전선도 한 다리 하던 시절이다. 해외 노동자를 유혹하는 광고 카피도 등장한다.
•귀국선물은 "금성칼라 TV 하이테크로" "선명한 자연색 금성 칼라 TV"
•현장감 넘치는 "칼라 TV 대우 슈퍼비전"
•절전 챔피언 이코노 빅 면세특전 삼성 "이코노"
•고향에 오실 때는 대한전선제품과 함께... "로열칼라텔레비전"
일반인은 줄을 서도 구하기 어려운 칼라 TV를, 중동 건설 현장에서 인수증|쿠폰|을 구매할 수 있었다. 해외 취업자가 해외에서 국산 가전제품 인수증을 갖고 귀국, 해당 물품을 국내 일정장소에서 찾아가는 제도이다. 품목은 컬러 TV, 오디오, 카메라, 휴대용 녹음기 등이다. 계약기간이 1년 이상인 경우 6개 품목을 1대씩 구매 가능하다. 중동 건설 노동자에 대한 배려와 동시에 외화 유출을 막고자 하는 목적이 있다.
▬못생긴 나무가 고향을 지킨다
귀국 가방을 꾸릴 때마다 구매 목록은 늘 비슷했다. 카메라와 카세트 라디오가 앞자리를 차지하고, 그해 유행 하는 물건이 뒤따랐다. 귀국 후엔 어떤 것은 가족의 일상이 되고, 어떤 것은 팔려나가거나, 망가져 버려진다.
각자의 운명에 따라 “물 건너온 귀한 물건”도 세월 속에 빛을 잃고 기억에서 희미해졌지만, 우연이라도 귀국 준비의 흔적이 찾아오면 콩닥거리던 설렘이 되살아난다.
•카메라는 돈이 궁해 팔아먹고,
•Hi-Fi 오디오세트는 딸아이가 젓가락으로 박살내고,
•전기 쿠커는 술꾼 아버지가 팔아먹고,
•이태리제 클래식 기타는 아내가 쓰레기 통에 던져 버리고,
•스웨덴 버너는 수십 년 잘 썼고,
•질 좋은 스페인제 가죽잠바는 집안 어른께 압수당한다.
장롱 옆 좁은 틈새에는 50년 세월을 버텨낸 마지막 잎새, 샴손나이트 서류가방 속에는 오래된 사진들이 잠들어 있다. 사진을 흔들어 깨우면, 모래바람이 불던 현장, 대추야자가 맛있던 오아시스, 물 반 고기반 홍해바다, 웃음이 넘처나던 캠프 그리고 그리운 사람들이 반겨준다.
"못생긴 나무가 고향을 지킨다"라는 속담처럼, 반짝이는 귀국물품들 사라지고, 방구석에 잠들었던 색 바랜 사진들이 중동 노동자로서의 추억을 붙잡아 주는..... 무엇보다 소중한 귀국 준비물이였다.■
◧참고 문헌 및 인용 관련 정보는 머리글에 게시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