VOL.10 / 2023. 11월호
이야기의 쓸모를 생각합니다. 이야기는 언제부터 생겨났을까요. 여름이 끝나고 낙엽 지는 가을이 오면, 가을도 지나 하얀 입김이 피어나는 11월 초겨울이 시작되면, 따뜻한 난로 앞에서 옛이야기를 들려주던 할아버지, 할머니들의 모습이 머릿속에 그려집니다. 김연수 작가의 소설 <바얀자그에서 그가 본 것>에서는 이야기 중독자인 ‘정미’라는 인물이 나옵니다. 그녀는 음악 중독자인 ‘그’를 만나 사랑에 빠지고 부부가 되지만 오래지 않아 죽고 맙니다. 그리고 그녀를 잊지 못하는 ‘그’가 이야기 중독자였던 ‘정미’에 대한 그리움과, 그녀가 남긴 ‘어떤 말’을 잊지 못해 몽골의 고비사막으로 떠나지요. 현실은 차갑고 냉엄하지만, 그렇기에 현실을 살아가는 사람들에겐 반드시 그것을 뛰어넘는 이야기가 필요하다고 믿었던 정미, 그녀를 이해하기 위해 무수한 시간의 화석들이 잠들어 있는 사막 한가운데서 주인공 ‘그’는 또 하나의 이야기를 써 내려갑니다.
작년 시월의 끝에서 우리는 많은 젊은이들의 죽음을 목도했고, 올해 가을엔 지금도 여전히 멈추지 않는, 세계 어딘가에서 벌어지는 전쟁의 참상을 언론보도를 통해 전해 듣고 있습니다. 우리가 아무리 노력하고 힘써도 현실의 세상은 쉽게 나아지는 느낌이 들지 않습니다. 넘어지고 절망하는 나날들은 이어집니다. 미래는 조금 더 나아질 수 있을까요. 병자호란을 겪고 그 치욕을 문학으로나마 되갚기 위해 쓰인 ‘박씨전’이란 소설이 떠오릅니다. ‘눈에는 눈, 이에는 이’의 스토리를 좋아하진 않지만 그런 이야기를 만들어낸 민중들의 한과 희망에는 공감할 수 있습니다. 가족을 잃고 세상의 빛을 외면했던 분들이 새롭게 써나가는 인생 제2의 이야기도 응원할 수 있습니다.
슬픈 날에는 따뜻한 영화를 보면서, 외로운 날엔 드라마의 플롯을 즐기며 고된 현실을 잠시나마 잊습니다. 지나간 이야기는 새로운 이야기를 통해 다시 태어날 수 있을까요. 시에 담긴 서사를 나누며, 소설 속 주인공의 마음에 하트를 남기고, 이웃의 소소한 에피소드에 맞장구를 칩니다. 이야기 속 현실은 아직 끝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미래에도 끝나지 않을 것입니다. 그 속에서 새로운 여행을 떠나고, 다시 그것을 써 내려가는 누군가가 있을 것이며, 그 이야기를 듣고 조금은 더 낫게 살아가는 또 다른 사람들이 있으리라 희망합니다.
십일월에도 부족한 우리 이야기들이, 우리를, 가까운 누군가를, 아니 오직 단 한 사람을 웃음 짓게 한다면, 단 한 뼘이라도 나와 당신의 미래를 밝은 빛살이 넘치는 수면 위로 끌어올려 줄 수 있다면… 그런 이야기들을 함께 나누며 살아가고 싶습니다.
인겐 - 남반구 하늘 아래 인생 개척 엔지니어.
허민- 시 쓰는 사람. 시집 <누군가를 위한 문장> 저자.
이창호- 현직 기자. 책 <그래도 가보겠습니다> 저자.
눈꽃 -격(格)을 알아야 파격(破格)을 꿈꿀 수 있다고 믿는 인간애정주의자.
숨 빗소리 - 발행인 겸 편집장. 스쳐가는 장소에서 건져 올린 시들을 나누고자 합니다. 세상과 사랑에 대한 생각과 느낌들을 시와 산문으로 기록하고 있습니다.
"매일 조금씩 더 깊은 곳으로 들어가야 했지. 검은 물갈퀴는 어둠을 가르고 어제보다 더 멀리 내려갔지. 우리가 죽음의 아가리라고 부르는 그곳까지. 싸이렌들이 빛 속에서 나풀거리는 곳, 몇 번이나 넘고 싶었던 그 문턱에서 가까스로 돌아와 휘파람을 불어. 휘이- 휘이- 휘이- 휘이- 내 속에 살고 있는 물새 한 마리."
- 나희덕 시인의 시 <숨비소리>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