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날은 마침 그의 생일이었다. 장마가 끝나고 연일 폭염경보와 열대야가 이어지는 칠월의 끝자락. 이런 더운 여름날이었겠지. 군인이었던 젊은 남편과 떨어져 지내던 강원도의 어느 깊은 산골 마을, 스무 살이 채 되지 않은 나이에 홀로 아기를 낳던 여자의 심정은 어떤 것이었을까. 그는 그의 어머니를 잠시 생각하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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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보를 끝내고 집에 돌아서려는 그의 발길 위에 빗방울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장마는 이미 끝났다고 했는데, 오늘 비 예보가 있었던가. 어쩐지 숲 속에서 바라본 하늘빛이 저녁처럼 유난히 어둡다고 느꼈었다. 비가 오기 전 구름의 색깔들은 왜 캄캄하게 변하는 것일까.
당연히 우산은 챙겨 오지 않았다. 숲에서 나오자마자 비라니. 어느 지붕 밑에 들어가 비를 좀 피하다가 가야 할까. 그러나 쉽게 그칠 비가 아니었다. 그는 빗방울을 그대로 맞으며 터덜터덜 걸어가면서, 빗방울을 끝없이 떨어뜨리고야 마는 어느 캄캄한 마음에 대해 생각했다. 인생에서의 어두운 터널, 결국 떨어지는 것은 이렇듯 투명한 물방울일 뿐인데... 우산도 없이 온전히 비에 젖어본 적이 언제였던가, 그는 생각했다.
가득 찼던 그 캄캄한 빛깔을 비로소 자신의 삶으로 받아들이기로 했을 때, 그는 자신을 더 온전히 바라볼 수 있었다. 그런 시절이 그에게도 있었던 것이다. 그 무렵 시를 쓰기 시작했으리라. 어차피 온몸과 온마음이 젖었다면, 더 이상 비 따위에 젖는 것을 신경 쓰지 않고 끝까지 걸어갈 수 있으리. 그는 집에 돌아가 젖은 옷을 갈아입자마자 P군의 메시지에 답장을 쓰기로 마음먹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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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선생님. 이번에는 꼭 시험을 보러 가리라 마음먹고 있습니다. 뒤늦게나마 공부를 시작했는데, 더 절실하게 도전하는 마음이 부족하지 않았나 생각하고 있습니다. 어쩌면 부정적인 결과에 대해 미리 걱정하고 겁을 먹고 있었던 것은 아닌지 반성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요즘 문학을 공부하다가 궁금증이 많이 생겼습니다. 특히 시를 읽는 법에 대해서 말이죠. 문제풀이용 시 읽기 말고 진짜 시를 즐기고 싶으면 어떻게 읽어야 할까요? 요즘 시 읽는 게 좋아서 시간 날 때마다 좋은 문장들을 저도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좋은 글을 쓰려는 마음으로 쓴 제 시를 다음에 선생님께도 보여드리고 싶습니다.
조금 외람된 질문일 수도 있지만 혹시 선생님께서 가장 존경하거나, 아니면 선생님께 깊은 영감을 준 시인이 있으십니까? 또 선생님께서 어떤 계기로 시를 쓰게 되셨는지도 궁금합니다. 문학을 하시는 분들에 대한 막연한 궁금증과 존경이라 생각하시고 답을 들려주셨으면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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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에 돌아온 그는 씻지도 않은 채 P군의 긴 메시지를 다시 한번 읽어보았다. 옷을 갈아입고 젖은 몸을 닦으며 그는 어떤 답장을 보내야 할지 생각했다. 좋아하는 시인이나 작가는 어렵지 않게 대답해 줄 수 있다. 그러나 시를 쓰게 된 계기라...? 그는 한참 또 생각했다. 대학시절 실연 후에 문학 동아리에 들어간 것이 결정적 계기가 되었다고 말하는 것은 사실이기도 했지만 어쩐지 부족했다. 그건 시를 쓰게 만든 까닭은 될 수 있었지만, 그에게서 저절로 시가 태어난 이유는 아니었다.
문학에 큰 관심이 없었던 P군은 왜 갑자기 시에 관심이 생겼을까. P군은 지금 외로운 시절을 견디고 있겠지. 그렇군, 그래서 더 시가 와닿았는지도. 그런 생각을 할수록 자신에게도 시가 자연스럽게 끌렸던 소년 시절이 떠올랐다. 그는 중고등학교 시절부터 스프링노트에 시를 끼적거리며 자신만의 시집을 만들곤 했다. 그건 합평회를 위해서 시를 쓴다거나, 등단을 위해서 쓰는 시와는 달랐다.
시가 자신에게 태어나던 시절, 그는 자신이 참 외로웠다는 생각이 들었다. 외로워서, 캄캄해서, 시가 자신의 밤하늘 위에 별빛처럼 눈을 깜박이기 시작했다고나 할까. 어두운 밤하늘을 오래 바라보고 있으면 더 많은 별빛들이 눈에 들어오듯이, 그는 외로운 자신의 마음을 온종일 들여다보곤 했었다. 그럴 때 시가 태어났다. 외롭다는 말을 하지 않으면서, 외로운 마음을 담은 시를 썼다. 멀리 떨어져 있는, 그러나 마음으로 가장 가까웠던 사람들이 보고 싶을 때, 그는 멀리 떨어져 있지 않다고 생각하기 위해 시를 썼다. 그런 문장들을 쓰면서 그는 정말로 그들과 멀리 떨어져 있지 않다고 생각하게 됐다.
그는 학창 시절 노트들을 모아둔 오래된 상자를 뒤적거리기 시작했다. 아직 있을까? 오랫동안 열어보지 않았는데... 상자 속을 한참 헤매던 그는 P군에게 답이 될 만한 짧은 시 한 편을 그 속에서 찾아냈다. 언제 쓴 시일까. 열일곱? 열아홉? 정확한 때는 기억나지 않았지만, 그때 그 시를 쓰며 보았던 오래된 밤 풍경은 지금도 가슴 속에서 생생히 살아나던 그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