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학년 겨울방학 때 아빠의 사업 때문에 이사를 가게 된 곳은 충청북도 제천에서도 읍 면 리 까지 들어가야 되는 작은 시골 마을이었다. 갑자기 한 이사라 학교 친구들과 작별인사도 못하고 떠나오던 이사 용달차 안에서 내내 울었던 기억이 난다. 차창 밖으로 보이는 모든 풍경들이 눈물에 젖어 뿌옇게 보였다.
동네는 작고 한적하기 짝이 없었다. 동네에 유일한 구멍가게 뒤로 보이는 나지막한 뒷동산엔 아직 녹지 않은 눈들이 남아 있었다. 오래된 옛집들 사이에 어울리지 않게 튀어나온 3층짜리 연립주택 1층이 우리가 살집이었다. 내가 다닐 초등학교는 길 하나만 건너면 되는 가까운 곳에 위치하고 있었다. 어른들이 짐정리를 하고 있는 동안, 나는 겨울방학 중이라 비어있는 학교에 가 보았다. 학교 정문으로 들어가는 길은 오솔길처럼 호젓했다. 겨울이라 꽃은 없었지만 담장에는 장미 넝쿨이 길게 이어져 있었다. 작은 운동장 가장자리에는 커다란 느티나무가 자리 잡고 있었고 그 옆에 흔들리고 있는 그네에 앉아 잠깐 또 울었다.
학교는 3층짜리 작은 건물이었다. 그전에 내가 다니던 도시의 학교는 한 학년이 16반이나 되던 큰 학교였는데 이곳은 한 학년이 세 반씩밖에 없었다. 난 5학년 교실 명패가 있는 3층으로 올라갔다. 콘크리트 복도 바닥만 경험했던 나에게 난생처음 보는 골마루는 생경하기 그지없었다. ‘삐그덕’ 골마루를 처음 밟았을 때 나던 나무의 울림소리를 몇십 년이 지난 지금도 잊지 못한다. 아이들의 손때가 묻어 윤이 반질반질 나던 짙은 밤색의 골마루를 다시 도시로 떠나오고 나서도 오랫동안 그리워했다.
아이들은 실내화 따위는 신지 않고 맨발이나 덧버선 하나만 신고 자신의 발자국을 찍어가며 교실이며 복도를 뛰어다녔다. 그곳에서의 일 년 반 추억이 내 행복한 유년시절의 전부였다. 그리움이란 단어로도 다 표현할 수 없는 아련함,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추억이란 이름으로 윤색되어 더 아름다워지는 기억의 편린들... 그곳에 열두 살의 내가 있었다.
시골 아이들은 도시 아이들과는 생래적으로 달랐다. 거름망 없는 날것의 감정으로 자신들을 표현한다. 도시에서 전학생이 왔다는 소식에 거의 전교생이 우리 교실로 구경을 왔다. 나는 부끄러움에 몸 둘 바를 몰라 고개를 들지 못했다. 그러나 그 시선은 전혀 아프지 않았다. 나에게 향하는 아이들의 목소리에 따뜻함이 묻어 있었기 때문이다. 아이들은 내게 어디서 왔는지, 지금 어디 사는지, 서울에 유명한 곳은 어디를 가봤는지 앞 다투어 물었다. 내가 수줍게 대답하자 ‘와~서울말이다’ 하면서 아이들은 깔깔 웃었다. 나도 같이 웃었다. 햇살이 눈부시게 우리들의 얼굴 위에 쨍하고 쏟아졌다. 나는 그들 속에 그렇게 스며들었다.
우리들은 사계절 내내 바깥에서 뛰어다니며 놀았다. 도시에서의 생활과는 너무 달랐다. 동네에 피아노나 주산 학원 같은 것은 존재하지도 않았고, 학교 공부 외에 아이들의 선생님은 자연이었다. 유독 산과 개울이 많았던 동네여서 남자아이들은 거의 윗옷을 입고 다니지 않았다. 언제든지 개울로 뛰어들어가 멱을 감을 준비를 하고 있어야 했기 때문이다. 봄에는 뽕나무에 열리는 오디를 종일 따먹어서 아이들 입가는 거의 보랏빛이었다. 도시에서 뽕나무를 본적도, 오디라는 것을 먹어본 적도 없는 난 그 맛에 금세 반해 버렸다. 오디를 발견할 때마다 마구 따서 주머니에 넣은 탓에 그 시절내 모든 옷마다 보랏빛 오디 얼룩이 묻어 있었다.
시골 아이들에는 청소 시간도 재미있는 놀이 시간이다. 골마루는 초를 칠해서 윤을 내는데 보통의 양초를 사용하지 않는다. 아이들은 각자 자기의 개성대로 집에서 초를 만든다. 나도 단짝 친구가 된 석경이와 나만의 초 만들기에 도전하기로 했다. 먼저 동네를 돌아다니면서 버려진 양철 분유통을 하나 구했다. 그리고 집안에서 굴러다니는 양초들을 다 모았다. 예쁜 색을 내기 위해서는 몽당연필처럼 짧아져 거의 못 쓰게 된 크레파스를 함께 넣어야 되는데, 아무리 찾아도 그런 크레파스는 눈에 띄지 않았다. 어쩔 수 없이 새로 산 크레파스를 들고 엄마 몰래 뒷산 언덕 자락으로 갔다. 우리는 평평한 곳 한 자리를 돌을 괴어 부뚜막처럼 만들고서 잔가지들을 모아 불을 붙였다. 불 위에 양초 조각들을 넣은 분유통을 올린 후, 준비해 온 크레파스를 뚝뚝 분질러서 함께 넣어 주었다. 그 다음은 나뭇가지로 천천히 분유통을 저어주면서 끓기만을 기다리면 된다. 양초와 크레파스가 어떤 조합이 되어 어떤 색깔로 완성될지 아무도 모른다. 그냥 우연의 효과이기에 기다리는 시간이 지루하지 않고 더 재미있었다. 다 끓은 촛물은 대부분 작은 말표 구두약통이나 모양이 예쁜 틀에 넣어 그늘에서 말린다. 그날 밤 집에 들어가 새 크레파스를 아작 냈다고 엄마한테 욕을 한 사발이나 들었지만 아무렇지 않았다. 나의 새 양초가 완성되고 있으니 말이다.
유독 청소 시간엔 내 주위에 아이들이 많이 모여들었는데, 그 이유는 내가 재미있는 이야기를 잘해 주었기 때문이었다. 책걸상을 뒤로 밀고 빗자루질을 한 후 우리는 골마루 위에 모여 앉는다. 난 어제 보았던 ‘전설의 고향’의 구미호 이야기나 비디오테이프로 며칠 전 빌려본 영화 이야기들을 원작에 살을 덧붙여가며 이야기해 준다. 그러다 보면 거의 절반은 새롭게 창작하는 수준이다. 새로 만든 개성 있는 초로 골마루 바닥에 그림까지 그려가며 실감나게 이야기를 해주면, 아이들은 두 눈을 반짝이며 몰입한다. 이야기가 한참 재밌어지는 포인트에서 난 잠시 숨을 고르며 말한다. “닦자” 그러면 아이들은 내가 그린 초 그림들 위로 열심히 걸레질을 한다. 이야기가 재미있을수록 골마루는 더욱 윤이 난다.
손두부를 만들어 파는 언청이 아주머니는 일주일에 한 번씩 동네에 와서 두부를 팔았다. 집에서 20분가량 떨어진 약수터 옆에 살고 계셨는데, 그 약숫물로 직접 두부를 만들었기에 맛이 담백하고 좋아서 아주머니가 오시는 날엔 엄마 심부름으로 내가 나가서 두부를 사 오곤 했다. 아주머니는 유독 내가 가면 반가워하시면서 두부를 덤으로 많이 주셨다. 나보다 나이가 두 살 정도 많은 아들이 있다는 이야기를 하시면서 한번 놀러 오라고도 하셨다.
몇 주 후 집에 손님이 오신다며 엄마가 언청이 아주머니 집에 가서 직접 두부를 사 오라고 심부름을 시키셨다. 나는 가기 싫었지만 심부름값으로 나머지 잔돈을 가져도 된다는 말에 집을 나섰다. 약수터까지 가는 길은 동네 큰 개울을 끼고 한참을 걸어가야 했다. 해가 지기 시작했고 물수면엔 노을빛이 감빛으로 물들어 가고 있었다. 난 혼자 ‘클레멘타인’ 노래를 흥얼거리며 한껏 센치해져 있었다. 아마 그 탓이었을 것이다. 외줄 중이던 아주머니를 대신해서 두부를 건네주러 나왔던 그 오빠가 그리 멋있어 보였던 이유는... 두부를 건네받은 내 손은 와들와들 떨렸으나 사춘기 소년은 내게 눈길 한번 주지 않았다.
주말마다 아침 단잠을 깨우며 약수터에 가자던 아빠의 말을 한 번도 듣지 않았는데 그 이후에는 주말마다 아빠를 따라 약수터에 갔다. 그러나 약수터 근처를 서성여봐도 그의 얼굴 한번 보지 못했다. 실체를 알지 못하는 사랑이 더 애틋하게 느껴지는 법이라 내 마음속의 사랑도 커져만 갔다.
그러기를 서너 달이 지나고, 어느 날 ‘딩동’하는 소리에 현관을 열었을 때 난 심장이 멎는 줄만 알았다. 거짓말처럼 그의 얼굴이 나를 똑바로 바라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손에는 두부가 든 봉투가 들려 있었다. 난 놀라서 방으로 뛰어들어가 숨죽여 사태를 지켜봤다.
“어머 엄마가 안 오시고 영찬이가 직접 들고 왔네. 잠깐 들어와서 과일 먹고 가.” 엄마는 한사코 괜찮다는 그를 불러 앉혀 놓고 과일 접시를 들이밀었다. “공부 잘해서 시내에 있는 중학교로 전학 간담서? 엄마가 자랑이 이만저만 아니시던데.” 그 이후에도 몇 가지 이야기가 오고 갔으나 내 귀엔 들리지 않았고 잠시 후에 현관문 닫히는 소리가 들렸다. 내 마음의 문도 닫히는 기분이었다. 곧장 다시 문을 열고 뛰어나가 보았다. 저 멀리 떠나가는 그의 뒷모습이 보였다. 다시는 돌아보지 않을 것 같은 굳건한 걸음걸이였다.
노을이 지고 있었고 다섯 시 애국가가 동네에 울려 퍼졌다. 그 당시만 하더라고 다섯 시에 애국가가 나오면 가던 길을 멈추고 가슴에 손을 올린 후 곡이 끝날 때까지 서 있었야 했다.(지금 생각해 보면 참으로 희한한 광경이 아닐 수 없다.)
난 가슴에 손을 올리고 울려 퍼지는 애국가를 들었다. 그러나 그 순간 나도 모르게 나의 눈에서는 눈물이 흘러내렸다. 5학년 짜리 여자애가 애국가를 들으며 눈물을 흘리는 모습이라니... 그때 곁을 지나가던 동네 동대장 경희 아버지는 훗날 엄마한테 그렇게 말했다고 했다. “아가 애국가를 들으면서 눈물을 철철 흘리는데, 나까지 마음이 뭉클해지더라니까.”라고.
모든 세상일은 오해에서 시작해서 착각으로 끝이 난다. 내 열두 살 풋사랑은 그렇게 블랙 코미디의 한 장면을 남기며 마무리되었다.
(아홉 번째 에세이 제1부 끝 - 다음호에 '유년의 뜰' 2부로 이어집니다.)
*‘유년의 뜰’ 제목은 오정희 선생님의 동명소설을 오마주하여 같은 제목을 썼음을 밝힙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