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티아고를 향한 여정
- 인겐
<산티아고를 향한 여정>은 호주에 정착한 한국 청년이 자신의 오랜 목표인 스페인의 산티아고 순례길을 가기 위한 다양한 준비과정, 실제 순례길 여행기를 매월 짧은 이야기 속에 담아 연재합니다.
안녕하세요. 얼마 전 56km 울트라 마라톤을 마치고 온 인생 개척 엔지니어입니다. 그 마라톤에 대해서도 곧 이야기를 풀어갈 계획입니다. 오늘은 그전에 먼저, 운동 특히 달리기를 하는 동안 떠오르는 여러 가지 생각들에 대해 이야기를 해보려고 합니다.
보통은 친구와 함께 달리기, 등산 등 운동을 함께 합니다. 운동을 하는 동안에는 친구와 이야기하는 시간보다 이야기하지 않는 시간이 점점 더 많아지는 것 같습니다. 늘 이랬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처음 친구와 등산을 시작할 때는 뛰는 시간보다 걷는 시간이 많았고, 경로에 익숙해지는 것에 좀 더 초점을 맞췄습니다. 새로운 등산로 경치를 즐기면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했지요. (필자의 등산은 산악달리기, 트레일러닝을 말하는 듯하다 : 편집자)
그러나 점점 걷기 좋은 시간들은 오래가지 않았습니다. 점차 뛰는 시간을 늘려갔지요. 그래도 마라톤을 위해 최소한으로 유지해야 할 속도에는 한없이 부족하기만 했습니다. 이대로는 56km를 완주할 수 있을 거란 희망이 보이지 않자 친구와 저는 조금씩 강도를 높여갔습니다. 점차 걷기보다는 뛰는 것에 집중하게 되었고, 우리의 이야기는 줄어갔습니다. 대화가 줄어든 만큼 속으로 생각하고, 스스로에게 이야기를 걸거나, 과거에 대한 회상 혹은 미래에 대한 플랜 등을 생각하는 시간은 늘어만 갔습니다.
달리는 동안에는 별의별 생각을 다 하게 됩니다. 내가 가고 있는 길이 맞는지 경로를 확인할 필요 없이 몸이 자연스럽게 가야 할 길로 향하면, 마음은 어느덧 상념에 사로잡히게 됩니다. 가령 이런 것들. 직장에서 지난 프로젝트 중 내가 한 실수를 떠올리거나, 현재 프로젝트의 진행 상황, 어떤 프로젝트에서 내가 실수하진 않았나? 이직해야 할까? 한다면 언제일까? 무슨 준비를 어떻게 해야 하고, 관련 분야의 어느 직종으로 어떻게 가야 할까? 여자친구랑 다음 주말에 보기로 했는데 뭘 해야 할까? 식당 예약은 언제 어디로 어떻게 할까? 등등 온갖 사소한 것부터 미래에 대한 굵직한 플랜까지 온갖 생각이 가득합니다. 써 내려가다 보니 사실 거의 무한에 가까운 생각들이네요. 그만큼 다양한 것 같은데 다른 분들은 어떠신지 이젠 제가 궁금해지네요. 이것도 제가 얼마 전에 한 MBTI와 관련이 있을까요? 어쩌면 제가 INFJ라서 그럴지도 모르겠습니다.
달리는 동안의 생각들 중 가장 많은 부분은 아직 오지 않은, 미래의 준비에 관한 것들입니다. 뭘 하려 하니까 그에 대한 준비로는 뭐가 있고, 어떻게, 어느 시기에 해야 할까 등등…… 이런 생각들이 이어지다 보면 언제나 그랬듯 가장 중요한 난제에 봉착하곤 합니다. 이민을 준비하는 모든 사람들의 숙원이자, 어떻게든 꼭 풀어내야 할 숙제, 비자입니다. 네, 저는 영주권을 신청한 후로 계속 기다리고 있는 상태로 아직 영주권을 받지 못했습니다. 비자로 인해 거주 기간, 취업, 의료혜택 등의 제한은 미래에 대한 불안함을 느끼게 합니다. 여러 가지 계획, 약속을 기약 없이 일단 미룰 수밖에 없는 데는, 이 비자라는 높디높은 문턱이 예상과는 다르게 점점 더 길어지기 때문입니다. 이 영주권이 없이는 모든 플랜들은 결국 플랜일 뿐 실행되지 못합니다. '산티아고를 향한 여정'을 위한 휴가 신청, 비행기 및 숙소 예약 등이 즉각적으로 실행되지 못하는 데도 이 비자 때문입니다. 이 비자를 기다리면서 잠 못 이루는 숱한 밤들을 지나고 있습니다.
인력으로 뭘 어떻게 할 수 있는 부분들이 아니기에, 내려놓는다는 마음가짐을 가지려고 노력합니다. 그럼에도 쉽게 떨쳐지는 것은 아닙니다. 한동안은 좀 무거운 마음으로 등산을 가곤 했습니다. 산행하면 곧잘 빠지는 생각의 늪, 엉킨 실타래들, 그 사이사이를 관통하는 비자라는 문제, 그에 따른 여러 압박. 스트레스를 덜고 자유로워지고자 산으로 떠났음에도, 그 굴레를 벗지 못하는 제 자신이 안쓰럽기도 했습니다.
단 하나 위안이 되는 것은 저와 비슷한 처지인 사람들과 소통하는 것입니다. 저 홀로 겪는 것이 아니고, 제게 문제가 있다거나, 뭔가를 잘못한 것이 아니기에, 이따금 누구에게나 일어날 수 있는 문제라고… 그렇게 생각하면 조금은 마음이 편안해지곤 합니다.
신기하게도 공감은 꼭 누군가가 나를 이해해 주지 않아도, 나와 같은 사람이 지구 어딘가에 존재한다는 사실을 깨닫는 순간 찾아오는 듯합니다. 속으로 ‘휴… 나만 그런 것은 아니구나’ 하면서. 공감이라고 부르기엔 조금은 이기적인 마음으로. 누군가가 겪는 비슷한 불행에 안도하다니…
이따금 이 굴레를 마치 ‘필연’적으로 보게 되는 것 같습니다. 조금씩 익숙해졌구나 싶은 순간, 마치 벌에 쏘이듯 한 번씩 마주하게 되는 쓴맛이 이젠 멀지 않았다고 직감하고 있습니다. 그저 해야 할 일들을 하고, 때가 오기를 준비할 뿐입니다. 산티아고 여정을 체력적으로만 꾸준히 준비할 게 아니라, 일정이나 티켓팅 같은 부분도 쉽사리 준비할 수 있는 때가 곧 오기를 기대합니다.
(아홉 번째 이야기 끝)
<숨 빗소리_ 11월 신작원고_인겐의 여행 산문> _ 여행 산문은 4-5주 주기로 업데이트됩니다.
인겐 - 남반구 하늘 아래 인생 개척 엔지니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