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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숨 빗소리 Jan 21. 2024

어린 아재

VOL.12 / 2024. 1월호. 이창호 연재소설_1화

어린 아재

- 이창호




<제1화>



 다시 2005



 칠흑 같은 벽으로 둘러싸인 화장실 안, 태양이 변기에 앉아 있다. 눈을 뜬 태양은 깜짝 놀라 물고 있던 담배를 던졌다.

 ‘아니, 내가 왜 담배를 물고 화장실에 앉아 있지?’

 바깥으로 나온 태양은 이곳이 어딘지 짐작하지 못했다. 손을 씻는 척 거울을 보며 여기가 어딘지 둘러봤다. 그 순간 태양은 소스라쳤다. 짐작이 맞다면 이곳은 인천의 한 호프집, 태양이 대학생 때 아르바이트하던 곳이다. 태양은 거울 속 자신을 바라봤다.

 ‘아, 이 옷은 내가 대학생 때 입던 건데.’

 태양은 주머니에 손을 넣었다. ‘SKY’ 슬라이드 휴대폰이 있었다. 신발을 쳐다봤다. 로퍼를 신고 있었다. 대학시절 신던 것이다. 머리는 왁스를 바르고 스프레이를 뿌려 단단히 고정했다. 앳된 얼굴이었다.

 ‘이건 무언가 잘못됐다. 지금 화장실 밖에 나가면 서빙을 해야 하는 건가?’


 며칠 전. 엘리베이터에서 내린 태양이 현관 앞에서 멈췄다. 한숨을 깊이 쉰 태양은 비밀번호를 누른다. 문을 열고 들어서자 아내와 딸이 떠들고 있다. 마치 태양이 들어오지 않은 것처럼 모른 척. 태양은 조용히 현관 옆 방으로 들어간다. 옷을 갈아입은 태양은 책상에 앉아 지난날을 돌이켜본다. 아내와의 사이는 결혼 전부터 좋지 않았다. 혼전 임신 때문에 결혼했다. 지금처럼 없는 사람처럼 지낸 세월이 4∼5년이다. 전화가 왔다. 태양의 엄마였다.

 "태양아, 주말에 와서 밥 먹고 가라. 창고의 책도 이제 정리하고."

 "응, 알겠어요. 저녁 6시 반까지 갈게."

 다음날 저녁 6시. 태양이 좋아하는 반찬이 상에 올랐다. 그의 엄마는 태양의 안부를 묻는다.

 "요즘 재판은 잘 되니? 이상한 사람은 없고?"

 "재판은 맨날 똑같지, 이상한 사람이 돈을 주니까 해야지 뭐."

 태양은 10년 차 변호사다. 사법시험에 실패하고 로스쿨로 방향을 틀었다. 합격률이 75%였던 2회 변호사시험에 합격했다. 태양은 엄마와 맥주를 마셨다. 태양의 엄마는 취기가 오르자 손녀와 며느리 안부를 묻는다.

 "대화 없이 지낸 지 오래됐다"는 태양의 대답에 엄마는 대뜸 ‘지수’ 얘기를 꺼낸다.

 "그러게 엄마가 대학생 때 지수랑 결혼하라고 했잖아. 왜 내 말을 안 들어서 참…"

 "아니, 그때는 군대도 안 갔다 오고 취직도 안 했는데, 무슨 결혼을 해!"

 태양의 대학시절 엄마는 지수와의 결혼을 권유했다. 지수는 긍정적이었지만 태양은 자신이 없었다. 대화를 마친 태양과 엄마는 동시에 한숨을 내쉬었다. 상을 물린 뒤 태양은 창고의 책을 정리했다.

 창고에는 대학 교과서, 수험서, 소설 등 책이 가득했다. 태양이 책을 모두 빼내 버릴 걸 고르는데, 창고 안쪽에서 핑크색 상자가 보였다. 꺼내서 열어보니 일기장과 책 한 권, 편지, 팔찌 등이 있었다. 일기장은 태양이 입대 전부터 제대 후까지 쓴 것. 팔찌는 지수가 만들어 태양에게 건넨 선물이다. 케이스에 담긴 책 한 권은 지수가 299일 간 태양과 연애를 기록한 일기이자 편지다.

 태양은 조용히 핑크색 상자를 집으로 가져왔다. 피곤한 태양은 상자를 한쪽에 두고 잠이 들었다.


 옷을 갈아입고 출근을 준비하던 지수가 태양에게 말을 건다.

 "여기 뒤에 지퍼 좀 올려줘."

 태양은 지수에게 다가가 지퍼를 올린다. 지수가 태양을 향해 돌아서자 얼굴이 변한다. 지금 아내의 얼굴로. 태양은 깜짝 놀라 잠에서 깬다. 이런 꿈을 종종 꾼다. 그리고 자주 생각한다. 그 시절로 돌아가고 싶다고.

 어두운 방안, 핑크색 상자 틈새로 빛이 새어 나온다. 상자를 열자 지수가 준 책이 황금빛을 띠고 있다. 태양이 책을 폈다. 지수는 책 첫머리에 태양을 위로하는 글을 적었다. 태양은 글을 읽고 책에 눈물을 흘렸다.


 '힘들고 지친 하루를 마무리하고 돌아와

 책상에 앉아 한 글자씩 읽어 내려갈 때마다

 당신에게 작고 편안한 안식처가 되기를…'

 from : 김지수 //


 태양이 책장을 넘기려던 순간, 눈물이 종이에 스며들었다. 그리고 황금빛이 태양의 몸을 휘감았다. 태양은 정신을 잃었다. 건물에서 떨어지기를 반복한 태양은 꿈에서 깼다. 그렇게 태양은 대학시절 아르바이트하던 화장실 안에서 담배를 물고 있었다.


 태양이 화장실 밖으로 나가려던 순간, 문을 열고 누군가 들어왔다. 태양은 다시 변기가 있는 쪽으로 들어갔다. 사람들이 나가고 태양은 화장실 문을 살짝 열고 밖을 봤다. 문틈 사이로 누군가 눈이 마주쳤다. 지수였다.

 "모해? 뭘 훔쳐보는 거야? 얼른 나와, 다들 기다리잖아."

 또렷하게 들리는 지수 목소리를 확인하고 태양은 놀라 자빠졌다. 태양은 다가온 지수에게 조용히 물었다.

 "지수야, 오늘 며칠이야?"

 "무슨 소리 하는 거야? 오늘 내 생일이잖아, 그래서 알바 쉰다며."

 태양은 기억을 더듬었다. 재수한 태양은 동기들보다 한 살 많다.

 ‘지수 생일이라면? 우리 자리는 가장 큰 테이블이다. 지금은 2005년 6월 19일, 1학기 기말고사가 끝난 날.’

 호프집에는 ‘살다가’라는 노래가 흘러나왔다. 태양이 술자리로 가자 아는 얼굴들이 보였다. 대학 졸업 후에도 계속 만나는 동걸이와 민훈이. 미진, 해리, 진주 등. 10명이 넘는 친구들이 모여 있었다.

 ‘진짜 대학교 1학년으로 돌아왔다. 이건 생시다.’


 <다음화에 계속>



 가제 ‘태양의 지수’였던 소설을 처음 내놓습니다. 집필이 다 된 상태에서 연재를 시작하는데요. 부족한 부분이 있어 수정해 가면서 연재하겠습니다. 태양과 지수의 사랑이야기를 시간여행 형태로 재미있게 쓰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그 시절, 향수를 불러일으킬 만한 소재로 다가갈 테니 편안한 마음으로 읽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첫 번째 편이라 고민이 많아 글의 양을 지난번 연재(떠난이들) 보다 줄인 점 양해 부탁드립니다. 감사합니다. <작가 말>



<숨 빗소리_ 신작원고_이창호 소설>


이창호 - 현직 기자. 책 <그래도 가보겠습니다>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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