빗방울, 빗방울

VOL.6 / 2023. 7월호. 쉽게 씌어진 시_6

by 숨 빗소리

프롤로그

- 서로에게


- 물방울이 왜 둥근지 아시는 분?

테니스 모임이 끝나고, 우리 다섯은 땀이 채 마르기도 전에 이 기자의 동생 부부가 운영하는 호프집에서 간단한 뒤풀이를 하고 있었다. 한 모금 마신 생맥주의 냉기가 조금씩 가시며, 이런저런 이야기로 분위기가 무르익어갈 무렵이었다. 맥주잔에 맺힌 물방울을 잠시 바라보던 허 시인이 그렇게 뜬금없는 질문을 던지는 것이었다.

- 글쎄요, 표면장력 때문 아닌가? 서로 끌어당기는 힘.

- 헐, 빙고. 물 분자끼리 끌어당겨서 표면적을 작게 하려는 힘 때문에 둥글게 뭉쳐진 겁니다.

- 아니 홍 기자, 박식하네. 그걸 어찌 알았지? 이과야?

별생각 없이 던진 질문이라 여기려는데, 허 시인은 거기서 더 말을 이어나갔다.

- 물론 과학적으로는 그게 맞아요. 궁금해서 저도 검색해 보다가 홍 기자님이 말한 것처럼 똑같은 결과를 확인했죠. 아, 근데 말예요. 제가 문과라서 그런가. 왠지 그 대답에도 만족을 못하겠는 거 있죠. 뭔가 부족한 거 같고, 막 좀 재미없고. 그래서 말인데요.

- 그래서?

내가 물었다. 허 시인은 잠시 뜸을 들이더니,

- 그에 대한 시를 써봤어요. 나름 문학적으로 그 질문에 답을 구하려고 했던 시를. 그래서 오늘 이 자리에서 한 번 낭독하려고요.

- 엥?

다들 눈이 휘둥그레졌다. 평소에도 낯을 많이 가리고, 중앙 무대라면 극구 사양하던 극내향 성격의 허 시인이 갑자기 이런 자리서 자작시 낭독이라니. 물론 우리끼리 친분이 쌓여서인 탓도 있겠지만 그는 지난여름에 읽었던 김연수 작가의 소설집에 큰 영향을 받았다고 한다. 전국의 서점과 도서관, 카페 등에서 낭독회를 하기 위해 썼던 짧은 소설들을 엮어 만든 작가의 책을 읽으며, 자신도 지금 현재 마주하고 있는 사람들에게 읽어줄 짧거나 긴 시를 쓰고 싶어 졌다고. 시를 왜 쓰는가? 묻는다면, 시집을 만들거나 좋은 평가를 받으려는 이유도 나쁘지 않겠지만, 그보다는 가깝게 만나는 사람들에게 선물처럼 들려줄 시를 쓰는 것만큼 의미 있는 이유가 또 있을까 그렇게 생각했단다.

- 제가 알다시피 브런치스토리 '숨 빗소리' 매거진에서 시를 연재하잖습니까. 그것도 조금 더 독자들과 소통할 수 있는 쉬운 시를 써보자는 의미였지만, 낭독회만큼 그 취지를 살릴 만한 게 또 있을까요? 해서 여러분들이 제 문학적 로망의 첫 희생자(?)가 되어주십시오. 김연수 작가님처럼 서점이나 도서관은 아니지만, 술집의 낭독회라니 더 좋지 않나요?

저 사람이 벌써 취했나 싶었다. 하지만 어눌해지는 말투는 아니었다. 처음에는 장난기가 좀 섞인 말투였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오히려 더 진지한 눈빛으로 이야기를 이어갔다.

- 그런데 낭독회에서 작품만 낭독하면 재미없잖아요? 사연이 있어야 하겠지요. 해서 며칠 전 이야기를 잠깐 해야겠어요. 잠시만 더 들어주세요. 며칠 전 비 와서 우리 테니스 못 쳤잖아요. 이 시를 쓴 까닭은 그때부터 이야기가 시작됩니다.

사실 원래 테니스 모임은 3일 전 즉, 10월 26일이었다. 일주일 전부터 경기장 예약을 해두었건만 그날 온종일 비 예보가 잡혀있었다. 예상대로 점심 무렵부터 빗줄기가 떨어지기 시작했다. 모임은 사흘 뒤 바로 오늘로 다시 잡혔다. 허 시인은 약속이 취소된 그날, 종일 집에 갇혀있기도 뭐해서 비가 다소 가늘어지기 시작한 오후 늦은 무렵에 우산을 들고 집 주변 산행을 나섰다고 했다. 불행인지 다행인지 산 초입부터 비가 거의 내리지 않았다고.

- 비가 온 날이라 산에는 사람들이 없었어요. 평소에는 오르막이 급하게 시작되는 집 근처에서부터 출발하는데, 아무래도 땅이 질고 험할 거 같아서 평소 다니던 코스를 거꾸로 해서 완만한 반대쪽부터 출발을 해봤지요. 여기 여성이 두 분이나 계신데 이런 비유가 적당할지 모르겠지만 비 오는 날의 산길은, 마치 지우지 못한 화장이 마구 번져버린 여자의 우는 얼굴 같았어요. 축축해진 나무 계단들 위 바람에 쓸린 젖은 잎사귀들이 그대로 뒤엉켜 나뒹굴고 있는 모습. 왠지 슬퍼 보이더라고요. 산이 아무도 안 올 줄 알고 몰래 울다가 막 들켜버린 표정 같은 거 있죠.

그는 시를 쓰는 사람답게 다소 묘하게 느껴지는 비유를 섞어가며 이야기를 이어갔다. 산을 오르다가 날짜를 헤아렸단다. 10월 26일. 응? 뭔가 익숙한데. 아, 벌써 일 년이 지난 이태원 참사일이구나, 그렇게 생각했다고 한다. 다시 그렇게 산을 오르다가 근데 10·26이 맞나? 뭔가 이상한 거 같아서 핸드폰을 꺼내 검색해 보니 1979년 10·26 사태와 2022년 10·29 참사를 잠시 헷갈린 것이었다. 죽음에 관한, 역사의 두 날짜를 혼동한 것. 겨우 일 년 만에 그 무수한 슬픔들을 모두 망각한 것 같아서, 사회를 질타하고 그에 관한 시를 쓰기도 했던 자신의 모습이 모두 거짓인 것 같아서, 너무 부끄럽고 죄송한 마음이 들었다고 한다. 가벼운 마음의 산행이 결국 반성과 깊은 고민의 시간이 되었다고.

- 그 산길에서 쓰게 된 시라고 할까요? 아까 평소와는 반대로 맞은편 방향에서 출발했다고 했잖아요. 가뜩이나 비가 온 산길이라 평소와 다른 모습인데, 거꾸로 가니까 이게 점점 이 길이 맞나? 헷갈리고 새롭게 보이더라고요. 완전히 다른 산의 모습이었어요. 내가 알던 길, 무심코 흐르던 길, 그냥 오르던 길이 아니게 되어버렸어요. 제가 의미 부여하는 걸 좀 좋아하잖아요. 그러다가 또 생각한 거죠. 아, 이거구나, 우리가 평소와는 다르게 거꾸로 되짚어가며 그날 일, 그날의 사건, 그날의 슬픔으로 다시 되돌아 걸어봐야 하는 이유가. 평소 익숙하다고 느끼던 대상이 문득 낯설어질 때, 우리는 잠시 더 생각하고 바라보게 되잖아요. 어쩌면 내가 모르던 숨겨진 표정을 헤아리고 이해해 보려는 지도 모르고요.

산을 이렇게 걸어보는 게 산에게는 얼마나 의미가 있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산에게도 마음이 있다면 왠지 싫어하지는 않았을 거라 생각했다고 한다. 그렇게 비 오는 날, 사람이 거의 찾아주지도 않는 어두운 날, 일상의 방향을 거꾸로 걸어보며 산의 다양한 풍경을 바라봐주는 사람이 있다는 것을.

- 서론이 무지하게 길었네요. 그리하여 어쨌든 2023년 10월 29일, 바로 오늘. 이 시를 낭독하기 위해, 그리고 여러분들은 제 낭독을 듣기 위해 오늘 테니스를 친 것이고, 오늘 이 뒤풀이에도 남아서 말랑말랑한 열린 귀를 위하여 맥주도 한 잔 들이켜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오늘의 날짜를 기억하게 될 거예요. 일 년 전 우리에게는 크나큰 아픔이 있었고, 그날을 잊어버린 내가 있었고, 그날을 잊지 않기 위해 반성하는 누군가가 있었고, 그리고 시 한 편을 들으며 함께 기억하는 우리들이 있었다는 것을요. 흠흠, 부족하지만 한 편의 시를 지금부터 읽어보도록 하겠습니다.

우리는 모두 잠시 진지해지며 박수를 보냈다.

- 제목이 뭐예요?

이 기자가 물었다.

- 제목은 ‘표면장력’입니다.

- 진짜요?

최 기자가 물었다.

- 농담입니다. 여기 모인 눈꽃 작가님, 이 기자님, 홍 기자님, 최 기자님. 우리가 어떤 인연으로 계속 만나게 될지는 모르지만, 왠지 앞으로 뭔 일이 생길 때마다 함께 마음을 나눌 거 같다는 생각이 들진 않으세요? 세상에 아픈 일이 있을 때, 서로의 이야기를 조금이라도 진정 들어줄 수 있는 사람이 점점 많아졌으면 좋겠다는 마음으로. 그렇게 써봤습니다. 제목은 대학시절 좋아한 나희덕 시인의 시 ‘빗방울, 빗방울’의 오마주입니다. 아, 그리고 TMI. 거짓말 아니고 진짜, 산행을 마칠 때쯤부터 갑자기 다시 빗방울이 쏟아지기 시작했어요. 빗방울, 빗방울들이.





빗방울, 빗방울



한 사람이 고개를 숙이고
허리를 구부린 채
땅을 내려다보거나
상실을 껴안고 울었다

점점 흐느끼며
둥글게
둥글게
작아졌다


비가 내렸다

하나둘 작은 동심원들이 곁을 감싸고

함께
눈물을 흘리면서
누군가를 때리거나
생명을 해칠 수 없었다

그래서 끌어안았다
우리는 서로를

한 명씩
한 명씩
말없이 안아주었다

물방울이
둥근 이유







<숨 빗소리_ 신작원고_허민 시>


허민- 시 쓰는 사람. 시집 <누군가를 위한 문장>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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