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초의 가을이

VOL.9 / 2023. 10월호. 시화로 전하는 시_18

by 숨 빗소리

시화로 전하는 한 편의 시




하루 종일 아무것도 먹지 못했지만

배고프지도 않은 슬픈 허기로

너를 삼킨 적이 있네, 아니

오히려 삼킨 것은 나였는지도 몰라

밤 열한 시가 되어갈 무렵

유일한 한 끼를 그제야 꾸역꾸역 넘기던 해장국집,

두 눈이 빨개진 너와 마주 앉아

네 얼굴을 차마 쳐다보지 못하고 후루룩

그날을 마셔버리던 칠흑이 있네,

있을 것이네, 기어코 있었던 몹시 바람 부는 언젠가였지

과거의 네가 누군가를 사랑하지 않았다면

지금의 나를 받아들일 수 있었을까

너무나 많이 쌓인 찌꺼기들을

오랜 시간을 들여 한참 토해내고 싶어

소주 한 잔 시켰으면 했네, 낯설어서

이 기쁘고 슬픈 낯섦이 반가워서

퉁퉁 눈이 붓던 밤

나는 드디어 나를 작별하고

너의 발바닥에 혀를 대고 싶었다, 가을이었던가

그 나무를 사랑하면서 버려진 잎사귀들을

어찌 책갈피 속에 끼워 넣지 않을 수 있는가

주머니 속 그 낙엽들을 그러모아

부글부글 여전히 끓고만 있는 뚝배기 속 가득 부어버렸네, 뜨거움 속에 한데 얼려

배고픈 하루를 바라보는 네 안쓰러운 눈빛 때문에

배고프지도 않은 나를 푹푹 떠서

먹어버릴 수 있다는

놀라운 따뜻함, 아름다운 충혈로 가득한 핏빛의 눈이

울긋불긋 이파리처럼 찬란한 이유가

낯설었네, 익숙지 않았기에 잠시 거부했으나

다가오는, 다른 계절을 영원히 안아야만 한다는

영영 안을 수 있다는, 처음으로 가져본

책임질 수 있는 권리 덕분에

흐느껴 울었네, 밤이 깊어지는 해장국집에서

최초의 가을이 깊어가는

너와 마주 앉은 그 생의 과제 앞에서

혀끝이 짜디짜서, 기쁘게 맵고 짠

무한한 밤바다의 파도를 만난 것 같았네




- 졸시 <최초의 가을이> 전문



아침저녁으로 완연한 가을이네요. 어제저녁 퇴근길에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노래, 뱅크의 <가을의 전설>이란 곡을 들었습니다. 오늘 아침엔 이승환의 <가을 흔적>을 들으면서 부러 버스를 타고 풍경을 감상하며 출근했네요. 8090 시대의 가을 노래에 취하는 것을 보니 여기서 세대가 드러나네요.


지난 시집 속에서 십 년 전 가을에 썼던 시를 들추어 보았습니다. 이때의 나는 이런 가을을 맞이하고 있었네요. 새로운 사랑이 시작되고 있었군요. 생각해 보니, 그때의 나는 혼자만의 중심이 너무 강해서 내 것을 하나도 내려놓지 못하고 있었어요. 물론 지금도 그런 면들이 없지 않지만 그때는 더했던 것 같아요. 그러니 새로운 누군가를 내 안에 받아들일 수 있었을까요.


일본 시인 다니카와 슌타로는 '시를 쓴다는 것'은 나를 비우는 것이라고 했다죠. 나를 비울 때 비로소 새로운 무언가로 채우고 창조할 수 있다고. 시만 그런 것은 아니겠지요. 사랑도, 인생도 모두 그러하다는 것을 배우는 시월의 가을입니다. 하여 시월의 나무들은 우리 곁을 떠나기 위해 자신을 떨구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시간들을 또 마음 깊숙이 받아들이기 위해 자신을 비우고 있나 봅니다.


텅 빈 가을 허공에는 그 무엇도 들어올 수 있나 봐요. 지나간 추억들이, 지나간 사람들이, 지나간 내 모습들이 버스 차창으로 스쳐갑니다. 그 스쳐간 자리에는 또 어떤 새로운 것들이 다가올까요.






<숨 빗소리_ 10월_시화로 전하는 한 편의 시>

('시화로 전하는 한 편의 시'는 수시로 업데이트됩니다. )


숨 빗소리 - 발행인 겸 편집장. 스쳐가는 장소에서 건져 올린 시들을 나누고자 합니다. 세상과 사랑에 대한 생각과 느낌들을 시와 산문으로 기록하고 있습니다.


인용 시 출처 - 시집 <누군가를 위한 문장>(2022), 웹진 <시인광장> 2015년 4월호 발표.

허민- 시 쓰는 사람. 시집 <누군가를 위한 문장> 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